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가 좀 짧다? 보이겠네"라고 했더니, 아이가 치마를 번쩍 들어 올려 보이며 "안에 속바지 붙은 건데?"라고 반문했다. 나는 입을 닫았다.
몇 년 전 아이가 빨간 미니스커트를 사 왔을 때, 크게 화를 냈다. 치마가 너무 짧았다. 치마를 입고 나가면 못된 남자들이 너를 쳐다볼 거라고, 너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며 화를 냈다. 세상이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해 주지 못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 테니, 피해자인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고, 방어해야 한다고만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치마로 된 교복을 입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려는 결심을 학교에 보고해야 했고, 교복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훈계를 들었다. 나는 안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겠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닌 며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던 운전자가 나를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그의 차 꽁무니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울지 않았다. 대체로, 욕을 하면 눈물이 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 욕이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서른 즈음 되었을 때, 업무 관계로 만나는 남자들에게 '다, 나, 까'로 대답하고 질문했다. '군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길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나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에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공격적인 눈빛으로 응수했다. 동년배 친구들에게 희롱조의 농담을 퍼붓기도 했고, 음담패설에 더 크게 웃었다.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던 때를 지나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스스로 입은 갑옷은 남자보다 남자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만든 남자보다 남자 같다는 건 공격적이고, 먼저 선수 치는 방어에 능한, 드세고 사나운 언니의 이미지였다.
엄마는 가끔 "우리 아들"이라고 나를 지칭했다. 내가 어릴 때 이혼한 엄마는 남자의 울타리 없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강조했다. 현관엔 남자 신발이 있었고, 현관에서 보이는 옷걸이엔 남자 옷을 구해다 걸어 두었다. 낯선 방문객이 배달을 오면 "여보!"라고 있지도 않은 사람을 부르는 연기까지 했다. 전쟁 전에 태어나 혈혈단신으로 살아오다시피 한 엄마도 이 나라에선 아무 때나 쉽게 공격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 이혼 후 보호자 없는 한부모로 살던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심리적 위협은 점점 거세졌다. 출퇴근마다 비일비재한 성추행에 대한 대처법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거친 언사와 과격한 행동으로 상대방을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엄마의 대처법엔 필요에 따라 폭력적인 공격을 적재적소에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노하우가 담겨 있었다. 여성 스스로 성적 대상화를 용인할 때는 자기 존엄을 버리면 취할 수 있는 이득도 있어 보였다. 나는 가장 가까운 양육자의 공포를 받아들이며 사회가 강요하는 성 정체성을 혼합해 새로운 자아를 만들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내 모습은 왜곡된 사회에서 적당히 눙치며 살아갈 수 있는 능수능란한 형태였다. 날 선 가시를 잔뜩 세우고 절대 긴장을 내려놓지 않았다. 피로가 쌓이는 것도 외면한 채, 남자보다 거센 여자로 남기 위해 스스로를 밀어붙였다.
마흔을 넘기며 '쎈 언니'의 이미지에서 오류를 찾았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성이란 무엇이며, 그에 상반되는 남성성은 또한 무엇인가. 내가 생각한 '여성성'은 나약하고 거절과 거부에 능하지 못하며, 자신의 행동을 숨기려 드는 성향이었다. 반대로 내가 취했던 '남성성'은 거칠고, 공격적이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대화를 단절하고, 완력을 사용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대표적 성향이 아니며, 폭력성에 관한 문제라는 걸 전혀 몰랐다.
폭력은 어느새 내면화되었고 나는 편리한 것들만 취하며 활용했다. 한 가지 더 외면한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남성성'이라 불렀던 건, 남성의 성향이 아닌 예의를 버린 폭력적이고 비인간적 형태를 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나를 피해자 자리에 놓고 나를 공격했다고 생각한 모든 폭력의 총체를 버무려서 나를 만들었다. 범접할 수 없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살짝 건드리면 물어뜯을 것 같은 굶주린 포식자의 모습이 '여성성'을 거세한 '남성'이라고 믿은 것이다.
작고 사소한 폭력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존엄할 수 없다. 모멸감에 휩싸인 인간이 늘어날수록 폭력은 평범해진다. 치마 속에 반바지를 입었다고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무엇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속옷이 비치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면, 속옷을 입는 게 예의인가?
교복 치마에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갈 때 날 희롱하는 운전자에게 속에 반바지를 입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보탰는데, 20년이 지나 내 딸도 치마 속에 반바지를 입었다고 증명해야 한다니…. 무력한 세상을 아이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짧은 치마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자유롭게 입고 자유롭게 걸을 평등한 세상이지 치마 길이가 아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이에게 "세상이 하도 험하니…"라는 말은 보탤 필요가 없다. 스무 해 넘게 살아남은 아이도 알고 있다. 한 사람을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음란한 시선에 죄가 있을 뿐, 짧은 치마와 쭉 뻗은 다리는 죄가 없다. 속바지를 증명하지 말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당당하면 평범한 악은 움츠러들까?
잘못된 것은 폭력이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명랑하게 말하고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 우리의 모든 딸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미는 이 땅에 남은 사소한 폭력들과 인간의 모습으로 싸우겠노라고. 그것은 나 자신과의 투쟁뿐 아니라 여기저기 흘린 폭력의 찌꺼기와 싸우는 것일 게다.
눈에 띄는 짧은 치마는 죄가 없다. 시선을 사로잡는 늘씬한 다리도,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들도, 아무 죄가 없다. 우리가 저항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폭력을 먹고 자란 무례함, 그 무례함에 대한 무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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