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995년부터 불평등이 심해지기 시작하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 임원 등 근로 소득 최상위 0.1%가 가져가는 연봉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근로자 평균 연봉의 10배였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경제 구조 및 기업 구조가 미국식으로 대전환하면서 그것이 급등하여 10년 뒤인 2010년에는 그것이 20배로 상승했다.
2016년 현재 그 격차는 20배보다 더 큰 수치로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온갖 경제 정책이 가장 부유한 최상위 0.1~1%의 부와 소득을 늘리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로 소득만이 아니다. 재산 소득을 포함한 개인 종합 소득의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부유층과 평민 간의 종합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90년대 중후반부터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에 이식된 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때문에 불평등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두 번째 견해는 여전히 강력하게 잔존하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중상주의적 경제 구조, 구체적으로는 재벌 그룹과 관치 경제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시각이다.
이 책의 필자인 나는 앞의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1993~1997년)는 세계화, 시장화, 자율화 등의 기치를 내걸고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했다. 과거의 국가 주도 중상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자유 시장 자본주의(free market capitalism)로 전환한다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다양한 구조 개혁 즉 시장 개혁을 시작했다. 그런데 매우 공교롭게도(?) 그러한 구조 개혁이 착수되는 1994~1997년이 바로 불평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와 나는 노무현 대통령 치하인 2005년 7월에 발간된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키 펴냄)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시민 단체들이 서구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진보적 자유주의라 부르면서 그것을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사조를 따르다 보면 양극화 심화와 함께 경제 성장 기반이 와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이자 '종북 빨갱이'라고 비난했지만 경제 문제에 국한해서 볼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재벌 개혁과 금융 시장 개혁, 공기업 사영화, 노동 시장 유연화 등은 좌파는커녕 신자유주의 즉 보수에 가까웠다. 대표적으로, 경제 민주화라는 멋진 진보 용어로 포장된 재벌 개혁 역시 그 개혁의 방향이 미국의 월스트리트 주주 자본주의를 그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또 한국 최고의 부유층인 재벌 일가를 공격한다는 면에서 일견 민주화 운동의 연속인 것 같았지만 실은 서민, 노동자의 이익을 공격하는 국내외 자산가 및 투자자와 그 정점에 있는 국내외 금융 자본의 장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치하에서 실제로 진행된 빈익빈 부익부의 소득 양극화로 드러났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밥 먹여줄 것'이라고 기대한 많은 서민들이 실망했으며, 그래서 서민들은 200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방조했다. 빈부 격차 심화와 청장년 실업 증가, 노인 빈곤 등에 견디지 못한 서민들이 박정희를 흉내 낸 이명박에게서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박정희와 정반대로 원조 시장주의자(신자유주의자)였고 대규모 부자 감세와 대기업 감세, 공기업 민영화, 노동 시장 유연화 등 본격적인 시장주의 개혁을 감행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다.
노무현 대통령 치하였던 2005년에 발간된 <쾌도난마 한국 경제>에서 장하준 교수와 나는 스웨덴 복지 국가를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 당시 대다수 야권 인사들은 '웬 생뚱맞은 복지 국가?, 웬 생뚱맞은 스웨덴?'이라고 반응했다. 그런데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레이건과 부시를 흉내 내면서 작심한 듯 부자 감세, 대기업 감세와 공기업 및 공공 서비스의 사영화, 시장화를 추진하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야권과 시민 사회에서 북유럽 복지 국가 논의가 처음으로 불붙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여야 간의 대립 전선을 새롭게 그어준 것이다.
미완의 근대화, 미완의 자유주의 때문에?
그런데 이러한 나와 장하준의 견해는 적어도 야권에서는 소수 의견에 속한다. 다수의 야권 인사들은 이와 사뭇 다르게 생각한다. 이들은 과거 개발 독재 시대의 중상주의(mercantilism) 경제 구조의 유산인 재벌 그룹 체제와 관치 경제가 지금도 구조적으로 해체되지 않은 채 강고하게 지속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소득 불평등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재벌 그룹과 관치가 지배하는 한국 경제는 여전히 '덜 근대화'된 경제 체제이고 따라서 한국 경제에 필요한 개혁의 방향은 근대화를 완성하는 개혁 즉 '자유주의 개혁'이라고 설명한다. 서구의 18~19세기에 중상주의 경제와 제정 정치를 무너뜨렸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 혁명, 그리고 그 변혁에 영감을 주었던 존 로크, 애덤 스미스, 볼테르와 알렉시스 드 토크빌 등의 정치경제 사상에 내재된 고전적 자유주의야말로 2017년 말 집권을 준비하는 야권의 국가 개조, 경제 구조 개혁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야권의 이러한 다수파 견해를 최근에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장하성 고려대학교 교수가 2014년 여름에 발간한 책 <한국 자본주의 : 경제 민주화를 넘어 경제 정의로>(헤이북스 펴냄)와 그리고 2015년 가을에 발간한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헤이북스 펴냄)이다. 이 책들에서 장하성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인 대통령이 지배한 1960년대에서 1980년대의 30년간의 기간을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다를 것이 없는 국가주의 경제, 자유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않았던 관치 경제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심각한 소득 양극화 및 빈부 격차 역시 그로 인하여 발생한다고 말한다. 즉 과거 박정희의 망령인 중상주의적 관치 경제와 재벌 그룹 체제가 2016년 이 시점의 한국 경제에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으며 그래서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불평등 해소 방안은 결국 '재벌 그룹 혁파와 관치 경제 혁파'로 집약되는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전환이다.
