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국정 운영을 하는 중에 '비선 실세'로 지목받은 최순실 씨로부터 연설, 홍보와 관련해 도움을 받았다고 25일 시인하면서, '최순실 게이트' 정국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불과 하루 전 박 대통령이 제안했던 '개헌론'은 사실상 휴짓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심지어 박 대통령의 '형사 처벌' 문제까지도 거론된다.
청와대는 그간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회자되는지 개탄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질문을 한 인사는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새누리당 민경욱 의원이다. 민 의원이 "최 씨가 청와대에 영향력 행사가 가능하냐"고 묻자, 이 실장은 "입에 올리기도 싫은 성립이 안 되는 얘기"라고 부인했다. 이 실장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믿을 사람 있겠느냐. 시스템으로 성립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민경욱 의원은 지난 2014년 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다. 민 의원이 대변인에 임명된 지 한 달 후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이 나왔는데 이 당시에도 최 씨가 해당 원고를 직접 '첨삭'해줬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민 대변인이나, 이 실장이나 모양새가 우습게 된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이 실장은 국회에서 거짓 증언을 했거나, '비선 실세' 의혹 자체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전자든 후자든 모두 중대한 문제다. 후자의 경우라면, 비서실장은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이날 사과문 발표가 결국 청와대 참모진을 모두 허탈하게 만든 셈이다. 박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기되는 네 가지 의문을 정리했다.
의문 1. 보좌진 갖춰진 후 도움 안 받아?…1년 넘게 보좌 체계 완비 안 됐다?
박 대통령은 25일 예고 없이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기자회견을 하면서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의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 최 씨의 도움을 끊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최 씨의 PC에서 발견된 파일 중에는 2014년 3월 있었던 '드레스덴 선언' 연설문이 있다. 그해 박 대통령이 제기한 '통일 대박론'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담겨 있는 중요한 연설문이었다. 이 연설문을 최 씨가 직접 수정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2014년 3월까지도 "보좌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어불성설이며 설득력도 떨어진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2013년 2월이다. 최소한 1년 1개월간 보좌 체계가 완비되지 않아 최 씨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 기간 동안 보좌했던 청와대 참모들은 민간인이고 정치 경험도 없던 최 씨의 그림자 밑에서 농락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박 대통령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다.
박 대통령의 이날 해명은 매우 짧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박 대통령이 해명한 것은 '연설문 수정'에 대한 의혹이 전부였다. 박 대통령의 "진솔한" 해명은 오히려 여러 의혹을 낳는다.
의문 2. 대통령 연설문 초안은 어떻게 청와대에서 무단 유출됐나?
박 대통령이 취임 후에도 최 씨로부터 연설문, 홍보 관련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하자, 실제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그 경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최 씨는 최소한 2014년 3월까지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정한 것으로 의심된다. 핵심은 이 연설문 초안 파일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최 씨에게 유출됐느냐 하는 부분이다.
2013년 2월부터 2014년 3월까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한 핵심인사는 정호성 청와대 제1부속실장, 그리고 최근 사임했던 조인근 전 연설기록비서관이다. 두 인사는 박 대통령 취임부터 최근까지 '대통령의 입'을 담당했었다. 조 전 비서관은 현재 한국증권금융에 감사로 재직 중인데, 이날 기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허태열 전 실장, 그리고 2013년 8월 임명된 김기춘 전 실장도 연설문 유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박 대통령이 직접 연설문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고 이날 밝혔기 때문에 최종 책임자는 박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이날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본인이 직접 문건 수정 등의 과정을 챙겼다고 밝혔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날 박 대통령의 사과문 내용에 대해 '보안 업무 규정 위반 행위' 지시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변호사는 "대통령 업무 수행의 핵심적 문서를 비밀취급인가증이 없는 비자격자에게 지속적으로 유출한 보안 업무 규정 위반 행위를 대통령이 지시했음을 대통령이 직접 확인한 것"이라며 "사과에 그칠 일이 아니며 국회가 대통령의 법률 위반 행위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문 3. 조응천도 문건 유출로 기소…박 대통령 형사 처벌 가능성은?
박 대통령은 "연설문"에 있어 "도움을 받았"다는 말로 사안을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해당 연설문 초안이 청와대 밖으로 유출됐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통령기록물법 제14조에 따르면 '누구든지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파기·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돼 있으며 '이를 위반하자는 각각 10년,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청와대에서 생산한 연설문은 대통령 기록이다. 이를 외부로 유출할 경우 누구든지 무단으로 유출, 은닉하면 아니 된다. 대통령 및 비서진은 대통령 기록 유출에 해당될 수 있으며, 최순실 씨는 대통령 기록 은닉에 해당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형사 처벌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설문 초안이 대통령기록물이 될 수 있을까? 대통령 기록물법은 대통령 기록물을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해 대통령, 대통령의 보좌기관·자문기관 및 경호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생산·접수하여 보유하고 있는 기록물 및 물품"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청와대가 연설문 초안을 생산했다면 이는 기록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 초안처럼 정본이 있고 초안을 폐기한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즉 초안을 생산한 뒤 이를 유출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이는 관련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NLL 사초 파동'과 달리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많다.
새누리당의 태도도 주목된다. 새누리당은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안에 대한 실종 의혹을 제기하며 "전대미문 사초은폐 조작"(최경환 의원)이라고 규정했다. 최순실 씨가 연루된 기록물 유출 및 은닉은 훨씬 심각한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새누리당은 이번 사안을 '사초 유출', '사초 은닉'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연루됐던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도 회자된다. 당시 청와대는 '정윤회 국정 농단' 의혹 문건을 '지라시'라고 폄하해놓고도 '청와대 문서 유출 사건'으로 규정,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적이 있다. 이번 연설문 유출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검찰 수사를 의뢰해야 마땅하다.
단 박 대통령은 헌법상 재임 중 현행범이 아니고는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 만약 이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더라도 기소 여부는 박 대통령 퇴임 후에 결정될 수 있다.
의문 4. 부족한 입장문…청와대 인사개입, 미르·K재단 의혹은 어떻게?
박 대통령의 이날 연설의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최순실이라는 이름 석자가 박 대통령 입에서 처음 발음됐다. 최순실 씨의 존재를 처음으로 직접 인정한 셈이다. 둘째, 최순실 씨가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부분이다. 셋째, 지금 최순실 씨는 국정 운영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해명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최 씨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PC에서 발견된 파일 중, 청와대 인사 개입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문제의 파일을 보면 2013년 8월 4일 오후 6시 27분 최종 수정된 '국무회의 말씀 자료'에 청와대 인사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해당 문서가 최종 수정된 다음 날 오전 10시 30분에는 청와대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 청와대 수석비서관 인사를 발표한다.
최 씨가 실제 인사에 개입했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날 해명은 충분한 설명을 담아내지 못했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모금 과정에 대한 의혹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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