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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5역 광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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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5역 광부 이야기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①8남매 아버지 광부

과거 ‘석탄산업’은 국가경제와 서민경제의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초근목피’의 196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중반까지 석탄산업은 정부정책의 절대 가치였다. 월동기 연탄은 먹거리 김장과 함께 겨울철 서민들의 필수 연료였기에 정책당국은 성수기를 앞두고 매년 연탄수급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특히 ‘안전’보다 ‘무연탄 증산’이 우선인 당국과 탄광업주의 주문 때문에 광부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막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무연탄을 캐다 연간 수천명이 다치고 수백명이 사망했다. 당시 정부는 광부들에게 ‘산업전사’라는 찬사까지 쏟아냈지만 광부들의 실상은 ‘인간 두더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루종일 탄을 캐고 나와도 목욕시설을 갖춘 탄광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대다수 탄광의 광부들은 ‘고양이 세수’로 하루를 마감해야 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표현이 시사하듯 탄광촌의 열악한 생활은 질곡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광부들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광부아리랑’으로 한을 삭였다.

“니기미 씨부랄 것 농사나 짓지
강원도 탄광에는 X빨러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부리(비좁고 가파른 막장) 고개로 넘어간다

산지사방이 일터인데
그리도 할 일 없어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막장으로 들어간다

이판저판이 공사판인데
한 많고 설움 많은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탄광은 말도 많다

연탄이 서민연료인 탓에 대해 정부는 가격을 고시가로 통제했고 연탄파동이라도 나면 서민들은 연탄 구하기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국가연료정책의 급변으로 석탄산업은 합리화(폐광)로 문을 닫았고 이제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와 경동광업소 등 겨우 5곳의 탄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7만6000명이 넘었던 광부들도 이제는 400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탄광촌 광부에 얽힌 숱한 애환과 비화를 탐험하면서 아련했던 과거의 역사를 되새김질 해본다.

필자 홍춘봉 기자는 현재 프레시안 강원취재본부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탄광촌공화국 출간, 대한석탄공사 나전광업소와 경동탄광에서 광부로 3년 여 근무, 태백노동상담소 상담부장, 국회 류승규 의원 정책보좌관, 강원랜드 개장이후 카지노 분야에 심취해 세계적인 카지노산업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편집자.

▲탄광부. ⓒ주동호 작가


‘1인 5역’ 8남매 아버지 광부

해방이후 탄광촌 막장을 거쳐간 사람은 최소 수백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1980년대까지 전국 주요 탄광촌은 강원 삼척, 정선을 비롯해 경북 문경, 충남 대천, 전남 화순 등이 꼽혔다. 1994년 강원 태백시 어룡광업소 노조위원장을 지냈던 배영배씨는 광부가 된 사연을 20여 가지로 분류했다.

우선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비료값이라도 벌려고 탄광에 온 ‘농부출신’ 광부가 가장 많았다. 이어 부모에게 물려 받은 유산은 물론 배운 것도 없어 맨 몸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탄광으로 찾아와 광부가 된 사람도 상당했다.

또 이곳 저곳을 떠돌아야 하는 막노동에 비해 안정된다는 판단에 따라 광부가 되거나 학교에서 광산과를 전공해 어쩔 수 없이 광부가 된 경우도 허다했다.

어떤 사람들은 몇 개월 아르바이트 삼아 왔다가 아예 눌러 앉은 경우, 남의 집 셋방살이가 싫었거나 의료보험이 필요해서, 자녀 학자금 지원 때문에, 막장에 근무하면 군을 면제해 주기 때문에 광부가 된 사람도 있었다.

배씨의 조사에 따르면 장터를 떠도는 장돌뱅이를 하다가 정착한 경우도 있고, 취직하기가 수월해 막장을 찾은 사람도 빠질 수 없다.

아니면 부친이 광부라서 대를 이어 광부가 된 사람도 있고, 장사를 하다가 털어 먹고 재기를 위해 광부가 된 사연도 있다.

그러나 굴이 언제 무너져 저승사자에게 잡혀갈지 모르는 삭막하고 두려운 막장이 도저히 적성이 맞지 않거나 힘든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광부생활 2, 3일만에 ‘안녕’ 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탄광에서는 막장생활 3일을 견디면 광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정했다.

1934년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이연복씨는 결혼 3번에 8남매를 둔 기구한 운명을 가진 광부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씨는 고향에서 결혼한 뒤 운수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한 이씨는 가족 부양을 위해 39세가 되던 1973년 1월 강원도 탄광촌의 황지 땅을 밟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일하기를 좋아했다. 또 공부도 좋아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한 뒤 초등학교를 마쳤지만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공주 명륜야간중학교에 고학으로 다녔다.


낮에는 목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생으로 즐겁게 공부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학교가 불타버려 학업을 중단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며 학업을 계속했다.

세월이 흘러 군에 다녀 온 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운수업을 했지만 자본과 경험 부족 등으로 5년을 버티지 못하고 실패했다. 돈 들이지 않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장으로 탄광을 생각했다. 그래서 강아지가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탄광촌 황지를 찾았다.“

그는 대전에서 열차를 타고 제천, 영주를 거쳐 삼척군 황지읍 통리역에서 내렸다. 통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마지막 기착지인 황지로 와보니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가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황지 시가지에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길에는 버스 지붕만 보이더라. 그런 광경을 보니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험준한 산골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니. 또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걱정이 앞섰다. 황지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6시경이었는데 얼마나 추운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도로 주변에 가게도 있고 시장도 보였다. 또 탄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황지에 살고 있는 고향 사람인 한성광업소 명계장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명계장은 탄광 취직에 필요한 주민등록등본과 신원증명서를 갖고 왔느냐고 물었다.


탄광에는 몸만 멀쩡하면 서류도 없이 취업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바보처럼 취업에 필요한 서류조차 준비하지 않고 먼 길을 달려 온 것이다.

명계장에게 아침을 얻어 먹고 다시 고향에 가서 서류를 준비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통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동전 몇 푼이 남아 있어 대전에 돌아갈 차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그는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프레시안(홍춘봉)

그의 회고.

“고향에 가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보니 불과 몇 백원이 손에 잡혔다. 그 돈으로는 대전은커녕 영주까지 갈 차비가 부족해 완행열차를 타기로 했다.

통리역에서 급행열차를 보내고 나니 화물열차가 왔다. 나는 화물열차 차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화물열차 차장실에 함께 탑승했다.

돈 한 푼 안들이고 대전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탄 화물열차가 영주방향으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가는게 아닌가.

이상해서 차장에게 물어보니 화물열차는 강릉으로 간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그는 차장에게 “영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데 내려서 다른 열차를 타야 하니 다음 역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탄광부. ⓒ주동호 작가

그러나 차장은 “이 열차는 역마다 정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급해진 이씨는 차장에게 사정해 가까스로 나한정역에서 내렸다. 나한정역에서 이씨는 역무원에게 사정을 말했다.

“충남 공주에서 황지 탄광에 취업하려고 왔다가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향에 서류를 떼러 가야 하는데 차비가 한 푼도 없다. 이 겨울에 고향에 못 가면 얼어 죽게 생겼는데 제발 도와 달라. 은혜는 잊지 않겠다”

마음씨 착한 역무원은 그런 이씨를 다음 열차에 무료로 태워 줬다.

아침만 먹고 점심과 저녁을 굶은 이씨는 주머니에 있는 10원을 가지고 열차에서 파는 라면땅 하나를 사서 허기를 달랬다.

이런 우여곡적을 겪은 끝에 그는 대전을 거쳐 공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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