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수습에 공권력 ‘불법 전횡’
‘사북사건’이 사건 발발 4일만에 조기 수습된 것은 현장을 지킨 김성배 도지사의 공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광부대표들과 유내형 도경국장이 사북사건 관련자의 형사처벌을 최대한 선처하겠다는 약속을 계엄사가 외면하면서 또 한 번 광부들은 기만당하고 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는 ‘사북사건’ 발발이후 경찰, 계엄사 등에서 주동자 색출과 처벌을 위한 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었음을 관련자 진술과 자료를 통해 밝혀냈다.
당시 ‘사북사건’ 관련자들의 연행부터 고문, 폭행, 수사, 재판 등을 주도한 1군계엄사령부 지휘 하에 군, 검, 경으로 구성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내용들은 불법이 난무한 상황이었다고 ‘진실위’는 밝히고 있다.
‘진실위’는 사북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80년 5월 당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이 차려진 정선경찰서에 영장도 없이 강압적으로 연행된 대상자를 중심으로 참고인까지 90명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또 ‘광부난동사건 주동자 명단’에 기록된 광부와 주민 149명도 조사대상에 포함시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아울러 ‘진실위’는 원주 101헌병대에 근무한 사병 85명은 물론 ‘사북사건’이 발생한 정선군 사북읍 일대에서 거주했던 주민들을 상대로 현지조사도 펼쳤다.
특히 ‘진실위’는 조사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사북사건’ 1, 2, 3심 판결문, 제1군 계엄사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사건송치서(1980.5.)등의 방대한 자료도 참고했다.
이어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동원탄좌 집단 농성에 따른 불순동향 내사지시’, ‘사북광부난동사건 관련자 명단’, ‘사북광업소 소요사건 수사상황 보고’, ‘사북난동 관련자 추가’, ‘사북사태 난동자 동향보고’, ‘사북사태 분석보고’자료도 조사에 포함시켰다.
이밖에 ‘진실위’는 국군기무사령부 보존자료인 ‘동원탄좌 광부난동실태’등 12건의 문서를 확보해 조사했고 국방부 보존자료인 ‘육군본부, 계엄사’ 관련자료(1982년), 1군사령부 부대사(1981년), ‘육군고등검찰부 재판기록폐기색인부’등을 조사했다.
‘진실위’는 또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의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사북사태 분석보고서’ 등 4건의 사북사건 현지보고서도 참고했다.
또 ‘진실위’는 광주광역시 5.18자료 편찬위원회의 ‘5.18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정선군의 ‘정선군석탄산업사’, ‘정선군지’, 1980년 4월과 5월의 중요 일간지 사북관련 기사와 관련 출판물 등을 포함시켰다.
사실상 ‘진실위’의 ‘사북사건’ 조사내용은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채도 조사관은 “진실위에서 사북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조사할 당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우선 진실규명 조사의 근거와 목적이 진실위의 설치규정에 맞아야 했다.
사북사건은 발생원인과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의혹사건으로 인해 사북사건의 진실이 왜곡되고 신청인들이 폭도로 매도되어 사회적 고통을 받아 왔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했다.
또 1군 계엄사가 군검경으로 구성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을 정선경찰서에 설치해 다수의 광부와 주민들을 체포 구금하여 물고문, 각목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의혹사항에 관한 조사는 진실위의 활동목적에 부합되고 진실규명의 조사범위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고문 후유증 및 사후 피해사실 등에 관한 조사를 통해 인권침해 사실규명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타 사북사건 조사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 행사의 사례와 그로 인한 피해사실도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사북사건’에 대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의 주모자 검거와 수사과정에 불법과 탈법이 난무했음을 밝혀냈다.
진실위 자료에 따르면 강원도경과 계엄사 합동수사단, 정선경찰서 등에서 주동자 명단을 나름대로 파악해 검거를 준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도경은 1980년 4월 22일 오후 2시25분께 정선경찰서에서 보낸 공문에서 사북사건에 대한 첫 내사지시를 내렸다. 강원도경은 공문에서 노조원 가운데 신원 특이자와 주동자에 대한 대공상 신원특이 유무조사 등을 지시했다.