인과 관계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물론 삼성그룹의 이건희-이재용 일가와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정의선 일가, LG의 구본무 일가와 SK의 최태원 일가로 대표되는 재벌 가문에 집중된 부와 소득을 외면한 채 누구도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야권의 경제학자조차 부인할 수 없는 또 다른 명백한 사실은 재벌 그룹과 관치 경제의 전성기였던 1970~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까지의 시기에는 불평등이 심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완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의 자연스런 의문이 떠오른다. 국가 주도, 재벌 주도 중상주의의 전성기는 1990년대 중반 이후가 아니라 1970~80년대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는 오히려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더구나, 국가주의 또는 중상주의가 크게 쇠퇴하여 기껏해야 '유산'(영어로 legacy라 불리는)으로 잔존할 뿐인 19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야 비로소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 양극화가 본격화되었다. 왜 그럴까?
과학적 사고는 인과율을 중시하며 인과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적 선후 관계이다. 어떤 사건 A가 일어난 직후에 B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A는 B의 원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사건 A의 발생 이전에도 B라는 사건이 이미 존재했고 더구나 만연했다면 A는 B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인과율에 위배되는 것이다.
재벌 그룹은 이미 1950년대부터 존재했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그 전성기를 누렸다. 그런데 그 시기에 소득 분배는 별로 악화되지 않았다.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 격차 심화'를 사건 A로 놓고 '재벌 그룹 및 관치 경제(국가 주도 경제)의 존재와 번영'을 사건 B로 놓고 생각해보자. 재벌 그룹 및 관치 경제의 존재와 번영(사건 B)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는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 격차 심화(사건 A)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득 분배가 악화되어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이 경우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왜 하필 1990년대 중후반이지? 그 시기를 전후하여 무슨 일이 발생했지?'라고 물으며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실체적 인과 관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가장 불평등한 자본주의가 민주적 자본주의?
장하성 교수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경제에서 소득 불평등이 본격 시작되는 시점은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떤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 시기는 바로 김영삼 문민 정부가 군부 독재 시기의 국가주의적 계획 경제 또는 장하성 교수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회주의적 관치+계획 경제'를 해체하고 '세계화, 시장화, 자율화'를 기치로 내걸면서 WTO 가입(1994년)과 OECD 가입(1996년)에 나선 때이다. 그리고 WTO 가입과 OECD 가입의 선결 조건은 금융 시장 규제 및 산업 규제의 완화 즉 이른바 규제 완화 또는 탈규제와 대외 개방=시장 개방이었다. 이 모든 변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더 많은 자유 시장(more free market)'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폐기했으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주무 부처인 경제기획원 역시 해체했다. 박정희 군사 정권에 의해 1962년에 시작되어 31년간 지속되어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경제기획원의 계획 경제=관치 경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런데 매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다음해인 1995년부터 한국 경제에서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개시된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더구나 1998년 2월 집권한 김대중 민주 정부는 미국을 가장 바람직한 경제 모델로 하는 이른바 시장 개혁을 단행한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경제 모델로 숭앙받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 역시 미국 자본주의를 모델로 하는 대대적인 구조 개혁 즉 시장 개혁에 나섰다.
그런데 미국 경제에서는 1980년 레이건과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여 이른바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 경제 정책을 관철시킨 이래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임금 소득 상위 10% 대 하위 10% 사이의 임금 불평등이 계속 악화되었다.
1981년 3.8배였던 그것은 1995년에 4.6배에 달했으며 2012년에는 5배로 더 늘어났다.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기의 후반인 1998~2000년 기간에 그것이 약간 개선되었는데, 하지만 2001년 아들 부시가 대통령에 집권하면서 다시 악화되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2008년 가을 이후에도 그것은 개선은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최근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정치판에서 '불평등 타파'를 내세운 버니 샌더스 후보가 약진한 이유이다.
1993~2000년의 8년간 집권한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치하에서 미국인들의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의 경제 정책을 이끌던 경제학자들과 경제 관료들은 한국 경제에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이끄는 미국 자본주의를 제시했다. 그리고 미국 경제를 모범으로 하는 경제 구조 개혁 즉 시장 개혁을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단행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로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 시기에 심화된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과율에 부합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물론 선진국 중 가장 불평등한 미국 자본주의가 한국 경제의 구조 개혁 방향으로 가장 모범적이며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믿음은 2008년 가을에 발생한 미국발 금융 위기로 산산조각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초 집권한 이명박 한나라당 정부는 시장주의 또는 자유주의 정신을 숭배하면서 그것을 기조로 하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공기업 사영화, 노동 시장 유연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2013년 초 집권한 박근혜 새누리당 정부 또한 저성과자 일반 해고와 성과 연봉제, 공공 기관 성과급 등 노동 시장 유연화를 계속 추진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의 골드만삭스를 모델로 하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우려고 애쓰고 있다. 철도와 전기를 사유화-민영화하려는 노력도 계속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치하에서도 계속 악화되고 있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1990년대 초반부터 2017년까지 김영삼(1993~1997), 이명박(2008~2012년), 박근혜(2013~2017년)의 3명의 보수 대통령이 15년간 통치했다. 그리고 김대중(1998~2002년)과 노무현(2003~2007년)의 2명의 민주 대통령이 10년간 통치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보수, 민주 정부에서 경제 정책을 이끈 경제 관료와 경제학자들은 동일 인물이거나 또는 비슷비슷한 성향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시장 원칙'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free market capitalism)를 가장 바람직한 유토피아로 여기면서 그것을 향한 경제 구조 개혁에 나섰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의 꿈이 활짝 펼쳐지던 시기에 소득과 부의 양극화는 일관되게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자유 시장 자본주의(free market capitalism)와 불평등 심화 사이에는 적어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긴밀한 인과 관계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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