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탄광일, 돼지 키우는 일, 연탄배달 등 1인 5역
이연복씨는 공주에서 필요한 서류를 갖춰 황지땅을 다시 찾아 입사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씨에게 전혀 상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한성광업소 지정병원에서 X레이 촬영결과 기관지염 증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한성광업소는 취업을 못하고 한성광업소 명계장이 소개해준 한성광업소 하청인 소규모 덕대탄광에 채탄보조원으로 취업했다.
1개월 후 고향에 있는 부인과 5남매를 황지 사글세 방으로 이사시켰다. 그러나 그 덕대탄광은 탄이 팔리지 않아 임금이 3개월이나 밀렸다.
굶지 않기 위해 이웃에서 쌀을 빌려 먹었는데 그 이웃도 살림이 어려운 탓에 더는 손을 빌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3일을 굶은 그가 하느님을 찾으며 기도하는데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국수 한 다발을 내미는게 아닌가. 동네 교회 목사가 국수다발을 들고 찾아와 그에게 국수를 주고 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 어떤 고난도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려운 일이 연달아 닥쳐왔다.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생활을 하던 1973년 7월 13일 여름, 결코 잊지 못할 운명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탄광에 어렵게 취업을 했지만 탄이 팔리지 않아 몇 개월간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하는 최악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탄광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아 이웃에서 쌀을 빌려 먹는 생활을 했다.
어렵게 황지에서 광부생활을 하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찾아왔다. 황지 탄광촌에 온지 6개월여 만에 사랑하는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황지에서 태어난 막내는 생후 70일만에 지 어미와 영영 이별을 해야 했다. 6남매를 키워야 할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옆에서 어린 아이는 철 없이 잠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젖먹이 막내와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니 절망만 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 부인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내가 남은 아이들을 잘 챙겨야지, 아니면 애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내야 한다’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자는 의미로 막내 이름을 남쪽나라 왕이 되어 달라고 남원이라 지었다. 젖먹이 막내아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며 탄광에 출근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준비 하면서 아이들 먹을 것 챙기고 큰 딸들에게 동생들 잘 챙기라고 했다. 김치 하나인 도시락을 들고 탄광에 출근하면 8시간 동안 애들 생각할 틈도 없이 부지런히 탄을 캤다.
이달에는 월급이 나올까 기대하며 기간이 1년이 넘었다. 월급 대신 쌀이라도 받을 때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때문에 새여자를 얻을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재산도 없고 아이들만 6남매인 내게 누가 고생길이 훤한 내게 시집을 오겠는가. 당시 고생했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다행히도 이씨는 부인을 잃은지 3년이 지나 어렵사리 새 여자를 얻었다. 혼자 탄광에 다니며 6남매를 키우기가 벅차 이웃의 소개로 여자를 만난 것이다.
단칸방에서 새 여자와 살림을 차린지 1년 만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살림이 나아지기는커녕 탄광월급이 오르지 않고 새로운 수입원도 없으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생활은 궁핍해졌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두 번 째 부인이 막내를 낳은지 두 달이 지나자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벌어 놓은 돈이 있나, 전 처가 낳은 6남매에 아들은 하나 더 있지, 도대체 희망이 없으니 집을 나간 것이니, 자신의 처지를 원망해야 했다.
이씨는 한숨을 쉬며 7남매를 키우면서 탄광에 다니는 찌든 생활을 어느덧 익숙해졌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탄광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2년 전 집을 나간 둘째 부인이 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객지에 나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정말 잘 왔다!”하며 포근하게 안아줬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여자는 이미 만삭의 몸이 었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래 얼마나 힘들었으면 만삭의 몸으로 집에 돌아 왔겠느냐. 내가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새로 시작하자.” “여보, 고마워요.”
눈물을 훔치는 둘째 부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걱정말라고 안심시켰다. 며칠 후 그 여자는 다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인가. 여자는 야속하게도 아이를 출산하고 몸을 추스린 뒤 보름만에 다시 집을 나가 버렸다.
이씨는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니 긴 한숨이 나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 하나. 아무리 팔자라고 생각해도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나.”
그러나 눈물도 한숨도 그에겐 사치였다. 당장 우는 젖먹이 막내를 굶기지 않아야 했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야 했다.
이씨는 탄광에서 퇴근하면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들에게 분유를 타서 먹이고 병든 다섯째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 애들이 벗어놓은 옷을 손으로 세탁하고 혼자서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을 해야 했다.
하루는 8남매를 키우며 이러저런 생각을 했다. “탄광에서 받는 쥐꼬리 같은 월급만으로는 애들 학교보내기도 힘든데 무얼하지. 탄광을 때려치울 수도 없고 부업으로 무얼하나. 그래 돼지를 키워보자”
이씨는 부엌 한 켠에 나무로 돼지우리를 만들어 집과 이웃에서 나오는 잔반을 주며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5개월 후 어미 돼지가 돼 처분했는데 돈이 쏠쏠했다. 재미를 붙인 이씨는 다시 새끼 돼지 5마리를 키우다가 10마리까지 불렸다.
이씨는 돼지를 키우기 위해 탄광에서 퇴근하면 리어카를 구입해 매일 저녁마다 식당에 가서 버려지는 잔반을 수거해 돼지 키우기에 재미를 붙였다.
이후 30마리의 대식구로 돼지가 불어나기까지 그야말로 이씨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 있었다. 탄광 일이 끝나면 이씨는 돼지 때문에 일이 더 바빠졌다. 매일 잔반을 담는 리어카를 끌고 황지와 화전지역 식당을 돌며 돼지에게 먹일 음식찌꺼기를 수거했기 때문이다.
