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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은 노동자를 어떻게 길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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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은 노동자를 어떻게 길들였나

[밀려나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 上] 반복되는 하청 노조의 비극

"두려움과 체념, 절망을 딛고 사내 하청 노조와 함께 하자."

2003년 9월 1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현대중공업 3도크 옆 종합식당에서 하청 노조설립보고대회가 열렸다. 하청 노조가 설립됨을 알림과 동시에 가입을 독려하기 위한 자리였다. 현대중공업에서 하청 노조가 설립된 지 일주일이 지난 즈음이었다.

그날 보고대회는 조성웅 위원장, 이승렬 사무국장, 송충현 회계감사 등 사내 하청 노조 간부들이 참석했지만, 이미 그들 신분은 해고자였다. 노조가 설립된 것을 안 현대중공업 원청은 이들 간부들이 속해 있는 업체들을 모두 폐업처리했다. 노조 간부들은 이날 보고대회를 열기 위해 회사 몰래 공장에 잠입해야 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하청 노동자들이 이날 대회에 손뼉을 치는 것은 고사하고 참석하기도 쉽지 않았다.

ⓒ정기훈

체로 걸러내듯 솎아낸 하청 노조원들

현대중공업 사측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중적 차별 고용관리 전략을 짰다. 하청 노동자 비중을 확대하면서 고용조절, 비용절감 등을 꾀했다. 반면, 원청 노동자에게는 회유 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1990년 1998명에 불과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는 2004년에는 1만2276명으로 6배나 증가했다.

그러면서 원청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무를 하청 노동자가 담당하게 됐다. 전체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일하는 공정은 도장 공정으로 1만9079명(16.7%)에 달한다. 도장은 도료 등 유해 물질을 취급하는 데다 밀폐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폭발 및 질식 위험이 있어서 조선소에서 가장 유해하고 위험한 작업 중 하나로 꼽힌다. 과거부터 원청 노동자들이 가장 꺼리는 업무 중 하나다.

임금과 복지 혜택에서도 차별을 두었다. 통상 임금 외에 각종 수당과 상여금, 직원 복지 제도의 격차를 고려하면 사내 하청 노동자의 급여 수준은 정규직의 40~60%에 불과했다. 연말 경영성과급도 차등 지급됐다. 반면, 산업재해로 죽는 하청 노동자의 수는 늘어 갔다.

하청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자기들도 노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 2003년 8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이 결성됐다.

하지만 모든 게 쉽지 않았다. 기본적인 노동조합 활동도 보장받지 못했다. 하청노조 조합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곧바로 해고됐다. 아니면 소속 업체가 '경영상의 이유'로 문을 닫아 자연스럽게 해고자가 됐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노조 설립 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한 뒤, 신고서에 적힌 노조 임원진과 조합원 10여 명이 소속된 업체는 폐업처리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장으로부터 분리된 노조 간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1만여 명의 하청 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 촉구 전화를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현장에 팽배한 반노조 정서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다. 해고자 신분이니 재정적으로도 활동이 불가능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노조 설립 이후 100여 명의 하청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했다. 그간 쌓여왔던 불만의 결과였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노조에 가입한 100여 명의 하청 노동자가 소속된 업체들의 폐업이 연이었다. 원일기업(건조3부), 명호산업(가공5부), 원광산업(중전기) 등 노조원이 있는 곳이면 어김 없었다. 체로 걸러내기 식이었다. 그렇게 해고된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불가능해졌다.

ⓒ정기훈

하청 노조 조직되고도 10여 년간 지지부진

회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1987년 원청 노조의 탄생과 이후 투쟁 과정을 지켜본 사측 입장에서는 하청에서마저 노조가 생기는 것은 막아야 했다. 현대중공업이 지속해서 노조 회피, 그리고 방해 전략을 펼친 이유다. 이후에도 노조 활동을 하는 이들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이어졌다.

하지만 과하면 넘친다고 했던가. 그 와중에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게 그의 유언이었다. 2004년 2월 14일이었다. 이것과 더불어 소지공들의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회사의 일방적인 발표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10여 개 하청업체 150여 명 하청노동자가 공개적으로 노조에 집단 가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일수 씨 장례식 다음 날,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됐다. 역시 체로 걸러내는 방식이었다. 조합원이 있는 업체를 폐업한 뒤, 그 업체에서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는 다른 업체에 취업시켜주는 식으로 해고가 진행됐다.

이런 철저한 '응징'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울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하청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다른 하청 노동자들에게도 각인돼 있다. '노조에 가입하면 울산에서 밥 못 벌어 먹는다' 이런 정서가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2014년 현대중공업 원청과 하청 노조가 하청 노동자 14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이들 중 36.5%는 '노조에 가입할 의향이 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해고와 블랙리스트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이 61.7%에 달했다. 노조에 관심이 있어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현실 조건이 큰 장벽인 것이다. 하청 노조가 조직되고도 10년 넘게 조직화 사업이 지지부진한 이유다.

여전히 반복되는 노조 탄압

문제는 현재도 이러한 방식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현재 실체가 없는 경영위기를 빌미로 현대중공업 원청은 하청 업체폐업 등을 통해 하청 노조를 무력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4년에 벌어졌던 일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지난 9일에는 관련해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 관련기사 : "현대중공업, 하청노조 파괴 시나리오 가동")

그나마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조가 2014년부터 공동으로 하청 노동자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한순간에 날아 갈 판이다. 하지만 하청 노조로서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게 농성이나 기자회견 정도다. 하청 노조의 상황은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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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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