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사건 주모자’ 체포·처벌은 명백한 공권력 남용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결정문에 따르면 이원갑씨 등 ‘사북사건’ 피의자들은 1980년 5월 6일 경찰서에 강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그달 26일 이감절차를 밟고 원주 1군사령부 101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 체포된 광부와 부녀자들은 정선경찰서에서 약 20일 간 보안사 수사관들의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에 의해 ‘죄인’으로 만들어진 뒤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법에 따라 1군사령부로 이감된 것이다.
당시 정선경찰서에 연행돼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를 동반한 조사를 받은 15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 가운데 이원갑, 신경씨 등 31명이 원주 1군사령부 검찰에 넘겨졌다.
원주 101헌병대로 옮겨졌지만 경비를 담당하는 헌병, 조사를 담당하는 군 검찰관, 수사관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한 것으로 ‘진실위’는 확인했다.
지하 막장에서 탄 캐는 일만 했던 순박한 광부들은 정선경찰서에 연행된 이후 ‘인간도살장’ 같은 곳에서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경험하면서 이들은 인간존엄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원주 1군 헌병대에서는 정선경찰서와 다른 ‘대우’를 기대했지만 첫 날부터 그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원주에서 검찰조사를 받을 때, 검찰 서기가 서 있는 나를 넘겨 패대기를 치고 군검찰관이 달려들어 구둣발로 오른쪽 옆구리를 두 번 걷어 찼다. 그 다음에 양손 깍지를 끼고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검찰서기가 야전침대 자루로 엉덩이를 여러 번 때렸다.
다시 검찰관이 일어서라고 하고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대답하라’고 하며 또 양쪽 뺨을 세 차게 갈겼다. 나는 그 다음부터 무조건 ‘예’ ‘예’하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또 때렸다. 나중에 조서에 지장을 찍을 때도 서기가 내 손을 끌고 찍었고 군검찰관이 조서를 한 장씩 넘겼다. 맞다가 명패를 보니 ‘검사 중위 아무개’라고 적혀있는 것을 봤다.”(2006.8.1. 강윤호씨 진술)
“나한테 구체적인 고문은 없었지만 검찰이 ‘다시 보안사로 가고 싶어’하며 은근히 협박을 했다. 그러나 군검찰관 조사 때 다른 광부들이 엎드려뻗쳐 등 기합을 받는 것을 보았다.”(2007.1.15. 최정섭 당시 광산노조연맹 위원장 진술)
당시 ‘사북사건’ 피의자들은 원주 1군 헌병대에 구속 송치된 후 검찰 수사과정에서 유치된 101헌병대 영창에서 헌병대원들로부터 ‘철창타기’, ‘원산폭격’, 큰 절하기‘ 등 ’군대식‘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헌병대 영창에서는 거꾸로 선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손을 뒤로 한 채 벽에 발을 대고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있도록 했다. 원산폭격과 군대 유격훈련에서 시키는 피티 체조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2006.6.9. 이원갑씨 진술)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 비틀기, 볼펜 위에 머리를 대고 ‘원산폭격’하기, 피티체조를 당했다. 영창을 감독하는 헌병대 하사, 병장 들이 주로 그런 짓을 시켰다. 1980년 8월 중순경 영등포구치소에서 순화교육이 시작됐다. 봉체조, 피티체조, 오리걸음 등 각종 기합과 가혹행위가 상고심과 1982년 7월 7일 출소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순화교육이란 이름하에 봉체조며 피티체조로 어깨가 뭉개지고 진물이 난다. 진물로 젖은 살갗이 밤새 모포에 달라 붙어 6시 기상시간에 잘 떨어지지 않았던 그 기간이 정말로 악몽 같았다.”(2006. 6.7. 신경씨 진술)
사북광업소에서 노조 대의원을 했던 신경씨의 경우 원주 1군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을 받던 중에도 가족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계엄이 끝날 때까지 군 영창과 교도소에서 순화교육을 받았고 ‘봉체조’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특히 당시 계엄사 합수부 수사관들은 광부들에 이어 사북광업소 이혁배 사장도 연행해 정선경찰서와 원주 보안대에서 전신을 구타하는 등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진실위’는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정선경찰서에서 사흘 정도 있다가 원주에 있는 1군 헌병대 영창에 한 달 가량 있었다. 원주에 있으면서 원주보안대에 4, 5차례 불려가 보사받았다. 원주보안대에서는 구속할 꼬투리를 잡으려 했었고 회사비리 등을 주로 캐물었다. 보안대 직원들로부터 1미터 남짓한 각목으로 온 몸을 구타당했다.”(2007.1.22. 이혁배씨 진술)
정선경찰서에 이어 원주 1군사령부에서 군검찰에 의해 자행된 가혹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에 나가 발설하지 말 것을 압박한 것으로 ‘진실위’는 조사를 통해 확인했다.
