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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 운영하던 목사가 10살 소녀 살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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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 운영하던 목사가 10살 소녀 살해범?

[성현석의 토이 스토리] 만화 가게 잔혹사

10살 소녀가 강원도 춘천 논둑길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벌거벗은 몸,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소녀는 인근 파출소장의 딸이었어요.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때는 1972년 9월 29일.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지시했습니다.

"열흘 안에 범인을 잡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관계자 전원을 인사 조치하겠소."

'경찰 가족'이 범죄 피해, '유신' 대통령과 '돌격' 장관의 조바심

당시 내무부 장관이 김현옥입니다. 공병 장교 출신인 그는 5.16 쿠데타 이후 행정가가 됩니다. '불도저' 별명의 원조 격인데요. '돌격'이라고 적힌 헬멧을 쓰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가 났죠. 그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이듬해 내무부 장관이 됐어요. 사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더 무지막지하게 '돌격'해야 했죠.

경찰 내부 분위기도 삼엄했죠. '경찰 가족'이 범죄 피해자가 됐습니다. 경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무조건 범인을 잡아야 했어요. 일단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습니다. 대부분 알리바이가 명확했어요. 열흘, 순식간이죠. 경찰은 초조했습니다.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죠. 유신 선포를 앞둔 때였거든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죠. 형식적으로나마 갖춰져 있던 민주적 장치들을 죄다 정지시키는 내용입니다. 그 전에 공권력의 위신을 세워야 했습니다. 마침 발생한 흉악 범죄, 범인을 꼭 잡아야 했죠.

'마감' 앞두고 범인 '창조'한 경찰

▲ 1972년 10월 10일자 <동아일보>. 당시 <동아>는 석간 신문이었다. 그래서 이날 오전 발표가 기사화 됐다. ⓒ동아일보
범인 체포 마감일인 10월 10일이 다가옵니다. 결국 경찰은 범인을 '창조'하기로 했습니다. 피해자가 만화 가게에 자주 들렀다는 점을 단서로 삼았어요.

'왕국 만화방' 주인 정원섭 씨를 범인으로 찍었습니다. 경찰은 이에 앞서 정 씨를 조사했어요. 혐의점을 찾지 못해서 풀어줬죠. 그게 10월 4일입니다.

하지만 '만화 가게'에 주목하기로 하면서 방침을 바꿨습니다. 그 뒤론 일사천리였죠.

경찰은 정 씨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습니다. 거기서 나온 연필이 피해 현장에서 발견된 걸로 둔갑했습니다. 소녀의 시신 근처에 연필이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거든요.

"이거, 네 연필 맞지?"
"네."

이런 문답이 정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증거가 됐죠. 그밖에도 다양한 증거가 창조됐습니다. '왕국 만화방' 여성 종업원은 정 씨가 예전에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경찰이 협박한 결과입니다.

풀려났다 다시 잡혀 온 정 씨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게 1972년 10월 10일 새벽이죠. 그리고 이날 오전 언론에 공개됐어요.

대통령이 지목한 마감일을 지킨 겁니다. 담당 경찰관들은 포상을 받았습니다.

"모여라 동무야" 현수막 때문에 하루 종일 구타

그런데 경찰은 왜 하필 정 씨를 골랐을까요? 피해자가 사는 곳 근처에는 다른 만화 가게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대목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정 씨의 이력이 고려됐다는 해석이 주로 나옵니다. 정 씨는 목사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목사가 다른 경제 활동을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것도 하필 만화 가게입니다.


1972년 초 <경향신문> 기사 제목입니다.

"'만화 안 보겠다' 꼬마들 결의" "淨化(정화) 시급한 不良漫畵(불량 만화)…."


당시 한 초등학생(당시 표현은 국민학생)이 만화 주인공 흉내를 낸다며 목을 매 숨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매체가 달려들어 만화를 공격했습니다. 만화 가게는 청소년 타락의 온상으로 지목됐죠. 굳이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닙니다. 1970년대 기사를 살펴보면, 만화를 비난하는 내용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성직자인 목사가 만화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경찰이 보기엔 뭔가 수상쩍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정 씨는 예전에도 경찰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정 씨는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 전도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때 거리에 현수막을 내걸었는데요.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고 적었죠. '동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습니다. 북한에서 자주 쓰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가 하루 종일 맞았습니다. 이후 정 씨는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을 전전합니다. 아픔도 겪었죠. 아들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옵니다.

'자비량 목회''신자 헌금으로 먹고살기 싫어서'


고향에서 만화 가게를 연 건, 나름의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교(한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장준하…. 기라성 같은 민중 신학자들이 가르치고 배운 곳이죠. 정 씨는 특히 장공 김재준 목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이 지닌 위험을 깨우친 거죠. 여느 목사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습니다.

