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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대신 소설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서동욱의 문학 칼럼] 문학과 구원

한 때 문학이 역사, 철학을 대신할 때가 있었습니다. 시를 읽고서 사람, 자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고, 소설을 읽으며 기성세대가 감추려 했던 역사의 진실을 파악하고,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논리를 벼렸지요. 에세이는 철학적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문학의 모습은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의 힘을 신뢰하며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근 시집 <곡면의 힘>을 펴낸 서동욱 시인(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도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프레시안>은 서동욱 시인과 함께 문학 칼럼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문학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는 매우 다채롭습니다. 서동욱 시인은 이 다채로운 논의의 핵심에 위치한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근본 주제를 꼽아보았습니다. 진실, 구원, 현실에 대한 참여가 그것입니다. 이 연재가 문학의 본성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문학은 우리를 구원(salvation)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문학에서 구원을 찾는 일은 우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 번지수 틀린 억지일까? 구원의 문제를 한 개인의 글쓰기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으로서 작가가 문학을 손에 쥐고 구원을 받든 숟가락을 손에 쥐고 구원을 받든, 아니면 그냥 이 문제를 제쳐두건 그건 정말 '개인적인' 문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작가 개인의 삶의 구원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 차원의 구원은 그냥 글쓰기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똑같으며, 모든 사람은 글쓰기를 통해서든 애인을 통해서든 다른 무엇을 통해서든, 식사 메뉴의 선택에 따라 점심의 만족을 극대화하듯 취향대로 구원받으면 된다. 우리가 말하는 문학의 구원은 작품 안에서 '보편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구원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종교적 원천과 뗄 수 없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위험이나 악,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문학은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또 종교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문학은 저 종교적 함축을 지닌 구원을 세탁해서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자신 안에 수용할 수 있을까? 구원이란 말을 자의적으로 쓰고 싶지 않다면 구원의 저 기원적인 종교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문학을 종교에 종속시키고 싶지 않다면 저 구원의 의미를 탈종교화해야 할 것이다.

종교 없는 구원.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일단 깨닫게 되는 것은, 종교적 배경을 지닌 문인이 자신의 종교를 기준으로 해서 문학을 구원의 수단으로 내세우는 것 역시 구원과 관련된 문학의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 안에서 구원이란 말은 자의적인 은유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 말의 기원에 있는 종교와도 상관없어야 한다. 서로 배반하는 듯한 이 양면적 요구는 충족될 수 있을까?

사실 문학은 구원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옮김, 한길사 펴냄)이 다루는 바로크 시대의 연극을 보라. 바로크 작가 로엔슈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렇다. / 하나님이 교회 묘지에서 수확물을 거두어들이신다면 / 나 이 해골은 천사의 얼굴이 되리라."

인간의 의지 너머에서 메시아가 찾아왔을 때처럼, 해골은 천사의 얼굴을 얻는 구원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벤야민은 말한다.

"사탄의 깊은 정신에 자신을 내맡기고 드러냈던 그 세계는 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몰두하는 작가는 일상의 죽고 또 죽는 것들, 해골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이 갑자기 신의 세계 속에서 빛나게 될 수 있는 국면을 소망한다.

여기서 벤야민이 말하는 저 신의 세계는 실은 탈종교화된 세속적 세계의 정치적 맥락에 자리한다. 문학과 구원의 연결 고리를 보여주면서도 정치적 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벤야민의 이 독창적인 문학론은 오늘 날 더욱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 문학론만을 본격적으로 추적하는 것은 이 글을 지나치게 좁게 만드는 일일 듯싶다. (이 문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나의 글, '현대 사상으로서 바로크'(<철학논집> 44권)를 참조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보다 기본이 되는 논의, 즉 구원이라는 논제의 기원과 그것이 문학 안으로 스며들어온 일반적 양상에 일차적으로 초점을 두려고 한다.

고전적인 정의에 입각해 볼 때 악은 결핍에서 태어난다. 가령 생각하는 능력의 결핍이 야기하는 많은 악을 떠올려 보라. 죽음은 삶이 주는 수많은 것들, 참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의 결핍을 초래하므로 그 자체로는 악이다. 따라서 이 악으로 부터 떠나는 일을 문학이 가늠할 수 있다면, 즉 죽음의 반대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면 문학은 구원의 과제를 떠맡을 수 있으리라.

먼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부터 살펴보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김종건 옮김, 범우사 펴냄)가 다루고 있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윤회(輪回)', 그리스적 어원을 가지는 '머템시코시스(Metempsychosis)'이다.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믿기를 (…) 우리가 사후(死後)에도 또 다른 육체 속에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거요,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도 살았었다는 거요. (…) 그래서 윤회란 (…)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거요. 그들은 예를 들어, 사람들이 동물이나 나무로 변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곤 했었지. 예를 들면, 그들이 님프라고 불렀던 것도."

이런 윤회, 머템시코시스는 들뢰즈 역시 <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 이는 마치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라 불리는 것이다."

몇몇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사유하고 있는 이 윤회는 죽음 뒤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조이스는 이런 불멸성을 즐겨 '에피파니(顯現)'라는 말과 더불어 설명하기도 했다. 조이스는 <스티븐 히어로>에서 말한다.

"바로 그 대상의 영혼이 (…) 외관이라는 허울을 벗고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 조화로운 구조를 지닌 가장 평범한 대상의 영혼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것 같다. 그러면 그 대상은 에피파니를 달성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조이스가 말한 머템시코시스나 에피파니와 유사한 이야기를 켈트인의 신앙을 떠올리면서 하고 있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와 사별한 이들의 영혼은 어떤 하등 생물, 짐승이나 식물, 무생물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그 나무의 곁을 지나가거나, 혼이 갇혀 있는 사물을 손에 넣거나 하는 날(이 날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결코 오지 않긴 하지만)이 올 때까지는 이들의 영혼은 확실히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다."

