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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늘 '사람'이 있다

[민들레] 도시 공동체 '과천품앗이'

빈자리를 서로 채워주는

하나. 저녁 반찬으로 제철 감자를 넣은 고추장찌개와 가지찜을 한다. 오전에 품앗이 모임에서 2천 아리로 구입한 고추장과 가지가 그 재료다. 저녁 밥상을 차리면서 품앗이 도자기 소모임 활동으로 만든 큼직한 찌개 그릇과 접시에 요리를 담는다.

둘. 마트에서 생활용품을 구입하면서 꿀 한 병을 더 구입한다. 품앗이 회원 한 명이 내게 부탁한 심부름을 위해서다. 차를 가지고 다녀오는 길이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회원의 집으로 꿀을 가져다준다. 회원이 시원한 매실차를 들고나와 건네며 반가운 인사를 한다. 꿀 값을 전해 받고 아리통장을 꺼내 심부름 품으로 1000아리를 기입한다.

셋. 미용용품점에 들러 염색약과 헤어크림을 고른다. 정가의 70퍼센트는 현금을 내고 30퍼센트는 아리로 결제한다.

이 상황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일어나는 내 일상의 단편이다. 고추장, 가지, 도자기, 염색약 같은 물건을 구입하거나 이웃의 부탁으로 심부름하는 것은 누구나 일상에서 만나는 흔하고 흔한 일들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누구나 어디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김은희

'과천품앗이'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체 화폐를 매개로 네트워크를 이루며, 옛 농경 사회에서 품을 나누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지역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과천품앗이의 공동체 화폐 '아리'는 서로의 품이나 물건을 거래하는 지불 수단으로 품앗이 회원들이 서로 창출해 품앗이 가맹점에서 사용하는 화폐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생한 화폐 아리는 각자의 통장에 서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숫자로 적어두고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쓴다. 지역주민의 노동력과 물건에 일정한 가치가 부여될 때 발생하는 아리는 일상의 경제활동 일부를 대신하거나 지역 내 소상공인들이 가맹점 형태를 통해 지역화폐를 유통 가능하게 해서 상권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장점이 있다.

품앗이에는 모든 노동력과 물품, 때로는 아이디어나 기부활동 등도 포함된다. 화폐라는 매개를 공동체 안에 적용할 때 우리는 '돈'을 사용했던 경험과 개념 때문에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유통과 가치척도의 수단인 화폐가 축적과 희귀한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탓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는 경제활동을 위한 교환 행위에 감사와 신뢰를 담고 있어서, 누구나 화폐 발행권을 갖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모든 활동이 거래의 내용이 된다. 반찬 솜씨를 나누는 것, 만든 반찬을 나누는 것, 자동차를 함께 타는 것, 애완동물이나 텃밭의 채소를 돌봐주는 것, 대신 시장을 봐주는 것, 바느질법을 알려주는 것, 부모 대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 청소나 화분 분갈이를 돕는 것, 서로의 책을 빌려주는 것, 심지어 힘들 때 같이 수다를 떨거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등산길을 알려주는 것 등 일상에서 '감사'가 필요한 모든 것이 그 내용이 된다.

한번은 과천품앗이 온라인 카페에 쓸쓸한 글 하나가 올라왔다. 다섯 살, 네 살 연년생을 키우고 있고 곧 태어날 셋째가 막달인 회원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장마 즈음이었는데, 몸도 마음도 지치고 우울해서 차 한 잔 마시려니 집 안을 다 뒤져도 짝이 안 맞는 찻잔이나 투박한 머그잔뿐이란다. 예쁜 찻잔과 받침을 아리로 사고 싶다고 했다. 그 글을 올리고 있을 회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거운 몸으로 어린아이 둘을 챙기며 얼마나 힘들까? 찻잔 사러 두 아이를 데리고 나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알리고 싶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찬장을 뒤져 내가 갖고 있던 것 중 제일 예쁜 찻잔 세트를 사진으로 찍어 거래하자고 올렸다. 물론 배달 서비스까지 덤으로. 그 찻잔 세트는 몇 달 전 후배에게 받은 선물이라 (부담을 가질까 봐 그 회원에게는 오래된 것이라 했다)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회원이 행복하게 차 한 잔을 마시고 기운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그 속에는 거래만이 아니라 배려와 신뢰, 그리고 관계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카페에 올렸던 찻잔 사진을 보고 여러 회원이 부러워했다. 아마 그들도 따뜻한 공동체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이웃끼리 뭔가를 나누는 일을 아리로 거래하는 것이 야박한 듯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대가 없이 그냥 나누는 것도 좋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누군가는 받기만 하고 누군가는 주기만 하는 관계보다 상호적인 주고받음이 있는 것이 부담이 적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는 경험은 자기계발의 원천이 되고 자존감도 키워준다. 또 관계의 대상이 훨씬 넓고 다양해질 수 있다. 소소한 내 품이 많은 이에게 쓸모 있는 무엇이 되는 경험은 한 사람의 노동력의 질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자기 집에서 천연제품을 만들어 쓰던 회원이 많은 사람들과 아리 거래를 통해 경험을 넓히다가 천연제품을 파는 공방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과천품앗이의 역사


과천품앗이는 지역통화제를 본떠 만든 것이다. 세계 대공황으로 침체된 지역경제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화폐가 등장했고, 1982년 캐나다의 '그린 달러(Green dollar)'를 계기로 용어가 정의되었다. 한국에서는 IMF 직후 소개되어 여러 지역에서 시도되었으나 주춤하다가, 최근 마을공동체 개념이 확산되면서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다시 도입되고 있는 추세다. 과천품앗이는 2000년 10월 지역주민들이 공동육아를 위해 시작했는데, 정식으로 지역화폐 단체가 된 지는 16년째다.

