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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아닌 내가 최초의 농사꾼이다!"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개미 제국의 발견>

내 나이는 46억 살이다. 내가 생명을 품을 정도로 성숙하는 데는 자그마치 8억 년이나 걸렸다. 그때부터 생명은 내게 적응하면서 종류와 개체수를 불려나갔다. 그 어떤 생명도 나를 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바꾼 환경에 그들이 적응하지 못해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멸종한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어야 새로운 생명이 등장할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생명도 영원할 수는 없다. 개체마다 종마다 수명이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는 것, 그것이 바로 진화이고 나는 진화의 산실이다. 그렇다. 나는 지구다.

수없이 많은 멸종과 다섯 차례의 대멸종은 내가 정한 일이다. 당연하다. 어쨌든 내가 자연 그 자체이니까. 그런데 불과 1만2000년 전부터 나는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선 지 700만 년 만에 등장한 호모사피엔스는 자기 멋대로 산다. 내가 만들어 놓은 환경에 적응하기는커녕 환경을 제멋대로 바꾼다. 멀쩡하던 벌판에 불을 지른다. 돌과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타협한 끝에 적절한 곳에 만들어 놓은 물줄기를 제멋대로 돌려놓는다. 거대한 포유류들을 삽시간에 멸종시키고 내가 애써 일궈놓은 종의 다양성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모진 애를 쓴다. 이것을 저들은 '농사'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자기가 지금의 생태적 위치, 그러니까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를 맘대로 파헤치고 수탈하는 지위에 오르기까지 자그마치 세 번이나 중대한 혁신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기원 전 7만 년경의 인지 혁명, 기원 전 1만 년 전의 농업 혁명, 그리고 500년 전의 과학 혁명이 그것이다. 좋다. 나도 세 번의 혁명 가운데 두 가지는 호모사피엔스만이 이룬 일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잘 들어라. 농업 혁명은 너희만 이룬 일도 아니고, 너희가 가장 먼저 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농업 혁명, 중요하다. 농업 덕분에 너희에게 전염병도 생기고, 전문가와 정치 조직, 해양 기술과 전쟁 기술도 생겼으니까 말이다. 그걸 '문명'이라고 한다지? 이게 재레드 다이아몬드라는 호모사피엔스가 그 두꺼운 <총 균 쇠>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묻고 싶다. 농업혁명을 이루고 났더니 살림살이 좀 폈는가? 농업 혁명 이전에 호모사피엔스들은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하면 충분했다.. 삼사일에 한 번만 사냥 나가면 체온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왜 혁명을 했는데, 혁신을 이루었는데 삶은 더 팍팍해졌는지 답답하지 않는가?

호모사피엔스들은 잘 들어라. 지구에서 가장 먼저 농경 생활을 시작한 생명은 너희가 아니다. 이미 5000만 년 전에 개미들이 시작한 일이다. 벌써 기분 상해 할 필요는 없다. 호모사피엔스의 농업은 나쁘고 개미의 농업은 좋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개미는 너희 호모사피엔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

농사라는 단어에는 계급이라는 단어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개미들도 농사꾼이 따로 있다. 그리고 전투병, 보초병, 짐꾼으로 철저하게 분업을 한다. 분업이 얼마나 철저한지 번식마저 분업을 통해 해결한다. 자기 스스로 자식을 낳아 키우기를 포기하고 평생토록 여왕을 보좌하는 일개미의 행동처럼 불가사의한 일도 지구에는 또 없을 것이다. 개미 사회의 자본은 축적해 놓은 식량이고, 이들이 궁극적으로 생산하는 제품은 차세대의 여왕개미와 수개미들이다. 일개미들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타주한 기계 설비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 최초의 농사꾼은 잎꾼개미다.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의 열대 지방 전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자기 몸보다 더 커다란 이파리를 입에 물고 수백 미터의 행렬을 이룬다. 그들이 이파리를 먹는다면 농사꾼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 잎꾼개미들은 이파리로 버섯을 키운다. 지금 지구에서 버섯을 키우는 개미는 200종이 넘는다. 잎꾼개미처럼 나뭇잎으로 버섯을 키우는 종이 있는가 하면 동물의 똥이나 썩은 시체에서 버섯을 키우는 개미도 있다.

농사와 가축은 한 몸이다. 개미가 농사를 짓는데 가축이라고 기르지 않겠는가? 인간이 소와 돼지를 키운 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곳에 정착해 살면서 농사를 지은 다음부터인 것은 분명하다. 개가 첫 번째 가축이기는 한데, 사실 사람이 늑대를 개로 길들였다기보다는 늑대가 자신들을 보살피고 자신들과 놀아줄 상대로 사람을 선택했다고 보는 게 맞다.

개미는 진디를 키운다. 진디가 식물에서 빨아들인 영양분을 받아먹는다. 마치 풀을 먹고 젖을 만든 소에게서 호모사피엔스들이 우유를 받아먹는 것처럼 말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쇠고기와 우유를 얻으려면 그들을 포식자로부터 지켜야 하듯이 개미도 무당벌레나 풀잠자리 같은 사나운 곤충에게서 진디를 보호한다. 진디를 키우는 개미는 식량의 75퍼센트를 진디에게서 빨아먹는 단물로 채운다. 그야말로 낙농 전문 개미인 셈이다.

