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 사북출동 했으면 ‘광주비극’ 없었을 것
1979년 이른바 ‘10.26사태’와 ‘12.12사태’를 연이어 마감한 뒤 ‘격동의 80년대’를 가장 먼저 연 곳은 강원도 첩첩산골 탄광촌이었다.
1980년 4월의 탄광촌 사북은 폭풍전야였다. 정선군 사북읍 지장산 일대에는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4000여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근무한 사북광업소 일대는 밤낮 없이 날리는 탄가루를 뒤집어 쓰면서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광부들의 노동기본권은 억압당한 채 광업소의 횡포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냈다.
광부와 그 아낙네들인 부녀자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주면 주는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 살아가는 ‘막장인생’ 그 자체였다.
때문에 부당한 지시나 억울한 처분을 당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치부돼 탄광을 떠날 각오가 없으면 눈물을 머금고 이를 삭여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는 2006년부터 2년이 넘는 관련자 조사와 관련 자료를 확인해 ‘사북사건’(사북사태) 발생원인, 부당한 공권력 개입 등을 확인했다.
특히 사북사건 발생 1개월 전 내무부차관이 탄광촌의 민심을 계엄사령부에 보고된 특별한 자료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서정화 내무부차관은 사북사건 발생 직전인 1980년 3월 14일 계엄사령관의 자문을 위해 구성된 계엄위원회(위원장 계엄사령관 이희성) 제19차 회의에서 탄광촌 광부들에 대한 실상을 보고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의 계엄위원회 보고 자료는 탄광촌 지역을 담당하는 경찰과 시군 읍면사무소를 통해 내용을 취합해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 내용은 간단했지만 핵심 요약은 탄광촌 광부와 부녀자들의 인권과 노동착취가 매우 심각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주택 및 급수시설을 포함한 생활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인데다 요즈음은 체불 노임 때문에 이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다. 광산에서는 이러한 광부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덕배’라는 폭력조직까지 동원하고 있다. 원성이 집단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체념적인 이들의 원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80년 4월 21일 사북에서 발생한 이른바 ‘사북사건’(사북사태)은 탄광촌의 실상과 광부의 존재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였다. 당시 사북사건은 전국에 계엄 확대를 코앞에 두고 발생해 신군부에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특히 1980년 사북사건이 전국에 알려진 뒤 4월 말부터 5월 중순 ‘광주 5.18’까지 대단위 공장이 밀집한 곳의 사업장은 물론 대학가까지 소요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신군부와 중앙부처는 탄광촌 민심이반이 전국에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사북사건이 마무리된 지 26년이 지나 노무현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는 2006년 6월, 사북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사북사건이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 상해, 실종과 중대한 인권침해, 조작의혹사건이 있다고 판단해 피해사실을 조사해야 할 것으로 확정했기 때문이다.
‘진실위’는 당시 사북사건은 탄광 기업주의 횡포와 어용노조에 항거하며 시작됐지만 국가공권력의 개입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 되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진실위는 계엄사의 ‘공수부대 투입의혹’과 사북사건 수사과정에서 공권력의 명백한 불법행위 등 소문에 그쳤던 내용을 토대로 각종 자료와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 사실로 확인했다.
1980년 4월 사북사건의 중심에 섰던 이원갑씨 등 관련자들은 당시 공수부대의 ‘사북광업소 진압설’이 끊임없이 나돌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원갑 사북동지회장은 “당시 4월 23일 정오시간 무렵, 사북읍사무소 근처에서 기관원으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말쑥한 사람으로 부터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당시 그는 조용한 어투로 ‘24일 밤에 공수부대가 침투한다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정말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변했다.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 않았고 동료들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래서 시위대 집행부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공수부대 출신 동료와 군대를 다녀온 동료들에게 광업소 무기고와 화약고 등을 접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들은 즉각 몽둥이 등으로 무장해 무기고와 화약고를 지키며 공수부대 침투에 대비했다.”
‘진실위’의 조사자료결과 공수부대 투입계획은 사북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곧장 진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위가 당시 보안사(기무사령부)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최초 군병력 투입계획은 1980년 4월21일 오후 7시께 경찰차에 치인 동료들이 부상을 당한데 분노한 광부들이 사북지서를 점거하면서 시작됐다.
사건 발생 이틀째인 4월 22일 오전 8시 사북읍 고한리 고한지서(당시 사북읍에는 사북지서와 고한지서 두 곳 운영)에 도착한 유내형 강원도경국장은 정선경찰서 수사과장으로부터 현장상황을 보고 받았다.
유내형 도경국장은 춘천, 원주, 횡성, 영월, 정선, 태백경찰서 등에서 차출한 경찰병력 300여 명과 함께 사북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상태였다.
사북광업소 광부와 부녀자들은 광업소 진입로 근처인 안경다리(영동선 철도)일대와 노조사무실, 복지회관 등에 모였고 집결한 광부와 부녀자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진압경찰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한 유내형 도경국장은 원주 1군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했다.
“강원도경 유내형 국장입니다.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사북광업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진압경찰 숫자가 300여 명에 불과해 수천 명이 넘는 광부를 진압하기가 역부족인 상태입니다. 군병력 지원이 없으면 진압이 불가능하니 군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경찰의 군병력 지원요청에 대해 1군사령관은 단호히 거절했다.
“광부들의 시위에 군이 진압에 나설 경우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군병력 지원은 현재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고 경찰력으로 해결하기 바랍니다.”
전화를 끊은 1군사령관은 군병력 출동 대신 원주 원주 1군수지원사령관에게 지시해 군수지원사령부 병력 300여 명을 출동 준비시키도록 했다. 또 사북 인근의 영월과 정선지역 향토사단 예하 대대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출동준비 대기를 지시했다.
군병력 지원이 불가한 것으로 판단한 유내형 도경국장은 300 여명의 경찰병력으로 진압에 나섰다. 곧장 사북으로 진입해 사북지서를 접수한 유내형 도경국장은 광부와 부녀자들을 향해 경고방송을 했다.
“계엄령 하에서 진행되는 여러분들의 집회는 불법이다. 즉각 해산하라. 만약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에 나서겠다.”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경찰 300명을 앞세운 도경국장의 경고방송에 물러설 그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경고방송에도 꿈쩍도 않는 광부들의 무리를 보고 발끈한 유내형 도경국장은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진압장비를 거의 갖추지 못하고 300여 명의 경찰병력으로 수천 명 이상 운집한 상태에서 고지와 마찬가지인 안경다리 위 철둑길 광부를 진압하려 한 작전은 너무 무모했다.
광부들이 철도변에 있던 자갈을 던지자 기세에 눌린 경찰관들은 곧장 도주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의 경찰이 골절상 등 부상을 당했다. 비교적 가벼운 찰과상이나 경상을 입은 경찰관들의 수도 100여 명에 달했다.
경찰로부터 광부들이 던진 돌에 진압에 나선 경찰관이 사망하고 70여 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당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보고를 받은 계엄사는 비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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