정 씨가 꿈꾼 건 '자비량 목회'였어요. 자기가 먹을 음식은 스스로 준비한다는 뜻인데요. 교회는 내가 가진 걸 남과 나누는 곳이 돼야 합니다. 목사가 헌금으로 먹고살면서, 신자들에게 헌금 더 내라고 설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봤어요. 그러니까 목사 역시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본 거죠. 취업을 할 처지는 아니었으므로, 자영업을 했어요.

'행정부의 시녀'였던 유신 사법부

문제는, 정 씨의 이런 소신이 경찰에게 너무 낯설었다는 겁니다. 통념과 규격에서 벗어나면,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 받던 시절입니다.

정 씨의 재판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형이 확정됐습니다. 신자들에게 신세 지기가 민망했던 목사는, 한순간에 아동 성폭행 살해범이 됐습니다.

유신 선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은 판사 인사권을 가져갔습니다. 판사 인사를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가 하는 거죠. '삼권 분립' 원칙이 깨진 겁니다. 대통령이 직접 독촉해서 잡은 범인에 대한 재판입니다. 판사들 역시 수사 결과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국과수 "범인 혈액형은 A형"B형인 목사를 왜 잡아 가뒀나


정 씨는 15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세 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살기로 마음먹은 건, 스승 김재준 목사 때문입니다. 김 목사는 정 씨가 무죄라고 믿었습니다. 정 씨가 교도소에서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들은 김 목사는 면회 신청을 했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말라. 죽으면 진짜 범죄자가 된다. 억울하면 살아남아라. 그래서 그들(고문한 경찰)을 회개시켜야 한다."

김재준 목사는 1987년 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해 겨울, 정 씨가 세상에 나왔죠.

정 씨는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지난 2011년 10월 최종 무죄 확정 판결을 했습니다. 사건 발생 39년 만입니다. 재판을 다시 하면서 살펴본 수사 기록은 완전히 엉터리였습니다. 사건 직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범행 현장에서 범인의 핏자국을 발견했습니다. 혈액형은 A형이었고, 국과수 기록에도 남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언론 역시 "범인 혈액형은 A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정 씨는 혈액형이 B형입니다.

유신 체제의 사법부와 수사 기관은 국과수 법의학자들의 분석 결과를 깡그리 무시했던 거죠.

'명예로운 용서'를 위해

▲ 정원섭 씨.ⓒ한신대학교
정 씨는 재심을 청구한 이유에 대해 "나를 고문한 사람들을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라고 밝혔습니다. 누명을 벗었으니 더 이상 그들을 원망하지 않겠다고도 했죠.

하지만 당시 정 씨를 고문한 경찰, 기소한 검사, 엉터리 재판을 한 판사 가운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를 해야 용서도 가능합니다. 사과를 한다는 건, 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죄가 있어야, 그걸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용서란, 형용 모순입니다. "명예로운 용서"라는 정 씨의 희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 씨는 손해배상금도 못 받게 됐습니다. 무죄가 확정된 뒤, 그는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1심 법원은 국가가 26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죠. 하지만 2심에서 뒤집어졌습니다.

'소멸 시효'가 지났다는 겁니다. 형사 보상금 지급이 확정되고 나서, 6개월 안에 손해 배상 소송을 해야 합니다.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 시효' 규정이 2심 재판을 앞두고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정 씨가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한 날짜는 6개월에서 10일이 더 지난 시점이었던 거죠. 형편이 어려운 정 씨 입장에선 형사 보상금을 먼저 받아야 손해 배상 소송도 할 수 있습니다. 소송을 하려면 돈이 드니까요. 그런데 검찰이 형사 보상금을 늦게 줬던 탓에 소송 제기도 늦어졌다는 게 정 씨 측 입장입니다. '소멸 시효'를 넘긴 건, 검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정 씨는 다시 분노했습니다. 그는 지난 4월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972년 당시 그를 고문했던 경찰, 담당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입니다. 소송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식당 하는 소설가, 만화 가게 한 목사 사연을 쓰다

▲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새움
2013년 개봉한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정 씨의 사연을 참조했습니다. 경찰청장의 딸을 성폭행 및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주인공이 나오죠. 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정 씨의 사연과 다릅니다.

정 씨의 사연을 생생하게 담은 책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새움 펴냄)라는 제목입니다. 지난 6월에 나왔고요. 소설가 유채림 씨가 썼습니다. 형식은 소설입니다만, 실화에 바탕 했습니다. 정 씨 역시 지난 7월 한신민주동문회가 주최한 북콘서트에 참가해서 책 내용이 자신의 체험과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쿠바는 정 씨의 어린 시절 별명입니다. 일본어로 어금니라는 뜻인데요. 정 씨의 아버지가 치과병원을 운영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라고 해요. 넥타이를 세 번 맸다는 건, 세 차례 목을 매서 자살 시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유채림 씨 역시 국가 폭력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서울 홍익대학교 근처 식당 두리반 농성의 주인공이죠. 지난 2010년, 이 일대에 대한 재개발이 진행됐죠. GS건설이 주도했는데요. 경찰과 공무원은 건설업체 편이었습니다. 두리반 주인인 유채림 씨는 재개발에 맞서 싸웠고요. 그 과정에서 이른바 '공권력'의 실체를 생생히 지켜봤죠. 531일 간 진행된 두리반 농성은, 결국 유 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근처에서 활동하던 젊은 예술인이 적극적으로 연대한 결과였죠. 이 과정에서 유 씨는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를 썼다고 해요.