작은 지역단체가 자발적으로 16년 동안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나눔 속에서 공동체의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천품앗이는 사무실도 없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을 받는 사람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받는 것도 거의 없지만 마치 화수분처럼 필요한 것들이 회원들의 배려로 채워지고 있다.

이사를 가거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늘 들쑥날쑥하지만, 현재 정회원은 평균 140명 내외다. 온라인 카페와 오프라인 모임이 여러 형태로 있으며, 모임을 준비하고 회원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다른 단체들과 연계하기 위해 여섯 명의 운영위원들이 활동하고 있다(월 4만 아리로 운영위원들의 수고를 가름하며, 운영위원들을 위해 지급하는 아리는 일반 회원들이 거래하면서 의무사항으로 제공하는 5%의 수수료로 만들어진다).

품앗이 회원들은 오지랖도 넓고 굉장히 부지런하다. 누군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신이 돕지 못한다면 제공될 만한 곳이나 방법까지도 열심히 찾아서 알려주고, 아리로 거래하기 위해 좀 멀어도 서로 찾아가고 찾아온다. 이런 것들이 관계를 넓히는 과정이 되어서 새내기 회원들이 한두 달 부지런을 떨면 금세 지역의 마당발이 되기도 한다.

과천품앗이에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자랑거리는 누구나 주최하고 누구나 참여하는 다양한 소모임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제안하는 책 읽기 모임, 솜씨 좋은 회원이 알려주는 요리 소모임, 뜨개질, 바느질, 요가 소모임도 있고, 어딘가 함께 다녀오고 싶을 땐 나들이 소모임도 가능하다. 아리를 사용할 수 있는 공예 가맹점을 이용하는 소모임도 있다. 과천에는 일반 상점 중에도 아리가 통용되는 곳이 있다. 한의원, 피부과, 전통막걸릿집, 미용용품을 파는 곳이나 수공예 상점, 음식점은 물론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원까지 현재 13개 가맹점에서 아리를 쓸 수 있다.

이따금 아리를 사용하는 것이 정말 가정 경제에 득이 되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며 품앗이 활동을 한다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실물 경제의 일부를 공동체 화폐로 대신할 수는 있지만, 아리를 사용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금전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아리로 거래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통장에 쌓이는 기록이 사람 사이의 정을 저금하는 것 같아서다. 그 정이 언젠가는 삶 속에서 또 다른 큰 힘이 될 거라 확신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몇 권이나 되는 아리통장을 들고 도움을 청하면 어딘가에서 해결책이 나타날 것이다.

ⓒ김은희

즐거움이 있어 가능한 거래

지난 16년을 돌아보면 외부의 지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서로 부대끼는 속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곳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품앗이 홀릭'이랄까? 공동체의 참뜻을 지키기 위해 경직되지 않고 긴장의 진동을 지키며 방향키를 잡아내려 노력했던 회원들이다. 회원들이 가진 힘의 원천은 새삼 말하지만 '즐거움'에 있다.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자발적 도시 공동체로 인정받고 있다. 품앗이 회원으로 누리는 즐거움이 없다면 이 거래는 가능하지 않다.

최근 과천품앗이의 거래를 전자화폐로 만들어 준다는 업체가 생겼다. 손으로 기록하고 있는 아리통장 거래가 갖는 약점인 투명성과 내역통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본다. 수기로 하던 과천품앗이 통장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지역에서 공유되는 지역화폐로서 공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지역 회원과 가맹점들이 많아져야 한다. 회원이 많아져야 화폐의 유통 범위가 넓어지고, 쓰임새가 다양해지니 말이다.

7년 전 품앗이 회원이 되고 나서 첫 거래를 위해 낯선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의 어색함, 약간의 설렘, 그리고 마주한 따뜻한 인연이 나를 지금으로 이끌었다. 도시 속 아파트라는 단절된 주거환경에서 관계를 확장하고 값진 가치를 나누며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기울여줄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삶은 늘 바쁘지만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하다.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불편한 시부모님을 모시면서도, 멀리 이사를 가서도 행여 잊힐까 품앗이를 찾는 이들이 있는 것은 이곳이 별나게 훌륭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군데군데 비어 있어서, 그 빈자리를 채우며 서로의 존재 의미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나는 매일 품앗이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내가 참여할 일이 있는지 찾고, 먼저 나서서 제안해볼 것들을 고민하며 설렘을 느낀다.

앞으로 품앗이를 잘 안착시켜 진정한 지역화폐 단체로 성장하고 싶고, 지역화폐를 쓰는 작은 협동조합형 품앗이 가게를 마련하고 싶다. 요즘 과천은 너무 한꺼번에 진행되는 재건축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아마도 5~6년 동안은 주거불안으로 작은 공동체나 단체, 지역 상인들이 더 힘들어질 것이다. 재건축 기간 회원들의 들고나기가 반복될 텐데, 꿋꿋하게 이 공동체를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도시 속의 소소한 행복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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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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