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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자 가혹행위 ‘오리발’ 내민 보안사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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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주모자 가혹행위 ‘오리발’ 내민 보안사 요원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⑪경찰은 ‘사북사건’ 주모자 가혹행위 인정

지난 2008년 4월 8일 발표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의 결정문에 따르면 ‘사북사건’의 이른바 주모자로 정선경찰서에 강제 연행돼 가혹행위를 받은 사실에 대해 경찰관들은 모두 시인했다.


그러나 당시 계엄사 소속으로 합수부수사에 참여했던 보안대원들은 장교부터 실무 수사관까지 모두 ‘오리발’을 내밀어 대조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정선경찰서에 조사계 순경으로 근무하다 합동수사단 소속 수사관 지원근무를 했던 김오규씨는 보안대원들의 피의자 구타소리와 비명소리 때문에 조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던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2006년 9월 28일)

▲폐광된 사북광업소 건물에 그려진 광부 모습.ⓒ프레시안(홍춘봉)

“보안대원들이 대기하던 방에서는 욕설 등의 소란스런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 등을 들었다. 조사를 하다가 부인을 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면 임시 조사실 한쪽 편에 칸을 만들어 보안대원들이 조사를 했다.

폭행이나 가혹행위가 그쪽에서 있었던 걸로 안다. 30대 부녀자 한 사람이 기억나는데 보안대원들이 있던 조사실로 들어가 소란스런 소리가 나는 걸 들었고, 상의가 젖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사를 하면서도 계속 해서 조사받는 소리, 비명소리가 뒤섞여 엄청나게 소란스러워 제대로 조사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보안대원들이 좀 설쳤다. 몇 몇 사람을 ‘매달았다’는 애기도 들었다. 가혹행위가 좀 있었다.”

역시 정선경찰서 소속 경찰관으로 당시 합동수사단 검거반에서 활동했던 김찬수(당시 정선경찰서 형사계 순경)씨는 연행과정에서 군인들이 광부와 부녀자들을 군화발로 폭행하고 임시 조사실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그는 임시 조사실에서 헌병대원들이 피의자들을 구타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다.(2006년 10월 20일)

“버스에 대고 읍사무소에서 수습대책회의에 참석한 광부들을 연행했다. 광부들을 버스에 태워 정선경찰서로 연행했다. 연행과정인 버스 안에서 헌병대 대원들이 광부들을 버스 좌석 통로 바닥에 앉히고 군화발로 밟고 구타하는 것을 보았다.

피의자들이 연행되어 정선경찰서에 도착하면 경찰서 정문에서 좌측에 있는 강당 건물 앞에서 헌병대 군인들이 주먹과 발길질로 심하게 때리고 구타하는 것을 보았다. 조사 받기도 전에 군인들이 아예 혼을 빼는 것 같았다.

너무 심하다 싶었다. 당시에 헌병대 군인들이 심하게 구타하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이원갑이는 주모자라서 병신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보안대원들은 한결 같이 가혹행위를 부인했다.

보안대원 손정수(당시 1001보안부대원, 정선지역 주재관, 상사)씨는 당시 합동수사단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에 대해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또 박정환씨(당시 1001보안부대 중사, 합동수사단 파견)는 정선경찰서 현장에 파견된 보안부대원들의 숫자가 5, 6명에 불과했고 실제 조사나 수사에 참여한 사실이 없다고 경찰과 상반된 입장을 밝혔다.

“당시 1001보안부대장 손영래씨, 운영과장 박기학 중령, 실무를 담당했던 최안수 준위, 손정수씨와 나, 이렇게 5, 6명 정도 있었다. 부대장은 주로 원주에 있어 현지에는 거의 내려오지 않았고 박기학 중령도 마찬가지 였을 것으로 기억난다. 현지 보안대 임무는 최 준위가 전체 조정했다.

원래 보안대는 보안과 정보업무가 기본이다. 전체적인 상황의 기획과 조정업무를 한다. 보안대원들은 그 숫자 자체가 5명 내외에 불과했고 또 수사업무를 직접 담당할 수사관이나 병력은 출동하지 않았다.