식당 주인이면서 소설가였던 유 씨에게, 만화 가게 주인이자 목사였던 정 씨의 사연은 확실히 각별했겠죠. 또 부당한 공권력을 경험했다는 점도 닮았고요.

정원섭, 백남기, 그리고 박정희, 박근혜44년 터울에도 달라진 게 없다

그리고 지금, 농민이면서 사회운동가였던 백남기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찰의 폭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찰, 그리고 정부는 거짓말을 강요합니다. '백 씨의 사망은 병이 아닌 외부 원인 탓'이라는 법의학 전문가의 발표마저 무시합니다.

44년 전, '왕국만화방'을 운영하던 정원섭 목사가 누명을 쓰던 장면과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요. 1972년 당시에도, 법의학 전문가들의 기록은 무시당했습니다. 정원섭 씨 주변 사람들은 거짓말을 강요당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했던 1972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심판을 이야기한 2016년. 44년 터울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검찰, 공무원과 전문가 집단의 인권 의식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권력'은 거짓말입니다. 공공의 권력이라니요. 그런 것, 없습니다. 사적인 권력, 그들만의 폐쇄회로 안에서만 작동하는 권력이 있을 뿐입니다.

덧붙임

지난 회에서 웹 소설을 다뤘습니다. 요즘 급팽창하는 시장인데요. 배우 박보검 씨가 출연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역시 원작은 웹 소설입니다. 네이버에 이 작품을 연재했던 윤이수 씨는 2년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한 달 소득이 남들 연봉 정도 된다고 밝혔어요. 지금은 더 많겠죠. 이런 작가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해 웹 소설 시장 규모를 약 400억 원대로 추산했고, 올해는 더 커질 것이라고 봤는데요. 소수 작가들에게 소득이 집중된 상황을 생각하면, '억대 연 수입을 올리는 작가가 수십 명'이라는 웹 소설 플랫폼 업체의 홍보 역시 과장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도무지 책을 읽지 않는 시대, 그래서 전업 작가가 살아남기 힘든 세상입니다. 소설가가 식당을 하는 모습이 겹쳐 보이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글을 읽고 씁니다. 심지어 돈도 내고요. 웹 소설의 성공이 입증했죠. '책의 퇴조와 글의 흥행',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힌트를 만화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1970~8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만화 책, 그리고 만화 가게 시장은 이후 서서히 쪼그라듭니다. 그런데 만화 자체가 외면당한 건 아니었어요. 2000년대 들어선 웹 만화(웹툰) 시장이 폭발했죠. "한 달 소득이 남들 연봉 정도 되는" 작가들은 웹툰 쪽에서 먼저 나왔죠. 그리고 2016년 현재, 서울시내 이른바 '핫 플레이스'에는 만화 가게들이 속속 들어섭니다. 만화책이 되살아난 거죠. 웹툰 덕분에 만화 독자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그러니까 온라인으로 볼 수 없는 만화까지 보려는 독자도 생겼지요.

어쩌면 소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화책→웹 만화→만화책' 경로에서 만화의 자리에 소설을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겁니다. '소설책→웹 소설→소설책' 경로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새로 문을 연 만화 가게 주인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대부분 고개를 젓더군요. 이런 의견입니다.

"만화와 소설은 다르지요." "웹툰 독자는 만화책에도 흥미를 보입니다. 하지만 웹 소설 독자가 서점에서 파는 소설에 관심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아요. 웹 소설 독자는 영원히 온라인에 머물지 않을까요."

앞서 제가 언급한 힌트는 더 열심히 취재해야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었는데요. 새로 개업한 만화 가게 주인들의 이전 직업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거였어요. 대기업 회사원, 인디 뮤지션, 학원장 등.

요즘이라면, 만화 가게를 운영하는 성직자가 있다고 해도, 편견에는 덜 시달릴 것 같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정원섭 씨의 사연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습니다.

한편으론 아쉬웠습니다. 지난 44년, 우리가 이뤄낸 변화가 딱 요 만큼인 걸까요. 그 시기, 숱한 목숨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대를 위해 희생됐습니다. 그렇게 내딛은 걸음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자리, 정 씨를 포함한 국가 폭력 희생자들에게 진 빚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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