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파동' 끝에 미국 측이 이례적으로 재협상을 수용한 일, 금융위기 타개책의 일환으로 한국과 300억 불 규모의 통화스왑 협정을 체결한 일 등을 두고 청와대가 '한미공조의 산물', '미국의 선물'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양국 정상 간의 공식적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개인적 유대감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성사 가능성을 낙관할 수 없었으리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부시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마친 뒤 "굳바이, 마이 프랜드"라는 인사를 남기기도 했다. 한 마디로 '통'했다는 얘기다.
아, 부시!
각종 여론조사와 미국 현지 언론이 사실상 오바마 당선을 점쳤던 최근까지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청와대는 일단 "미국 대선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그 이후'에 대한 언급은 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나섰지만, 청와대의 '부시 프랜들리'한 면모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미 대선 하루 전날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직접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경제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하버드대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와 면담을 갖기도 했다. "세계 경제상황을 점검하고 한국의 대응전략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해석이 나왔다.
불과 일주일 전에는 부시 대통령이 지난 8월 한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밝히기도 했다.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이동관 대변인, 김재신 외교비서관 등에게 전달된 이 편지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은 대한민국 국민들과의 굳건한 관계를 가치있게 생각한다. 향후 양국은 지역의 자유와 번영을 발전시키는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썼고, 친필 서명도 남겼다.
지금까지 세 차례 열렸던 한미 정상회담이나 사안에 따른 양국 정상 간의 전화통화, 그리고 G8 확대정상회의 등 다자 외교무대까지 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함께 한 자리에 대해서는 늘 '돈독한 우정', '끈끈한 관계', '긴밀한 협력' 등의 수사가 빠지지 않았었다.
'오바마 시대'…청와대는 준비됐나
역으로, 궁합이 좋지 않은 오바마 시대를 맞는 청와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인적 네트워크의 구축부터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동안 여권 내 한미관계의 주요 인맥이 주로 공화당 측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돼 왔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미 각 당의 경선이 끝난 시점부터 오바마, 매케인 양 진영의 인사들을 꾸준히 접촉해 왔다"고 밝혔으나, 그나마 오바마 진영 인사들과 교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 비서관 정도가 꼽힐 뿐이다.
박 수석은 오바마 당선자의 '경제 브레인'으로 알려진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으로부터 직접 수학한 것으로 전해졌고, 주미 참사관과 외통부 북미국장 등을 거친 김성환 수석과 미국 유학파인 김태효 비서관 역시 오바마 측 인사들과 교분이 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이동관 대변인도 "그 동안 충분히 준비해 왔던 만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는 일단 정부 주요인사를 조만간 미국에 파견하는 등 접촉면을 넓히는 데 진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오는 15일 워싱턴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오바마 당선자와 직접 조우할 가능성에도 대비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선 미국 조야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정몽준, 박진 의원 등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치다.
그러나 이정도 인맥이 향후 예상되는 정책적 엇박자를 연착륙시킬 수 있을까? 전통적 우방인 한미관계 자체가 당장 급변하지는 않겠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과 대북정책 등에서 오바마 후보와 적지 않은 온도차가 있는 게 사실이다. 연내 비준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있는 청와대-한나라당의 전반적 기류와 달리 오바마 당선자는 지난 대선기간 내내 한미 FTA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다.
북한문제와 관련한 한미 간의 공조체제도 '삐끗'할 가능성이 높다. 오바마 당선자는 조건 없는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는 등 대화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 대통령 역시 '대화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밝히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단절돼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과 맞물려 자칫하면 한국이 국제적 '왕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적지 않다.
미국을 '설득'하겠다는 靑…과연?
그러자 주요 현안에 대한 차이를 애써 부정하는 기류도 역력해 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특히 대북문제에 대해선 부시나 오바마, 매케인이 크게 골격이 달라질 것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한미 FTA 문제도 결국 비준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되든 간에 북미관계는 한미 간 탄탄한 공조 위에서 이뤄질 것(한승수 국무총리)", "정책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는 낙관론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청와대는 일단 '대미 설득'에 주력할 방침이다. 꾸준한 인적 접촉을 통해 한미 FTA, 북한문제 등 굵직한 현안과 관련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긴밀한 공조를 재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이 각각 제 갈길을 가는 '홀로서기'도, 우리 정부의 일방적인 'U턴'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오바마 시대'의 개막은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있다. '실용주의'라는 레토릭이 무색할 정도로 정부 출범 이후 '우측통행 외길'을 걸어 온 이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지적이다.
경제와 남북관계의 '우향우' 노선을 고집하면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다. 반면 갑작스런 '오바마 보조 맞추기'는 국내 보수진영의 반발이 뻔하다. 어중간한 '줄타기'는 사안마다 혼란을 빚어낸다. 김영삼-클린턴 행정부, 김대중-부시 행정부, 노무현-부시 행정부로 이어진 한미 정부의 '성격차'가 외교적, 국내정치적으로 숱한 논란을 야기했던 역사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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