잎꾼개미 군집이 분가를 할 때, 그러니까 새로운 여왕개미를 내보낼 때 씨버섯 한 줌을 입 속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서 신혼 지참금으로 보내는 것처럼, 진디를 키우는 개미들은 진디 떼를 몰고 다닌다. 그걸 호모사피엔스들은 노마드라고 부른다.

가축을 키우는 개미들은 가축을 들판에 놓아서 키우기도 하고 우리에 가둬서 키우기도 한다. 어떤 개미는 아예 집안에 들여다 놓고 키운다. 호모사피엔스가 키우는 가축들이 초식 포유류이듯이, 개미들이 가축으로 키우는 곤충들도 몸이 연하고 방어 능력이 없는 초식 동물들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늑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늑대가 호모사피엔스를 선택해서 개가 되었듯이, 진디도 개미를 선택했다.

진디는 식물의 즙을 빨아먹을 때 그 안에 지나치게 많은 물을 몸 바깥으로 배설해야 한다. 이때 일부 당분도 빠져나간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까? 주변이 끈저끈적해질 것이다. 냄새도 날 것이고 이 냄새를 맡고 포식자들이 나타나고 곰팡이가 피고 병균이 꼬일 것이다. 진디는 자신들을 위해 청소를 대신 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개미다.

개미들은 호모사피엔스 못지않은 거대한 경제 사회를 구성했다. 당연히 계급이 철저히 나뉘었다. 심지어 노예를 부려먹는 동물이다. 신분 상승은 꿈도 꾸지 못한다. 오로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왕권이 얼마나 강력한지 푸틴이나 김정은 그리고 그 여인과 같은 분들은 견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전쟁을 일으킨다. 대량 학살은 그들 세계에서는 뉴스거리도 아니다.

호모사피엔스가 먹이 사슬의 최정점에 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언어 능력 때문이다. 개미도 대화를 한다. 그들은 음파 같은 물리적인 요소 대신 페로몬이라는 화학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한다. 화학 언어는 매우 효율적이다. 페로몬 1밀리그램으로 지구를 세 바퀴나 돌 만큼 긴 냄새 길을 만들 수 있다.

개미는 여러모로 호모사피엔스들에게 자신을 돌아다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호모사피엔스들은 어지간히도 개미에 대해 잘 모른다. 호모사피엔스의 개체 중에 상당수는 1993년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3부작을 읽고서야 개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화학자들은 개미의 소통 수단 가운데 하나인 페로몬의 세계에 깊게 빠져들었다. 페로몬은 생화학 물질이다.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그 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개미의 세계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지구에 있는 개미는 최소한 1만2000종에 달하며 그들의 몸무게를 모두 합하면 72억5000만 명에 달하는 인류의 무게와 맞먹는다. 세계는 넓고 개미는 많다. 그렇다면 개미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도감에는 몇 종류 나오지도 않으며 특별한 설명도 없다. 기껏해야 개미는 흰개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대신 벌과 같은 목(目)에 속한다는 정도만 실려 있다. 개미에 대한 과학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체가 소설이니 오죽하겠는가!

1992년 10월 31일부터 지구는 합법적으로 자전과 공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의 오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갈릴레이의 후손들에게 사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99년부터 한국 사회에서 개미의 위치가 달라졌다. 개미는 아직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아주 어린 아이들만의 관심 대상에서 지식인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이다.

▲ <개미 제국의 발견>(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이유는 간단하다. <개미 제국의 발견>(최재천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오자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 책의 부제는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 사회 이야기'다. 부제에서 말하는 소설의 작가는 아마도 베르베르일 것이다.

부제는 옳다. 정말이다. 소설보다 재밌는 과학책이다. 이 책은 재밌기만 한 게 아니다. 한국 교양 과학 도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정확히 '과학책'인 것이다. 과학과 대중의 소통에 관심 있는 과학자들은 그때까지 오로지 '과학의 대중화'만을 이야기했다. 어려운 과학을 단지 쉽게 설명하는 데 무진 애를 썼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 책은 '대중의 과학화'를 시도한 첫 번째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과학에 쉽게 접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의 본령으로 대중 끌어올리기를 시도했고 성공했다.

저자 최재천 교수는 현재 국립생태원장으로 일하면서 국립생태원을 단번에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지금 국립생태원에 가면 잎꾼깨미와 베짜기개미를 실제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과학 전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기회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게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

지금은 여섯 번째 대멸종기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이것을 인류세라고 부른다.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은 지구인 내 의지대로 이뤄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가 아니라 호모사피엔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참으로 염치 있는 자세다.

인류세는 인간의 생물량이 너무 많아서 생긴 일이다. 72억5000만 명을 모두 모으면 가로, 세로, 높이 2킬로미터의 상자를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런데 개미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 있다. 그런데 아무도 지금을 개미세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개미는 최소한 1만2000종은 있기 때문이다. 개미는 1만2000개의 생태적 틈새(niche)를 채우면서 생태계의 먹이 그물을 촘촘하게 유지하지만 호모사피엔스는 겨우 한 개의 틈새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보기에 호모사피엔스와 개미는 아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개미에게 좀 배워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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