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남녀 주모자 모조리 ‘난도질’
‘사북사건’을 심층 조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의 결정문에 따르면 1980년 5월 합동수사단이 정선경찰서에서 광부와 부녀자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 외에 악랄한 성고문까지 서슴없이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합수단은 당시 보안사령부 소속 20여 명의 수사관을 중심으로 경찰 조사인력을 지원 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붙잡혀온 광부와 부녀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문과 폭행, 성고문까지 당했다.
‘진실위’는 지난 2006년 8~12월 사이에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억울하게 연행된 뒤 무수한 고초를 겪은 광부와 부녀자는 물론 당시 조사에 참여한 경찰관 등 30여 명에 대한 진술을 확보해 결정문에 수록했다.
당시 합수부 조사관들은 광부들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에 이어 부녀자들에게는 폭행과 함께 성고문도 수시로 자행한 것으로 ‘진실위’는 조사를 통해 밝혔다. 합수단 조사관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성적 가혹행위도 무자비하게 자행했던 것이다.
전선자씨는 1980년 4월 사북사건 당시 사북읍 사북2리 3반에 거주했고 남편은 사북광업소 광부로 근무했다. 사북사건이 마무리된 뒤 5월 10일 정선경찰서에 연행되어 노조지부장 이재기의 집과 사재도구를 파손하고 시위에 적극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합동수사단에 연행당시 그는 임신 4개월의 몸이었다. 1980년 5월 전선자씨는 성고문을 당하고 난 이후 고문후유증으로 35년이 지난 현재까지 (남편과)잠자리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진술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후유증이 지속돼 지금도 불안과 대인기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저녁 무렵께 검정 지프차가 집 앞에 선 뒤 사복을 입은 남자 서너명이 차에 태워 정선경찰서로 데려갔다. 정선경찰서에서는 베니어판으로 칸막이 한 곳에 한 사람씩 넣은 기억이 난다.
당시 고문과 폭행 후유증으로 기억력을 많이 상실했다. 그곳에서 각목으로 머리, 어깨, 온 몸을 때리고 쓰러지면 군화발로 짓밟고 그랬다.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맞았다.
한 1.5미터 정도 되는 각목으로 전신을 두드려 맞았다. 엎드려 놓고, 또 세워놓고 때렸다. 지금도 허리와 다리가 아픈게 그 후유증 때문이다. 여자들은 상의를 모두 벗겨 젓가슴을 (손으로)쥐어 뜯었다.
그러다가 까무라쳐 기억을 못했다. 정신이 들어 깨어나니 바지 허리띠가 풀어져 있었다. 각목으로 조사관이 ‘쑤셔라’, ‘째라’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각목으로 젓가슴과 하체의 은밀한 그곳을 툭툭 쳤다.
여자들은 그놈들이 팬티를 벗겨 놓고 왼쪽, 오른쪽 하며 희롱을 했다. 아랫도리의 털을 손으로 뽑기도 했다. 원주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8개월 만에 출산을 했다. 임신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워낙 많이 맞아서인지 애가 크지를 못해서 출산 사흘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눈물을 흘리며 마을 뒷산에 묻었다.”
이명득씨는 1980년 4월 사북사건 당시 동원탄좌 사택 부녀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0년 5월 8일 합동수사단에 연행되어 광부들을 방송으로 선동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0년 5월 8일 오후 3시께 경찰관인지 군인인지 모르겠는데 3명이 지프를 타고 나를 찾아왔다. 집에서 나를 끌어낸 그들은 고한지서로 데려갔다. 고한지서에 들어서자 곧장 발길질을 하는데 맞아 죽는 줄 알았다.
그런 다음 열차편으로 정선경찰서로 데려갔다. 정선경찰서에 마련된 계엄사 합수부에 도착하자마자 경찰관인지 군인인지 모르는 사람이 뺨을 10여 차례나 매우 세게 후려 갈겼다. 그런 다음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이미 정선경찰서 유치장에는 여자들이 50~60명 가량 와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머리가 터진 사람, 이빨이 불진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당시 경찰서에서 15일 가량 있으면서 매일 5, 6회 가량 불려나가서 조사를 받았다.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무릎을 꿇게 하고 무릎 위에 각목을 끼우고 두 사람이 마구 밟아 무릎 연골 양쪽이 모두 터지는 바람에 지금도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있다.
또 조사를 하면서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가슴을 우왁스럽게 마구 잡아 흔들고 제끼고 쥐어 뜯고 했다. 특히 아랫도리 음부 털을 손으로 모두 뽑는 바람에 털이 모두 뽑혔다. 그 당시 나의 나이는 41세였다.“(이명득씨 진술)
사북광업소 새마을사택에 거주하던 노금옥씨는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혐의와 시위 주동 혐의로 구속되었다. 남편은 사북광업소의 성실한 광부였다.
“(사북사건 핵심 주모자)이원갑씨가 잡혀간 다음날 새벽 2시께 군인넷이 와서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멱살을 잡아 한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또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다른 사람은 몸둥이로 때리고, 군화발로 다리를 때렸다.
순간 지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군인 여러 명이 여자 한 명을 무자비하게 때려 버스에 실었다. 그 버스를 타고 정선경찰서에 도착했다. 나중에 도착한 곳이 정선경찰서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있던 방은 시멘트 바닥으로 된 두 평 정도 크기 방이었다. 입구는 여닫이 문이고 위에 감시할 수 있는 유리창이 조그맣게 있었다. 긴 몽둥이로 마구 때리고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고춧가루 물을 부었다.
