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와 주체성
아침마다 사무실을 들어설 때면 문 앞에 흩어져 있는 전단지를 줍는다. 현란한 색상으로 '무한대출' '신용불량자 대출가능' 같은 문구가 박힌 명함 크기의 전단이다. 가끔은 출근길에 전단지 뿌리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토바이를 한 손으로 천천히 몰면서 다른 한 손으로 속사포처럼 몇 장의 전단을 문 앞으로 날려 보낸다.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 솜씨다. 빚 권하는 사회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거리를 어지럽히는 저 사람도 공동체에 기여하는 몫이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 누군가는 이 전단지 덕분에 긴급대출을 받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할 것이다. 한두 달 뒤에는 더 큰불이 발등에 떨어질지라도 그건 또 그때 가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리대금업자들의 희생양을 유인하는 덫을 뿌리는 저 사람도 자신이 아침마다 남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 의식적으로 아침마다 되풀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사고(思考)하지 않는 사람의 표정을 읽게 된다. 신용불량자들의 신용을 늘리는 일은 그들의 신용을 더 불량하게 만드는 일이자 종국에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 되기에 십상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하는 힘이 없으면 고리대금업자든 그 하수인이든 결국 자기 욕망의 하수인으로 살 뿐이다.
삶의 주체로 선다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고, 그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예전 교장들이 흔히 하는 일은 학교 복도 바닥에 눌어붙은 껌을 떼는 일이었다(좋은 교장은 스스로 껌딱지를 떼고 그렇지 않은 교장은 누군가에게 일일이 시키지만…). 교장 눈에 유독 껌딱지가 잘 보이는 까닭은 그가 학교의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복도가 자신의 얼굴처럼 보이면 시커먼 껌딱지를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다.
청소를 할 때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주인인 듯 애정을 갖고 한다면 주인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다. 그렇게 몸에 밴 의식은 자신의 삶에서 주체의식으로 자리를 잡는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 공간을 위해 청소를 하는 사람은 보여주기 식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일이 큰일에서도 반복되는 법이다.
청소와 청결
합기도 사범인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도장 '개풍관'을 짓게 된 계기 중 하나가 공공시설인 체육관 도장이 청결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바닥이 청결하지 않으면, 신체가 미묘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러운 바닥 위를 맨발로 걸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바닥과의 접촉면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발바닥을 오므리고 걷게 되고, 악취가 나면 콧구멍을 수축시키듯이, 오감의 감도가 떨어지는 환경에서는 무도 수련을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절간이나 예배당을 정갈하게 하는 것도 우리 몸과 혼의 감도를 더 민감하게 하기 위함이다. 기도하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목욕재계를 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몸을 깨끗이 하고 공간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변과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이다. '청결 강박'은 스스로도 힘들게 하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지나치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듯이 무엇을 위한 청결함인지를 놓쳐서는 곤란하다. 자연은 언뜻 보면 청결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맑은 계곡물 바닥에는 낙엽이 쌓여 썩고 있고 죽은 물고기와 벌레들도 있다. 청정한 숲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패 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자연은 수많은 세균과 곰팡이 덕분에 청정함이 유지된다. 절대적인 청결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균실은 청결한 공간이 아니라, 위생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반자연적인 공간이다. 청결과 위생은 보통 하나의 개념처럼 쓰이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서로 다른 개념이다. 깨끗이 씻은 채소에도 세균이 있을 수 있듯이, 청결하지만 위생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청결이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상태라면 위생은 오감의 범위를 넘어선 개념이다.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박증은 우리 몸에 위험할 수도 있다. 위생관념이 지나치면, 오히려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위생 관념이 별로 없는 지역의 사람들은 대장균이 득실거리는 물을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다. 위생에 철저한 문명사회는 전염병의 위험이 줄긴 하지만, 알레르기를 비롯한 각종 면역성 질환이 늘어난다. 면역계가 활성화되려면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드기 때문에 질병이 생길 수도 있지만, 진드기를 박멸하는 것이 건강에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면역계를 적절히 자극할 수 있는 정도의 진드기와 세균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들이다.
