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관전평'을 내놨다. 여기엔 이런 논리가 깔려 있다. "내 철학과 정책이 곧 글로벌 스탠더드다→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바마의 각종 정책방향은 선거용·국내용으로 봐야 하며 결국 나를 따라 올 것이다→그러므로 오바마와 나는 닮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미국인들의 변화 열망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그런 것일까. 미국의 민주주의와 법치는 그렇게 허술한가. 이명박 정부의 이같은 인식에는 한미 현안에 대한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이 담겨 있다.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 착각 1. "한미 FTA, 美도 결국 비준한다"
이명박 정부는 "오바마 측도 결국 한미 FTA 비준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도 "미국 자동차 산업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데 문제를 다른 나라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됐다"며 "재협상은 없을 것이고 그런 방침을 견지하면서 대응하겠다"고 선을 긋고 나섰다.
한미 FTA에 대한 오바마 당선인의 거듭된 반대론에 대해서도 김 본부장은 "선거 중에는 강한 메시지가 전달돼야 하므로 여과되지 않은 말이 있게 마련"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앞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국내 정치용에 가깝다"고 주장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당·정·청은 연일 "한국 의회에서의 선(先)비준을 통한 대미압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의 임기 중, 즉 '레임덕 세션'에 미국 의회에서의 비준이 이뤄지길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이같은 우리 정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한미 FTA와 관련한 입장을 밝혀 온 오바마 당선인이 이를 곧바로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차기 대통령의 뜻과는 달리 부시 대통령 임기 중 비준안이 통과될 것이라는 예상은 순진함을 넘어 미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무지'에 가까워 보인다.
한미 FTA를 '결함이 아주 많은 협정'이라고 규정한 오바마 당선인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주로 자동차 교역의 불균형을 지적하며 반대론을 거듭 밝혀 왔다. 설령 정부출범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비준처리로 입장을 선회하더라도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의 문턱을 넘어서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 현지 전문가는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비준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들, 그리고 FTA가 어떤 피해를 줄지 정확히 모르는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찬성했었다"며 "그러나 FTA의 폐해가 확인된 지금 민주당이 다수인 상황에서 비준에 찬성할 민주당 의원들은 거의 없고, 일부가 넘어가 공화당 의원들과 합세한다고 해도 비준 정족수를 채우는 게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 착각 2. "북미 직접대화나 통미봉남은 없다"
북한을 바라보는 이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인 간의 시각 차도 확연하다.
이 대통령은 부시 행정부가 지난 달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일을 두고 "북쪽의 위협에 굴복한 잘못된 대응"이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지원국 해제를 환영한다"는 청와대의 '울며 겨자먹기 식' 공식 논평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속내를 드러낸 셈.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6.15공동성명과 10.4정상선언에 대한 외면도 여전하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이 대통령의 반복적인 언급이 무색할 정도로 남북관계는 사실상 단절돼 있는 상태다. 하물며 미국에서 북미 직접대화 가능성이 끝없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 편할 리 없다.
그러나 '속도조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희망사항은 미국 대선이 끝난 지 사흘 만에 깨지는 분위기다. 현재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이 7일 뉴욕에서 열리는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회의에서 오바마 캠프의 한반도 정책팀장이었던 프랭크 자누지를 만나기로 돼있기 때문이다.
리근 국장은 6자회담 북한 대표단의 차석대표이며, 자누지는 조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의 보좌관을 지낸 '북한통'으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대북 협상과 관련해 중책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면을 넓혀 가는 오바마 당선인 측의 이같은 행보는 대북 직접대화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의 측면에서도 오바마 측 인사들의 과거 발언은 매우 일관돼 있다. 오바마 당선인은 2006년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6자회담과 병행해 북한과 양자대화를 시작하는 게 옳다"고 말한 후 지금까지 "김정일과도 대화할 수 있다"는 태도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또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국무장관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 외교정책을 자문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 등 오바마 당선인 측 주요 인사들 역시 북미 직접대화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
국내 전문가들의 견해도 일치한다. 지난 1년여 동안 미국 민주당 계열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 등에서 오바마의 정책 형성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6일 한 토론회에서 "오바마는 직접대화를 상당히 중시할 것이어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누지 등을 거론하며 "오바마의 참모들은 군비통제를 중시하는 기능주의자들 보다 지역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유학까지 했던 사람들이 많아 (부시 행정부 보다)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연철 한겨레연구소 소장은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그리 여유롭게 바라보지 않고 적극 개입해서 핵확산 방지의 성공사례를 만들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북미 직접대화와 통미봉남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왕따'에 대한 불안감을 지우기 어렵더라도 이 정도면 착각을 넘은 '환각'의 수준이다.
■ 착각 3. "오바마의 '부자증세론'은 바뀐다"
자기최면에 가까운 이명박 정부의 '착각'은 외교적 사안뿐만 아니라 '고소득층 증세-중산층이하 감세'라는 오바마 당선인의 '국내용 공약'에 대해서도 나타났다.
한승수 국무총리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고소득층 증세 정책은) 미국 경제위기 전에 내놓은 것으로 안다"며 "앞으로 굉장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오바마 당선자는 당선되자마자 위기에 처한 미국 경제부터 챙기겠다고 얘기했고, 세계적으로도 최고세율을 경쟁적으로 내리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일일이 반박하기도 황망한 주장이다. "미국인 노동자의 95%는 감세 혜택을 보거나 기존보다 세금을 많이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오바마 당선인의 거듭된 공언이었다. 미국인들은 그런 오바마를 선택했고, 민주당에 몰표를 줬다. 그게 모든 걸 말해 준다.
이에 따라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에는 3~4.6%가량의 세금이 더 부과되고, 중산층 이하의 국민들은 세금감면의 혜택을 받을 예정이다. 연소득 5만 달러 이하의 노인 700만 명은 소득세를 전액 감면받는다.
즉, 세수 증대분을 '부자'들로부터 확보해 중산층의 소비여력을 확충하고, 또 이 같은 조치를 통해 침체된 실물경제를 회복할 동력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오랫동안 독점해 온 '감세 프레임'에 대해 "나의 감세는 하위 95%에 대한 감세"라고 맞받아친 것은 오바마 승리의 핵심 요인이었다. 그때그때의 상황논리에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처럼 현실은 청와대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한미동맹'을 금과옥조로 여겨 온 여권이라면 조바심이 날 만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연일 "상대방이 변할 것"이라고 부르짖는 청와대와 정부 인사들의 행태는 안쓰럽기만 하다.
하기야 '꼼수'와 '말 바꾸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대통령이다. 대통령 자신의 '중단 선언' 이후에도 핵심 측근들 사이에선 여전히 '한반도 대운하' 군불 지피기가 반복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말값'과 '위상'을 여기까지 실추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
혹시라도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권력자'의 행태가 대개 그러하다고, 그래도 된다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모든 '착각들' 중에서도 바로 그 대목이 가장 심각한 수준의 착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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