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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사북사건은 공권력과 회사가 유착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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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사북사건은 공권력과 회사가 유착해 만들어졌다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⑥공권력에 ‘유린’ 당한 사북사건

공권력에 ‘유린’ 당한 사북사건

1980년 4월 21일 강원 정선군 사북에서 발생한 ‘사북사건’은 군부독재 시절 ‘공권력’이 탄광노조에 얼마나 깊숙하고 노골적으로 개입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의 2008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공권력이 노동조합 활동에 광범위하게 개입한 것은 물론 회사와 끈끈한 유착관계를 통해 노동조합을 통제하고 자본의 앞잡이로 만든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진실위’가 1980년 관련 자료와 관련자 조사를 통해 현지 경찰과 정보기관, 강원도, 정선군 등 공권력이 노조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했던 적나라한 사실을 밝혀냈다.

▲1980년 계엄사 주도로 열린 사북사건 관련자 재판에 최정섭 광산연맹 위원장이 진술하고 있다. ⓒ사북사건동지회

광산노조연맹이 1980년 작성한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자료에서는 정선경찰서 기동경찰, 정선경찰서 정보과장, 정보계 형사, 정선경찰서장, 정선군수 등이 노조 지부장선거에 개입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 -1979년 4월 3일 지부장 선거 시와 수차 재선거를 하고자 할 때는 꼭 기동경찰이 대기
-1979년 3월 29일 이후부터 정선경찰서 정보과장과 형사 수명이 현지에 상주
-1979년 4월1일~4월 4일 약 80여 명의 기동경찰이 투입되어 후보자의 동태파악 및 조합원들의 행동여하를 감시하기 위하여 계속 상주


-1979년 8월 29일 광산연맹 위원장이 주재하는 현지 간담회에 기동경찰관이 사북에 대기
-1979년 10월 9일 오후2시~3시30분까지 정선군수, 정선경찰서장이 직접 동원탄좌에서 (동원탄좌)계장급 이상 약 100명 정도를 모아 놓고 절대로 지부장 선거는 할 수 없다. 만일 (지부장선거)하면 관에서 개입, 중단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계장급 이상은 이에 협조할 것을 당부-당시 기동경찰을 사북에 주둔시키고 있었음.》

당시 광산연맹 보고서는 1979년 5월 8일 광산연맹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무효 결정을 한 직후, 광산연맹 위원장이 현지 중앙정보부 조정관으로부터 “정선군 노동대책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통고, 내용은 이재기를 지부장으로 인정하라”(대책회의 참석자는 정선군수, 정선경찰서장, 중정 조정관)는 요지의 전화를 받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최정섭 당시 광산연맹 위원장은 ‘진실위’ 조사관을 만나(2007년 1월 12일) “당시 공권력은 말 그대로 이재기 한 사람을 위해 강원도, 지역경찰, 동원탄좌가 총동원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당시 태백과 영월, 정선지역을 관할하는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있었다. 성이 정씨로 알고 있다. 중정의 조정관이 사실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기획하고 조종하고 있었다. 정 조정관과 나는 그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내가 강원도 쪽에 출장을 가거나 또 그 조정관이 서울에 올 때 가끔 만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의표시(봉투)를 했다.”는 진술을 했다.

이어 중앙일보 태백지역 주재기자였던 탁경명씨와 신아일보 기자였던 하두만씨도 2007년 진실위 조사를 통해 “중앙정보부 조정관은 모르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광업소나 노조 일에 다 개입하고 있었다”며 “구체적인 사례나 마나 그 사람이 다 조정하고 개입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두, 세 사람 촉탁해서 정보보고를 듣고 다녔다.”고 진술했다.

‘진실위’는 정 조정관을 만나 당시 노조선거에 개입했던 사실 등의 진술청취를 위해 국가정보원에 1980년 사북지역에 근무했던 정 조정관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특정 ‘성’ 만으로 해당직원에 대한 확인이 곤란하다‘는 답변으로 ’진실위‘의 요청을 묵살했다.

특히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을 지휘했던 1군 보안부대 중령 출신인 박기학은 당시 사북광업소의 구조적인 비리와 노조의 문제점 및 공권력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밝혀 눈길을 끌었다.

2007년 10월 24일 박기학 전 보안부대장은 ‘진실위’ 조사관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80년 당시 노조는 완전히 사북광업소 편을 들고 있었다.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광부들이 노조지부장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당시 노조지부장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햇던지 당시 정선경찰서장이 노조지부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제보도 있었다.

서장은 나중에 인사조치 되었다. 광부들이 이용하는 구판장 물건 값이 예를 들어 1000원짜리가 1500원씩 할 정도로 비쌌다. 임금인상을 하면 오르기 전과 비교해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임금인상 하기 몇 단 전에 동발이나 채탄량 등을 깍아 임금을 적게 주었기 때문에 임금 인상효과가 거의 없었다.


