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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지역은?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저장 경제 발전의 사상적 토대가 된 절동실학(浙東實學)

저장 성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수식어들이 있다.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까지도 균등하게 산업 발전을 이룬 곳. 제조업에서 서비스업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고른 발전을 이룬 곳. 전문화된 시장의 발달을 이룬 곳. 이와 같은 수식어들이 저장 성을 중국의 여타 지역보다 더욱 빛나게 하는 특징이다.

전국에서 수위를 놓치지 않는 저장 성의 각종 경제 지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전국 각 지역의 경제 종합 경쟁력 조사에 의하면 저장 성은 장쑤, 광둥,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전국 5위를 차지했다. 또 2012년 전국 28개 성급 지역의 도시 주민 1인당 평균 소득 조사에서 저장은 2만6682위안(한화 약 450만 원)으로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전국 3위를 차지했다. 저장 성은 평균적으로 잘 사는 지역인 것이다.

저장의 빛나는 상업 전통

저장 성의 눈부신 발전의 배경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상업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사자성어의 기원이 된 월나라 왕 구천(勾踐)을 모시다 거상이 된 범려(范蠡)는 지혜로운 문재신(文財神)으로 후대의 추앙을 받고 있다. 당시의 월나라가 바로 지금의 저장 성 일대이다.

해외 무역에 있어서도 저장 성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당나라 때 닝보와 원저우는 유명한 무역항으로 신라, 왜 등과 무역을 진행했다. 남송 때는 항저우, 닝보, 원저우 등지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관직을 두어 해외 무역을 전담시켰을 정도로 해외 무역이 성행했다.

그뿐 아니다. 중국의 10대 상방(商幇) 중에 저장 성은 2개의 상방 이름을 올려놓았다. 닝보(寧波)의 용상(甬商)과 취저우(衢州)의 절상(浙商)이 그것이다. 닝보상인 용상(甬商)은 중화민국 시대에 크게 성장해서 유럽에까지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한 바 있다. 저장 성 중서부의 취저우를 근거지로 활동한 절상(浙商)도 닝보 상인과 더불어 저장의 양대 상방으로 활약했다.

저장 성의 상업 전통은 개혁 개방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발현되고 있다. "시장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저장 상인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저장 상인의 개척 정신과 확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국 각지에 저장 촌(浙江村), 원저우 성(溫州城), 이우로(義烏路), 타이저우가(臺州街) 등 저장 성 지명을 딴 저장 상인 집단 거주지가 100여 곳이나 된다. 전국 각지에 저장 상인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다.

저장 성이 상업적으로 발달한 데는 중국의 정치경제 중심지의 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원나라에 밀려 남쪽 항저우로 도읍을 옮긴 남송 시기, 정치경제의 중심지는 황하 유역의 중원에서 장강 유역으로 이동했다. 지역의 특수성도 상업 전통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장강 유역은 운하와 육로가 사통팔달로 연결된 교통의 중심지다. 어렵지 않게 전국적인 상업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저장 성을 상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 저장 성 성도인 항저우에 있는 절상박물관. 저장 상인의 상업 철학을 계승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 ⓒwikimedia.org

저장 성 자본주의 발전의 뿌리, 절동실학(浙東實學)

정치경제적 조건과 더불어 저장 성의 상업 발전을 이끈 배경에는 사회 문화적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시장을 찾아 실리를 추구하는" 무실(務實)의 전통은 저장 성을 한층 부유하게 만들었다. 실리를 추구하는 무실의 전통은 지난 날 저장 성 일대를 풍미했던 절동실학(浙東實學)에 그 바탕을 둔다.

남송 시기 정치경제의 중심이 장강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장강 유역은 상업과 해외 무역이 특별히 성행하게 되었고, 백성들의 직업관, 소비관 등 경제 관념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무실을 중시하고, 실리를 추구하며, 경세치용을 강조하는" 절동실학이 형성되었다.

절동실학은 도덕 윤리와 경제 이익 간의 관계를 분명히 정리했다. "공리(功利)가 없는 도의(道義)는 쓸데없는 허언"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익(利)은 정의(義)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이익(利)은 정의(義)를 이루는데 기초가 된다고 설파했다. 즉 부를 쌓고 이익을 얻는 행위에 대해 합리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이(利)와 의(義)를 통일시키고 있다.

전통 유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의(義)를 으뜸에 두었다. 논어에는 "군자는 의(義)를 구하고 소인은 이(利)를 구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상업을 이(利)를 구하는 말업(末業)으로 천시하였다. 하지만 절동실학은 공자의 말을 "의(義)에서 벗어난 이익의 추구를 경계하라"는 경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의(義)와 이(利)는 결코 충돌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농억상(重農抑商)에 반대하고 상업 이윤의 보호에 앞장섰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모두 전체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러나 그런데도 오히려 상공업을 억제하고 농업만을 장려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농업이 근본이고 상공업이 말업(末業)이라는 유가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부민(富民)은 부국(富國)의 기초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민이 부를 추구하는 것을 억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가의 부민론은 절동실학을 통해 크게 발전했으며, 명청 시대를 비롯한 후대의 상인 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사구시와 경세치용'을 강조한 절동실학은 저장 상인의 공리주의적 정신, 가치관, 그리고 상업 문화를 형성하는 정신적 원류가 되었다. 저장 상인의 정신에는 생존을 위한 물질 욕망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위해 근면 검소하고, 직분에 충실하고, 정당하게 재물을 모으는 우수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상업 윤리가 내재되어 있다.

개혁 개방 초기 저장 성은 국가 투자가 빈약했고, 1인당 경지 면적도 전국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자원이 결핍된 지역에 속했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이 흐른 지금 저장 성은 GDP, GNP, 재정 수입, 대외 무역 등의 지표에서 여러 해 동안 전국 최고 그룹을 차지했다. 전통 시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인구에 회자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저장인의 피에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상인 기질과 상인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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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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