김성한(당시 정선경찰서 형사계장)은 사북사건 주모자에 대한 내사에 대해 “4월 24일 합의 이전부터 계속 진행했다”며 “주민 협조도 받고 현장에서 찍은 주동자 사진 자료 등을 놓고 내사를 했다”고 말했다.
한편 1980년 34월 24일 “이번 사태로 광부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는 강원도경 국장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4월 25일 강원도경은 주모자 색출에 나서, 경찰관 폭행사건과 방화, 파괴 등의 주동인물 명단을 파악하고 소재를 추적하는 한편, 현지 경찰관의 비위 사실에 대해서도 조사에 나섰다. 언론에는 4월 27일 정선경찰서에 현지수사반이 설치된 것으로 보도했다.》
‘진실위’의 광범위한 조사결과, 내사결과를 바탕으로 현지수사반은 ‘주동자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주동자 명단은 경찰서와 중앙정보부 등이 주동자와 선동자, 행동대원 등으로 분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강원도경 작성 ‘사북광업소 소요사건 관련자 신원파악 상황보고’ 문건에는 사북사건 핵심인물로 김인욱 등 총 119명(1980년 4월 29일. 주동자 11명, 선동자 21명, 행동대원 87명)을 파악했다.
또 국가기록원 사북관련 보존문서 중 경찰기록 ‘사북 광부난동사건 관련자 명단(중앙정보부 강원지부인 동해물산 파악)에는 총 130명을 주모자(김인옥 외 20명), 선동자(구해금 외 36명), 극렬 행동대원(김용태 외 47명), 비조합원(김혁각 외 13명)등 으로 분류해 놓았다.
동해물산 문건에는 성명, 주민번호, 호주, 본적과 주소, 행동내용(주모자, 시설파괴, 지서장 구타 등 구체적인 혐의), 특이내용(형사전과, 부역 관리)이 인명별로 적시되어 있다.
이어 1980년 6월 17일 강원도경 정보2과 작성(기안 경위 최인철)문건 ‘사북난동사건 학력분석상황보고’에는 총 149명의 관련자 명단을 기재하고 있다.
사북사건 주모자 명단은 경찰과 중앙정보부 등 기관마다 최소 119~149명까지 30명 가량 차이가 난 셈이다.
김익상(사북사건 합동수사단 소속 검사)은 “1980년 5월 6일경 정선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용의자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고 이 명단은 현장 사진과 회사측 협조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진술했다.
‘진실위’의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1980년 4월 24일 ‘사북사건’ 타결 직후 과격행동을 선동하거나 주동한 김모(34)씨 등 30여 명은 사북현지를 빠져나와 외지로 도피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사북사건의 주모자들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진실위’는 경찰조사를 통해 경찰은 ‘사북사건’ 직후 외지로 탈출했다는 주동자 30여 명에 대한 인적사항이나 수사결과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백기만(1980년 당시 정선경찰서 남면지서 근무)씨는 진실위 진술에서 “사북사건의 핵심 주동자들은 나중에 대개 흐지부지 된 걸로 안다. 잡으러 갔다가 없으면 기소중지 되거나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진실위’는 기무사령부 제출자료인 ‘사북난동사건 수사계획’ 및 경찰수사기록에 근거해 계엄사령부의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조직과 구성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 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법적 근거는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10.26사태’ 하루 뒤인 27일 발표된 계엄공고 제5호였다.
또 당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의 체계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아래에 ‘사북사건 합동수사단(군, 검, 경 포함)을 두고 단장에는 손영래 제1001보안부대장, 부단장에는 김익상 원주지청 검사와 여판술 중앙정보부 강원지부 수사과장을 임명했다.
이어 수사주무관에는 안영섭 강원도경 수사과장, 박기학 제1001보안부대 중령이 맡았다.
수사주무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수사를 진행한 수사반은 총 5개 반으로 편성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우선 수사1반(사북지서 무기고 파손조사), 수사2반(노조지부장 린치사건조사), 수사3반(경찰관 사망과 부상피해 조사), 수사4반(광업소와 노조사무실 파손 주모자 조사), 헌병대, 보안대 등 5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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