죽지 않고 사물 속에 간직된 혼이 그 혼과 친화적인 이가 지나갈 때 조이스의 에피파니와 같은 것을 달성한다. 즉 그 혼은 말을 건넨다.

세속적인 현대 유럽 문학이 간직한 이런 불사의 이야기, 즉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영혼의 이야기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박광순 옮김, 범우사 펴냄)에서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육체가 죽으면 차례로 계속해서 갓 태어나는 다른 동물의 몸속으로 들어가 머무른다는 설을 주장한 것도 이집트인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이런 영혼 불사의 이야기는 이집트에 유학 갔던 그리스인 피타고라스를 통해 그리스인들에게도 전해진다. 가장 오래된 철학자 평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전양범 옮김, 동서문화동판)―보다 널리 알려진 제목은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이다―에 피타고라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때 그는 강아지가 매를 맞고 있는 곁을 지나쳤을 때 불쌍한 마음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만하시오. 그것은 바로 내 벗의 영혼이니까. 울음소리를 듣고 그것을 알았소."

죽은 벗의 영혼은 살아남아 강아지가 된다. 피타고라스 자신의 영혼 역시 피타고라스로서 이승에 태어나기 이전 아이타리데스, 에우포르보스, 각종 동식물, 헤르모티모스, 피로스 등 여러 사람 및 각종 생명체 속에 들어가 살았었다고 전한다. 물론 저승도 다녀왔다.

윤회를 통한 이런 영혼 불사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에 와서 세련된 형태를 갖춘다. <파이돈>(전헌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사후의 불멸성 자체를 생각의 중심에 놓고 있다.

"만약에 영혼이 불사한다면, 그것의 돌봄은 사실 우리가 살아있음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 그 시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위해서 필요하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에 무관심하기라도 하면, 이제 정말 그 위험은 무서운 일로 여겨질 걸세. 만일 죽음이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라면, 나쁜 인간들에게 그것은 신의 선물이겠지. 그들은 죽을 때 몸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영혼과 함께 자신들의 나쁨으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니 말일세. 그런데 이제 영혼이 실은 불사인 것이 분명하니, 그것에게는 최대한 훌륭해지고 현명해지는 것 외에는 나쁜 것들로부터의 어떤 도피나 구원도 없네. 왜냐하면 영혼은 교육과 양육 외에는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은 채 하데스로 가게 되는데, 바로 이것들이 저승으로의 여정의 맨 처음부터 죽은 자를 최대로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한다고 이야기되는 것이니 말일세."

플라톤의 이 구절과 더불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의 영혼이 종교사 속에 등장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이집트인들로부터 시작해, 그리스인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거치며, 죽음을 이겨내는 불멸의 주제는 서구인들을 사로잡았다. 이 불멸의 사상은 이후 기독교라는 외관을 얻게 되고 그 종교 안에서 '구원'의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이후 우리가 보았듯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이들이 내놓은 현대 문학은 더 이상 종교 안에 머물지 않지만, 구원의 문제를 세속화해서 계속 사유한다. 그래서 우리가 떠맡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종교 없이 불멸하는 영혼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종교 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조이스라면 에피파니라 칭했을 법한 마들렌 체험을 통해 불멸하는 어떤 것을 엿보고 나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 이상 나 자신이 보잘것없고 우연적이며 필멸(必滅)하는 존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문장은 서구 사상의 바탕에 있는 '같은 것끼리 통한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동류(同類)의 것만이 서로 알아볼 수도 있고,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따라서 불멸하는 것을 엿본 영혼은 곧 자신의 불멸성 자체를 엿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플라톤이 이미 프루스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불멸하는 이데아를 인식한 이는 이데아와 동류로서의 불멸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프루스트의 주인공은 영원한 것을 엿보게 해준 마들렌 체험(그리고 소설 말미에 더욱 빈번히 등장하는 비슷한 체험들)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필멸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셈인데, 도대체 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정말로 하늘나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일일까? 이상향에 대한 상상이 낳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를 제거한다면, 도대체 구원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사르트르의 <구토>(김희영 옮김, 학원사 펴냄)의 주인공의 체험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 로캉댕은 음악을 들으면서 프루스트의 주인공과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음악의 배후에 서 있는 불멸하는 것을 이렇게 감지하는 것이다.

"존재의 저편에서, 아득히 보이면서도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다른 세계에서, 하나의 작은 멜로디가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있어야 해.' (…) 매일매일 해체되고 벗겨지고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그 소리들 뒤에서, 여전히 젊고 단단한 멜로디가 매정한 증인처럼 서 있는 것이다."

죽음 뒤에도 단단히 서 있는, 그러므로 불멸하는 멜로디가 있다. 그런데 그 멜로디는 뭔가 놀라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처럼 있어야 해.' 즉 참된 것을 보았다면 참되게, 선한 것을 보았다면 선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면 아름답게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불멸하는 그것처럼 있어야지만 그 불멸자와 동류의 것이 될 수 있고 불멸성 역시 얻을 수 있을 것이지 않겠는가? 결국 '나처럼 있어야 해.'라는 목소리는 불멸의 길로 이끄는 가르침인 것이다.

결국 구원의 과제 안에서 진정으로 제시되는 것은, 자신이 엿본 불멸하는 것의 참됨과 좋음과 아름다움을 자기 삶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독서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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