당시 회사 경영주가 이연, 이혁배 부자였는데 광부들의 임금을 착복하는 비리를 저질렀다. 이미 회사기획실에서 갱도별 일일 생산량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광부들의 채탄량과는 관계없이 하루 생산량을 회사에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조사 중에 회사 직원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회사 장부를 확인해 밝힌 내용들이다. 이렇게 착복한 돈이 몇 년동안 엄청났다.

▲채탄막장 광부 모습. ⓒ태백석탄박물관

당시에 갱도를 굴진하면 굴진비를 정부에서 주었는데(굴진보조비) 이것도 속여서 타냈다. 예를 들어 A에서 B지점까지 굴진행서 굴진보조비를 타 먹으면 다음에 다시 A지점에서 C지점까지 중복해서 타 먹는 식이다.

광산노조도 당시 내부 파벌싸움으로 동원탄좌 노조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결국 광부들이 사는 것도 어렵고 노조는 어용이고 임금인상은 안 되고 하니까 그런 불만들이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인근 고한 사척탄좌는 1000여 명이 들어가는 대형 목욕시설도 있었고 작업복 세탁도 해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불만이 더 많았다.“

또 당시 장성경찰서에서 ‘사북사건’ 당시 경장으로 근무했던 이용재씨는 “간선제로 노조지부장을 뽑으니까 금품수수 등 문제가 많았다. 노조지부장이 되면 집 한 채 마련할 정도였다. 사북만이 아니었다. 탄광노조는 대게 비슷했다. 그러니까 비리가 없을 수 없고 지부장 자리를 지키려고 회사측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어용노조가 되고 다시 광부들에게 불신을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사북사건’ 당시 정선경찰서 남면지서에 근무했던 백기만씨는 “사북이나 고한지서에 근무하면 하청 덕대업체들이 한 달에 쌀 한가마, 연탄 100장을 줬기 때문에 월급을 그대로 저축할 수 있었다. 또 갱내 사고가 일어나면 가끔 광업소에서 목욕비조로 1, 2만 원 정도 주기도 했다.”고 비슷한 진술을 했다.

신아일보 태백주재 기자였던 하두만씨는 탄광촌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장기자였다.

“탄광 간부와 노조간부 및 경찰들이 서로 어울려 돈을 쌓아 놓고 술을 먹고 그랬다. 그런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사북지서에서 (경찰관으로)근무하면 쌀과 연탄을 무상으로 회사에서 대줬다. 또 명절이면 경사, 경위 얼마하고 딱 정해 놓고 떡값을 지불했다.

탄광은 화약을 다루기 때문에 수시로 경찰이 보안검사를 한다. 갱도 내부도 자주 안전점검을 했기 때문에 광업소는 문제가 드러날까봐 경찰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사북과 고한지서에 근무하는 걍찰들은 좋은 보직이었다.

사북지서에 근무하면 쌀과 연탄을 무상으로 광업소에서 대줬고 명절이면 떡값도 지급했다. 내가 한 번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경리장부를 본 일이 있는데 경사 얼마, 경위 얼마, 사북지서 얼마 이런 식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광산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돈이 그렇게 흥청되어도 광부들은 개, 돼지 취급을 받았다.”


▲1980년 사북사건 협상장에 참석한 김성배 강원도지사와 사북광업소 광부대표단. ⓒ사북사건동지회

특히 ‘사북사건’직후에도 계엄사의 핵심 위치에 있었던 보안사 등 공권력이 노조활동에 적극 개입한 사례가 드러나고 있다.

‘진실위’자료에 따르면 홍금종 당시 사북광업소 노조 부지부장은 1980년 5월 정선경찰서에서 석방되기 직전 사북사건의 주모자 사건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제1군사령부 1001보안대 박기학 중령의 개입사실이 나타난다.

홍금종 부지부장은 “정선경찰서에서 석방되기 하루 전 보안사 박기학 중령이 당신이 노조지부장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뒤 보안부대 박정환 중사가 ‘당신이 지부장을 맡아야 겠다’고 계속 설득을 했다. 나중에 그 제의 받아 들이면서 조건을 제시했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나머지 광부들을 다 풀어주면 받아 들이겠다고 말했다.

석방된 후 노조지부장 직무대리를 하다가 몇 개월 후 간선제 선거로 지부장을 했다. 1980년 6월에서 1987년 5월까지 사북광업소 지부장을 연했다. 후에 광산연맹 위원장을 하다가 1990년 5월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또 박기학 당시 보안사 중령도 홍금종씨를 만나 노조지부장을 맡도록 설득했다는 말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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