자연계는 적절함의 지혜를 갖고 있다. 적절한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적절함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또 상황마다 달라서 애매하긴 하지만, 그 애매함이야말로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매뉴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서 지혜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적당히'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정반대 개념으로도 쓰이듯이, 적절함과 적당함은 애매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 모호한 기준과 정도를 그때그때 잘 가늠하는 것이 지혜다. 청결함이나 정리정돈 또한 그 기준이 제각각이고,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그때그때 지혜롭게 대처할 줄 아는 유연성은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정리 정돈의 절대기준은 없다. 정돈은 잘해도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리는 나름 잘하지만 보기 좋게 정돈하는 데는 서툰 사람도 있다. 정리가 필요한 상황인지 정돈이 필요한 상황인지 또 그 기준을 무엇으로 할지, 어떤 수준으로 할지 판단해서 적절히 처신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미묘한 신호를 '적당히' 대충 알아듣고 행동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그때 적절히 처신하는 유연성을 기르는 데 청소가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살림을 한다는 것
우리네 삶 터는 언제나 어질러지기 마련이고 청소는 그 터전에서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이든 일터든 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 모두가 나눠서 할 수도 있지만 주로 맡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많다. 파출부나 청소용역업체에 맡기면, 단지 공간이 좀 깨끗해질 뿐 공동체성을 살리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소란 단순히 기능적인 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살림'이란 열심히 해도 그다지 표가 나지 않으면서 정작 하지 않으면 눈에 띄게 표가 난다. 여기저기 물건이 어질러지고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자리를 잡는다. 해도 부질없는 일이니 아예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살림을 잘 사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으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의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시간에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능력 있고 잘 사는 길인 듯 여기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이지만, 살림의 외주화는 관계의 빈곤을 낳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아빠가 아이와 서먹한 것은 살림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뭐 먹을까?" "이 옷 어때?"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는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챙기고 잠자리를 살피는 일은 몸을 통해 서로 만나는 일이다. 손길과 눈길에서 애정과 관심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폐가처럼 변한다. 사람의 온기와 손길이 닿지 않으면 집도 생명력을 잃는다. 돌봄의 손길은 무생물조차도 생기를 띠게 한다. 살림의 힘이다. 공간을 돌보는 일은 쓸고 닦는 일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공간에 대한 애정과 존중의 마음이 공간을 채울 때 거기에는 어떤 에너지 장(場)이 형성된다. 그 기운이 사물의 수명까지 좌우하는 건지도 모른다. 눈길과 손길은 '살림'의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매개체다.
청소를 마지못해 하거나 강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때를 즐기듯이 하면 청소가 색다른 경험이 되기도 한다. 흙 마당을 빗자루로 쓰는 일은 일종의 의례이자 예술 행위일 수 있다. 정갈하게 비질한 마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일본 교토의 '카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은 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마당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쓰레기 하나 없는 마당을 다시 쓸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마당의 기운을 느껴본 사람은 청소가 단순히 뭔가를 쓸고 닦고 치우는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 부질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일을 하고 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토대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먹고 싸고 또 먹고 싸고…. 무한한 우주에서 먼지처럼 작디작은 존재인 우리네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원의 시간 속에서 한순간을 사는 나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문득문득 스며드는 삶의 무의미함 속에서 이 순간의 유일무이함에 눈을 뜨게 되면 눈빛이 달라진다. 발아래 풀 한 포기도 놀라운 기적처럼 보인다.
예로부터 도제나 수행자로 입문하면, 가장 먼저 하게 하는 일이 청소다. 초짜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본질을 놓친 것이다. 날마다 반복하는 청소는 우리가 몸담은 공간과 친숙해지는 가장 빠른 길이자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 공간의 기운을 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 한 공간을 날마다 청소하다 보면 미묘한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미묘한 변화에 민감해지는 것이 장인이나 수행자가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다.
서둘러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오로지 그 일밖에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몰입해서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경험을 하기에 청소만큼 좋은 일도 드물다. 끝내고 돌아서면 다시 먼지가 쌓이니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부질없음 속에 삶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애써 굴려 올린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또다시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존재들이다. 행위의 의미는 그 행위 속에 있지 않다. 시시포스는 실패를 극복하고자 다시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또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바로 그 존재 양태 속에 부질없는 행위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날마다 누군가를 돌보고 공간을 돌보는 일은 애정 없이는 힘든 일이다. 돌보는 과정에서 애정이 생겨나기도 하고 더 깊어지기도 한다. 돌봄에는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이 늘 함께한다. 어느 시인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유치환 作 '그리움' 중)라고 사랑의 아픔을 노래했지만, 끝없이 바위를 어루만지는 파도처럼 무심하게 너울지는 그 행위 속에 사랑은 정녕 사랑이 되고 우리네 삶은 꽃이 핀다. 사랑, 그 어찌할 수 없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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