“재판 받고 풀려날 때 나가서도 조심해라.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 고문 받았다는 이야기, 누구에 의해 끌려오게 된 것인지 등에 대해 함부로 말하다가는 또 잡혀 온다며 협박했다.”(2006.8.9. 노금옥 진술)
1군사령부 검찰(검찰관 중위 구본성, 구욱서, 이교림, 정구환, 신태영)은 합동수사단 수사결과를 토대로 1980년 5월 20일 및 같은 해 6월 14일 두 번에 걸쳐 총 31명을 구속했다.
같은 해 6월 17일 31명(광부 28명, 광산노조연맹 2명, 이재기 지부장 등)을 기소하고 50여 명의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해면서 ‘사북사건’ 수사를 공식 종료했다.
사북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1심 공판은 1980년 6월 30일 개시했다.
1980년 8월 6일 1심 재판부(80보군협제 30, 34호, 재판장 대령 조광희, 법무사 소령 임원배, 심판관 대령 민병선)는 ‘계엄포고령’ 위반, 소요죄, 특수공무방해치사, 특수공무방해치상, 특수공무방해, 공용물건소상,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야간 주거침입절도, 위조인장, 인장위조 행사 등의 죄로 이원갑과 신현이를 각각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또 신경, 조행웅, 신천수는 각 징역 3년, 강윤호는 징역 2년, 전선자는 징영 1년 6월, 최돈혁, 오항규, 진복규, 전효덕, 최흥선, 윤병천, 문명옥, 안재, 정인교, 민기복, 천칠성, 이창식, 최이선을 각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양규용, 윤광원, 노금옥, 강신자, 최옥자, 박노연, 전용주, 김대연 은 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노조지부장 이재기는 업무상횡령, 공문서 위조, 위조 공문서 행사죄로 징역 2년, 광산노조연맹 위원장 최정섭은 업무상 횡령, 위조인감 행사방조, 공갈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광산연맹 황한섭 조직부차장은 계엄포고령 위반 방조죄로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1심 선고 이틀이 지난 그해 8월 8일 제1군사계엄보통군법회의 관할관 대장 윤성민은 이원갑과 신현이에 대해서는 징역 3년, 신경, 조행웅, 신천수는 각 징역 2년으로, 강윤호는 징역 1년으로, 이재기는 징역 6개월로, 전선자는 형 집행면제로 각 감면했다.
이후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는 1981년 1월 24일 이원갑, 신경, 조행웅 등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4개월 가량 지난 그해 5월 6일 대법원 상고심은 이원갑에 대해 인장 위조, 위조인장 행사죄에 대해 원심을 파기했으나 신경과 조행웅에 대해서는 상고를 기각했다.
계엄군에 의해 진행된 ‘사북사건’ 재판을 목격한 손인숙 수녀(사건당시 고한성당 소속)는 2006년 10월 22일 ‘진실위’ 임채도 조사관에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가족들과 함께 재판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지학순 주교님이 추천한 임광규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정하고 구속자 가족들을 만나 변호사 선임계 서명을 받기 위해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재판장에 갔다.
당시 계엄하에서 군인 판사들이 우리 광부들에게 의외로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판사들이 광부들의 사정을 알게 되니까 오히려 경찰들을 재판에서 나무라는 것도 보았다. 나중에 지학순 주교님의 소개로 1군 사령관을 만났다.
사령관에게 구속된 광부들의 가족들이 사택에서 쫓겨날 상황에 있고 쌀 배급도 중단되었다고 얘기했더니 다음에 군인들이 현지에서 조사를 하고 나서는 광부들이 사택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쌀 배급도 계속되었다. 나중에 사령관에게 고맙다고 우리 수녀 4명이 카드를 보냈다.”
한편 ‘진실위’는 2006년~2007년까지 진행된 현장조사와 관련자 진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임채도 조사관은 “사북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와 연행은 실제 수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주민 탐문과 현장사진자료를 근거로 작성된 ‘사북난동사건 관련자 명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리 조사대상자를 주동자, 선동자, 행동대원으로 분류한 명단에는 6.25전쟁 전후 친척들의 부역사실까지 언급되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방대한 신원조회를 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이번 조사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당시 합동수사단에서 사북사건 관련자들의 실제 범죄혐의 뿐 아니라 ‘대공 용의점’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의 ‘사상전력’사항까지 수상했음이 드러난 것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진실위’는 결정문을 통해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던 사북사건 주동자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은 피의자에게 제3자의 범죄 사실에 대한 진술을 강요했다. 수백 명의 관련자들은 가혹행위에 못 이겨 서로 무고한 이웃을 허위로 밀고하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사북광업소 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그 관련자들은 현재까지도 서로의 책임을 묻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사북사건’ 출소자와 그 가족들은 경찰과 광업소 관리자들에 의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진실위’는 밝혀냈다.