몽둥이를 무릎 뒤에 넣고 꿇어 앉혀 놓고 군화발로 허벅지를 밟고 문지르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나중에는 팬티가 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또 가슴을 비틀고 젖꼭지를 잡고 비틀어 살갗이 벗겨질 정도가 되었다.
조사관들은 나의 아랫도리 중요한 부위 털을 모두 뽑고 몸을 마구 만지고 그랬다. 또 몽둥이로 가슴과 아랫도리 중요한 부위를 때리고 찌르고 그랬다.
몸빼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를 벗기고는 털을 뽑고 성기 모양이 어떻다느니 별 말을 다했다. 심지어 이런 년들은 때려 죽여도 좋다고 했다. 주로 이재기 지부장 부인을 때렸느냐 누구랑 같이 갔느냐, 이런 걸 물었다.
나중에는 무자비한 폭행에 못이겨 이웃에 사는 신정자를 거짓으로 말했다. 조사관들은 나를 (지부장 부인 린치사건)주동자로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끌려올 때 여자들은 홑치마, 브라자 바람으로 끌려온 이도 있는데 그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젊은 군인과 경찰관들이 자기들 멋대로 만질데 안 만질데 가리지 않고 주무르고 만지고했다. 저 놈들도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황당했다.”
정선경찰서 조사실에서 진행된 조사는 조사가 아니라 ‘인간도살장’ 같은 풍경이 밤낮 없이 진행됐다.
“그날 밤인가 그 다음날인가 김성환 형사계장이 저를 정성경찰서에 데려갔습니다. 가니까 경찰관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복 입은 사람이 저를 인계해서는 ‘민기복 맞어’ 하길래, ‘예’ 하니까, ‘또 과부 하나 생겼구먼’ 하고는 ‘여기 어디인지 아냐’해서 ‘모릅니다’하니까, ‘여기는 너같은 놈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르는 합수부’라고 하며 겁을 잔뜩주며 욕을 하더니 베니아판으로 칸 막이를 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고무호스로 등과 가슴을 사정 없이 때려 혼을 빼 놓았다. 그런다음 뒤로 수갑을 채우고 꿇어 앉혀놓고 무릎에 각목을 놓은 상태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 양쪽을 밟았다. 그들은 모두 사복차림 이었고 이들 세명은 모두 체구가 거구였다.
그 다음에는 한 사람이 얼굴을 뒤로 젖혀놓고 수건을 덮은 상태에서 주전자로 미지근한 고춧가루물을 부었다. 눈으로 코로 물이 막 들어갔다. 그리고는 발과 발을 손과 손을 서로 묶은 채 나무를 끼어서 양쪽에서 두 사람이 들고는 발로 차고 고춧가루 물을 부었다. 자기들끼지 통닭구이라고 했다.
이런 가혹행위가 하루에 한 두 번, 적을 때는 한 번, 많을 때는 아침 저녁으로 두 번했다. 처음 며칠 동안에는 별다른 말 없이 무작정 이처럼 고문을 하더니 며칠 뒤에는 이덕수 순경을 네가 죽이지 않았느냐, 죽인 사람을 다 대라며 고문했다. 나한테 추궁한 내용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가락을 갖고 그들이 작성한 조서에 손도장을 찍었다.“(민기복씨 증언)
“1980년 5월 9일 오전 2시께 지상산 사택에서 5, 6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됐다. 지프차를 타고 고한지서에 도착했을 때 박대성씨와 아줌마 3, 4명을 포함한 광부 6, 7명을 목격했다. 고한지서에서 경찰관들이 구타했고 다시 봉고차 같은 것을 타고 정선경찰서로 이동했다.
정선셩찰서에서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사진을 찍었다. 조사실에서 온갖 고문을 다 당했다. 물고문, 무릎 밟기, 각목 등으로 온 몰을 구타했다. 안재, 이완형의 친형 이태형 씨가 맞는 것을 목격했다. 이태형은 복부를 맞아 허리를 펴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태형은 사북광업소 종업원도 아닌데 동생집에 모처럼 놀러 왔다가 연행되어 전과자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구타당했다.
심지어 당시 사북지서에서 밥을 해주는 50대 아줌마도 연행되었다. 조사 받는 도중에 젊은 경찰이 고춧가루를 양동이에 담아 가는 것을 목격했다. 조사내용은 ‘누구한테 지령을 받았느냐’며 간첩죄를 덮어 씌우는 것이었다.“(정인교씨 진술)
“사북광업소에서 작업복 입은 채로 끌려갔기 때문에 군복으로 갈아 입으라고 했다. 그 때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바로 유치장에 갖혔다. 유치장에서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덕수 순경이 죽었으니까 경찰들이 보복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날은 밤에 잠도 재우지 않고 폭행하고 괴롭혔다. 다음날 부터는 조사도 없이 무조건 폭행했다.
각목, 곤봉으로 어깨, 배, 머리 등 닥치는 대로 때렸다. 며칠 후에는 1미터 정도 길이의 각목으로 이마를 정면으로 맞아 피가 터졌다. 흘러내린 피로 얼굴과 가슴이 다 젖었다. 또 두 팔을 뒤로 묶고 다리도 묶어 놓고 눕혀 머리를 뒤로 젖히게 하고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는 고춧가루 탄 물을 입고 코에 부었다.
그러니까 숨을 내쉴 수는 있는데 들이마시지는 못하니까 고춧가루 물을 그대로 들이키게 되었다. 이외에도 군화발로 오른쪽 가슴을 채여 뼈가 부서지기도 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헐렁했던 군복바지가 꽉 조이도록 붓고 온 몸이 시커먼 피멍이 들었다.“ (최돈혁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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