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국제 외교 관례 상 사전에 정해진 정상회담이 당일에 취소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네드 프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6일 "오바마 대통령이 두테르테 대통령과 양자회담을 갖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초 6~8일 라오스에서 열리는 아세안 정상회의 기간에 두테르테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6일에 가질 예정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취소한 이유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전날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섞은 비난을 가한 데 따른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라오스로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오바마는 자신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면서 "(오바마가 마약과의 전쟁을 언급한다면) '개XX'라고 욕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오바마 대통령도 "분명히 그는 기상천외한 사람"이라며 "나의 팀에게 필리핀 측과 이야기해 지금이 우리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회담 취소를 암시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 이후 미국과 서방이 마약과의 전쟁 등으로 인한 필리핀의 인권 상황에 우려를 표한 데 대해 직설적으로 반박해 왔다. 이번 양국 정상회담에서도 인권 문제가 화두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두테르테의 욕설 파문은 외교적 설전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는 남중국해 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필리핀은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다.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최근 필리핀의 손을 들어준 것을 계기로, 미국은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해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려 해왔다.
이런 가운데 두테르테 대통령의 욕설 파문을 계기로 오바마와 두테르테의 첫 번째 만남이 무산되면서 미국과 중국 간의 남중국해 갈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특히 헤이그 재판소의 판결 뒤에도 중국과 직접적인 갈등을 자제하며 유화적인 제스츄어를 취해왔다.
이처럼 중국 포위망의 핵심 국가인 필리핀이 친중 노선으로 기울어 가는 상황에서 욕설 파문으로 인한 필리핀과의 외교적 관계가 악화될 경우, 미국의 남중국해 전략에도 일정한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보기 드문 외교관계 단절"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취소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중국의 남중국해 지배 공고화 등으로 미-필리핀의 관계가 결정적인 시기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베니그노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시절에 미-필리핀은 중국의 위협에 맞서 군사 협조를 강화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 같은 전략에 의문을 나타냈다"고 지적했다.
한편 백악관은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취소 사실을 알리며 "오바마 대통령이 6일 박근혜 한국 대통령과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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