《훈방, 기소유예, 집행유예, 형기만료 등으로 출소한 ‘사북사건’ 관련자들은 회사에 복직되기도 했으나 일부는 이른바 ‘블랙리스트’로 인해 부당한 취업제한을 당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자진 퇴사했다. 또 경찰 기록에 의하면 강원도 정선경찰서는 출소한 광부들과 복역중인 광부가족들에 대한 감시를 ‘1대1 감시조치 요망’이라고 보고했다.
《광업소 무기고 및 화약고 봉인 조치와 동시 경찰 1명, 지역 예비군 10명으로 경비 강화하고 집행유예로 재취업 중 광부 16명에 대한 1:1감시와 실형 복역중인 8명에 대한 가족들에 대한 1:1 감시조치가 요망됨.(정선경찰서 1980.10. 10. 문서번호 2064- 수신 강원도지사, 사북사건에 대한 경호상 문제점 도출보고)》
‘진실위’는 ‘사북사건’ 발생결과 탄광사회의 문제저으로 지적된 정부의 저탄가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고, 광부들의 임금인상, 주거 및 복지후생시설 확충 등 처우개선이 이루어졌다. 또 언론의 후속보도를 통해 그늘진 탄광촌에 대한 조명과 사회적 관심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진실위’는 조사를 마무리 지은 뒤 2008년 4월 8일 핵심 3가지 권고를 결정했다.
《 사북사건’에 대한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기본법 제4장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행할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국가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밝혀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가혹행위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고 피해자들과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사북사건 이후 연행 구금되었던 사건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는 김순이와 그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관련자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신뢰를 보호하고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북사건 당시 계엄당국은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사북사건의 교훈을 통해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고 사회집단들의 이해충돌과정이 민주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 》
한편 지난 2008년 4월 8일 ‘사북사건’의 진실을 추적, 확인해 화해를 결정하기까지 ‘진실위’ 내부에서 ‘폭동논란’과 ‘광부들의 갈등’으로 폄하하거나 왜곡된 시각 때문에 내부반대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진실위’는 자칫 내부 반발로 인해 ‘사북사건’의 진실조사와 현장조사가 불발될 뻔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진실위’에서 ‘사북사건’ 조사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한 임채도(현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장)씨는 사북사건의 현장조사와 보고서 채택과정에서 피 말리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북사건 조사는 출발부터 논란이 많았다. 진실위원 15명 가운데 보수진영 인사들은 광부들의 폭동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미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대 입장을 강하게 밝혔다. ‘사북사태’가 어찌 민주화로 미화될 수 있느냐는 식이었다.
사북사건 조사는 광부들의 폭동을 미화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진보적인 인사들도 왜 하필 광부난동사건을 조사하느냐는 식으로 못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 예를 들면서 진실위원들과 논쟁을 벌였다.
광부들의 인권은 인권이 아니고 광주시민들만 인권을 말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사북사건의 진실과 실상을 설명하는데 무진 애를 먹었다. 또 2006년 가을 현장조사를 위해 사북현지를 방문한다고 보고했지만 역시 불필요한 조사라며 출장조사를 반대했다.
필요한 인물을 사무실에 불러 조사하거나 서면으로 질의하면 될 건데 사북사건에 대해 현장조사를 하는 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현장조사를 안 하고 만든 보고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사북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그분들의 절규와 애타는 호소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사북현지에 내려가 7, 80대 시장 상인들을 만나 사북사건의 진실을 청취하면서 현장조사의 당위성을 절감했다.
무려 1년 6개월이 넘는 기간 현장조사와 서면조사, 관련서로 확인절차를 거쳐 250쪽이 넘는 분량의 사북사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보고서를 제출하자 위원들은 1970년대 탄광촌의 실상과 석탄산업 현황이 사북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며 삭제를 요구해 황당했다.
1980년 4월의 사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경과 문제점을 알아야 한다고 버텼다. 사북사건을 미국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등에 대한 자료까지도 빼라고 위원들이 지적했다. 허탈하고 답답했다.
너무 속상해 한숨을 쉬며 퇴근한 뒤 혼자 술을 마시며 1년을 그렇게 싸웠다. 결국 250쪽이 넘는 결정문은 이것저것 빼고 96쪽으로 대폭 축소되어 마무리되었다. 사북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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