특히 눈보라가 치고 도로가 꽁꽁어는 겨울에는 태백골 집에서 2키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황지시내의 식당을 돌며 음식찌꺼기를 수거해 언덕을 오르면서 이씨는 수도 없이 미끄러져야 했다. 손과 발의 동상은 겨울이면 찾아왔다.
그의 회고담.
“영하 10도 20도가 넘는 매서운 한겨울, 눈보라치는 밤에 탄광을 퇴근한 뒤 집에 와서 아이들 저녁밥을 해주고 리어카를 끌고 돼지 잔반을 다섯, 여섯 번 운반 하고나면 보통 밤 11시가 넘었다. 어떤 날은 탄광일이 늦게 끝나 아이들 밥도 해주지 못하고 리어카에 돼지 잔반을 잔뜩 싣고 와 보면 아이들은 배가 고파 울다가 그냥 잠을 자고 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부엌에서 처량한 내 신세를 한탄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애처롭고 한심했던 시절이었다.”
고생끝에 마침내 돼지가 40마리로 불어났다. 이때 이씨는 돼지 잔반이 부족해 시장에서 버리는 생선내장까지 거둬 잔반과 섞여 먹였는데 이게 문제가 됐다.
이씨의 돼지를 산 식육점 주인들이 돼지값을 환불해 달라고 난리였다. 이씨를 향해 정육점 주인들은 “돼지고기는 비계부위가 생명인데 비곗살이 하얗지 않고 샛노란 색깔을 보이는데 병든 돼지고기를 팔아 먹은게 아니냐? 이 돼지고기는 팔 수가 없으니 돼지 값을 도로 달라”고 고함을 쳤다.
당황했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이씨는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죄송하다. 이 고기는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생선내장을 많이 먹이는 바람에 색깔이 변했다. 그러니 절반 값을 쳐달라”
흥정 끝에 그는 어미 돼지의 반값은 받지 못하고 새끼 돼지 값을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숱한 역경과 힘든 고난을 숱하게 거친 이씨는 돼지가 많이 늘어나면서 리어카로 돼지잔반을 수거하는 일이 벅차 차량을 구입키로 했다.
이씨는 돼지 다섯 마리를 팔아 50만원을 주고 중고 픽업을 구입했다. 리어카에서 픽업으로 돼지잔반 운반수단이 바뀌자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이씨는 도로가 경사진 동네는 대리점에서 연탄배달을 기피하는 것에 착안해 연탄장사를 하기로 하고 동네에 연탄을 주문받아 연탄배달을 하는 일을 시작했다.
집 처마에 조그마하게 연탄대리점 간판을 걸고 연탄배달을 하자 연탄주문이 쇄도했다. 하루에 평균 500장 이상의 연탄을 배달하자 생활이 도움이 됐다.
그는 탄광 출근 시간 전에 연탄배달을 하고 퇴근 후에는 돼지잔반 수거를 하며 1인4역의 활동을 1년 365일 하루, 한시도 쉴틈이 없이 일을 했다.
물론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이씨는 남들과 달리 탄광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출근하니 1986년 기준으로 매월 40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다.
탄광 월급과 돼지키워 버는 돈에 연탄배달로 인한 수입까지 생기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이씨는 단 하루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살았다.
이처럼 지독하게 일하는 이씨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씨는 일 때문에 아플 시간도 없지만 죽을라고 해도 죽을 시간이 없어 죽지 못하겠구려!”하며 농담을 던졌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씨를 보고 “이씨는 일에 미친 사람이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여자도 없이 혼자서 아등바등 일에 얽매여 사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루는 탄광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다섯 살짜리 막내아들이 혼자 처량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이씨는 ‘혼자 집을 보느라 밥도 못 먹고 얼마나 배가 고플까?’하는 생각에 부엌에 들어가 라면을 끓여 주려고 냄비를 찾았다.
그러나 2개나 되던 냄비가 하나도 보이지 않자 이씨는 막내에게 물었다. “부엌에 있던 냄비 못 보았느냐?” 그러자 막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배가 고파 엿장수에게 엿을 바꿔 먹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씨는 막내를 끌어 안고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고생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결과 그는 은행에 수천만 원의 예금통장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잘 아는 할머니가 찾아와 밭을 사라고 한다. “밭에 배추나 뭐든 심으면 항상 풍년이 든다. 내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착하고 일 잘하는 이씨에게 팔고 싶다”
집에서 100리 정도 떨어져 있지만 밭이 마음에 들어 밭을 구입했다. 탄광생활을 마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적당했다. 이후 이씨는 탄광일, 돼지 키우는 일, 연탄배달, 아이들 키우는 일, 밭을 경작하는 일 등 1인 5역을 했다.
모질고 힘든 세월이 흐른 뒤 이씨에게도 새로운 행복의 기회가 찾아왔다. 큰 딸과 둘째 딸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원 삼성전자에 취업했다가 괜찮은 신랑을 만나 시집을 갔다.
이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이씨는 56세가 되던 1990년 주변의 소개로 마음씨 착한 부인을 얻었다. 딸린 아이도 없으니 이씨는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이듬해 이씨는 탄광을 퇴직하고 자신이 농사를 짓던 밭과 집, 돼지, 픽업차량을 모두 처분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와 부인 등 함께 생활하는 식구들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워낙 성실하고 꼼꼼한 이씨는 서울에서도 아파트 경비일을 10여 년간 하다가 말년을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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