수사과정에서 발길질 정도는 있었겠지만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없었다. 나도 목격한 바가 없다. 그러나 한 번은 화장실에서 연행되어 온 여자들을 서넛 보았다. 몸에서 악취가 나갈래 나중에 도경 수사과장한테 너무 하지 않느냐 씻을 수 있게 배려해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은 난다.

검거해 오기 전에 한 번 가보았다. 손영래 부대장이 조사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히 지시했기 때문에 조사실도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칸막이를 베니어판으로 만들고, 낮게 설치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 개방적인 조사실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일어났겠느냐?“

▲1980년 5월 광주에 출동한 공수부대원이 곤봉을 휘두르는 장면. ⓒ월간조선

또 군 검찰관으로 근무했던 구본성(서울고등검찰청 소속 검사)씨는 2007년 4월 24일 작성해 ‘진실위’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사북사건 조사 당시 가혹행위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이라며 “당시 피의자들이 진술을 짜맞추려 했기 때문에 면회금지 조치를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사북사건 1심(1군사 계엄보통군법회의)의 군 검찰관으로 참여한 구욱서, 이교림, 신태영 역시 사북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목격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1군사령부 101헌병대에서 군기과 사병으로 근무했던 차명철은 ‘진실위’에 회신한 진술서를 통해 “1군사령부 헌병대 영창에서 목격한 사북사건 피의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안티프라민과 파스를제공했다”며 “유치장에서 원산폭격과 철창타기 등 가혹행위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당시 합동수사단 단장으로 근무했던 손영래(당시 강원도 원주 1001보안부대장, 대령)씨는 두 차례 사북현지에 순시한 적은 있지만 고문, 폭행을 목격한 바가 없고, 당시 합수단 수사는 경찰이 맡았다고 2006년 11월 13일 진실위에 밝혔다.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사북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고 원주 1군사령부 헌병대가 주도한 보통군법회의가 열리던 시기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한 관련자들에 대한 표창이 진행됐다.

1980년 7월 실시된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50여 명에 달하는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고문과 폭행을 자행한 책임자들인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간부들을 표창한 것이다.

표창을 받은 1군사령부 합동수사단 간부는 부단장 김익상(당시 춘천지검 원주지청 검사), 1001보안부대 중력 박기학, 중사 박정환, 강원도경 경감 백모씨 등이었다.

당시 체포영장은 물론 영문도 모르게 합수부에 억울하게 붙잡혀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한 광부와 부녀자들은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이원갑씨 등 31명은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1군 사령부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돼 군사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이원갑씨와 신경씨 등 사북사건 주모자로 연행된 광부들은 정선경찰서 내 합동수사단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변호인은 물론 일체의 가족면회 조차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진실위’는 밝혔다.

신경씨는 “1980년 5월 6일 오후 계엄군에 의해 연행된 이후 8월 6일 1심 보통군법회의 판결까지 가족면회를 포함해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2006년 6월 7일)

또 1980년 5월 합동수사단 부단장으로 근무했던 김익상(춘천지검 원주지청 검사)씨는 “정선경찰서 정문에서 구금된 광부들의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으나 면회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2007년 4월 26일)

이원갑씨의 부인 조순란씨는 “남편이 읍사무소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는 말을 다음 날 전해 들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남편을 면회하러 정선경찰서로 찾아갔지만 면회는커녕 정문에서 못 들어 가게 막았다.

이렇게 며칠 경찰서에 면회 다녔다. 하루는 밤에 동네 부녀자들이 찾아와 ‘당신 남편 때문에 우리 남편이 경찰에 잡혀 갔다. 책임을 져라’하는 것이었다. 나도 남편이 왜 잡혀 갔는지 모른데 참 난감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로고. ⓒ프레시안(홍춘봉)

내 말을 듣고 찾아 왔던 부녀자들은 모두 되돌아갔다. 남편이 원주로 이감할 때까지 매일 버스나 열차를 타고 사북광버소 사택에서 정선경찰서까지 면회를 위해 찾아갔지만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시부모에 애들은 8명이나 되는데 가장이 하루아침에 경찰서에 붙잡혀 갔으니 살기가 황당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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