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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에 변화를 꾀하다

[민들레] "세상에 내보내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동네를 쏘다니던 아이, 지리교사가 되다

1980년대 서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어린아이치고는 꽤 넓은 공간을 인식하며 자라났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와우산과 산동네, 신촌이라는 부도심과 재래시장, 홍대-연대-이대 앞 대학가 같은 곳이 내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열심히 뛰어놀며 동네를 쏘다녔다. 중학교 때 지리 선생님은 그런 내게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주셨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되면 지도를 펼쳐놓고 세계 곳곳을 찾아보게 하셨고 동아리 시간에는 동네 시장통을 돌면서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관찰해 지도를 그리게 하셨다. 더 깊숙한 서울 도심까지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주변 경관을 살펴보는 활동도 했는데, 그 경험은 참 새로웠다.

그 덕분이었을까?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사춘기 때, 울컥하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곤 했다.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봤고,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머릿속에 꽉 차 있던 내 걱정거리가 별거 아니게 여겨져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교실이 감옥 같았다. 칠흑 같은 새벽어둠을 뚫고 등교해서 밤 10시에 하교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으니까.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다. 재수를 안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지리교사가 되었다. 지금도 전국지리교사모임 선생님과 답사를 다니며 뭔가 새롭게 알게 되거나 좋은 풍경을 보면 '우와' 탄성을 지를 때가 있다. 전국 곳곳에 '학생들과 함께 오면 참 좋겠다' 싶은 것들이 천지다. 집과 학교, 학원을 도는 요즘 아이들에게 '관광'이 아닌 '여행'의 참맛을 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가이드나 조교의 안내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관광 말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거리를 걷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능동적인 여행을 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장소에 가나 똑같은 숙소에 단체로 머물며 밤이 되면 강제 취침을 당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아침에 눈 뜨면 상쾌한 바람을 맞고 밤이 되면 별을 보며 친구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그런 여행이면 얼마나 좋을까. 교과서에 갇혀 있던 지식을 살아 있는 지식으로 만들어보는 여행이면 얼마나 좋을까.

꿈이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꿈인 거지. 가능한 범위에서 한번 해보는 거다. 그러다 보면 꿈에 서서히 다가가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나는 우리 반부터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 전라북도 무주 '태권도공원' 전망대에서 찰칵! ⓒ윤신원

1999년에는 학급 아이들과 통일을 주제로 강원도 철원, 연천 일대를 다녀왔다. 당시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하던 학급여행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해 교실 밖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다(그 당시만 해도 '체험활동'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교장선생님을 설득하느라 엄청 애를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무작정 '김포농민회'에 전화해서 아이들과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가고 싶다는 아이들 몇몇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땀 흘려 일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삽질을 처음 해보았다며 그때의 경험을 깊숙한 추억으로 새기는 듯했다.

그다음 해에는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이 또한 무작정 전화해서 도움을 청했다) 경기도 팔당호를 중심으로 '한강사랑' 체험활동을 했는데, 보트를 타고 팔당호 가운데로 들어가서 수질 측정까지 해보았다. 물론 아이들은 수질 측정보다 물살을 가르는 보트 타기를 더 재밌어했다.

또 어떤 해에는 사회(지리)수업 수행평가로 지역조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고1 전체 아이들을 모둠별로 내보내 주제를 주고 지역조사를 하게 했다. 아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지형을 살피고, 지역성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고, 인터뷰나 설문을 하고, 자료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 발표했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이 없으니 어쩔 줄 몰라 했고, 삼삼오오 모여 의논하다 의견이 안 맞으면 싸우기도 했지만, 마지막엔 그 결과를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야간 자율학습과 학원 시간을 빼앗는다고 학부모들에게서 항의 전화가 오기도 했지만 (아무리 주말을 이용하라고 해도 아이들은 학원과 야자를 빼먹고 가는 걸 훨씬 좋아한다), 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야자 몇 시간보다 이 활동이 더 큰 교육이라고 믿었으므로.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이런 교육의 효과는 몇 년, 아니 몇십 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수학여행과 수련회에 변화를 꾀하다

교과나 학급운영에서는 나름대로 재량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2박 3일, 3박 4일의 수학여행. 우리 학급만이 아니라 한 학년이 단체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의 의미 있게 진행해보겠다고 코스별 자료집을 만들고, 사전교육을 하고, 아이들에게 자기가 다녀온 코스를 지도에 표시해보게 하는 미션을 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새로운 것을 보았다고 흥분했다.

2009년에는 마음 맞는 후배 교사와 의기투합하여 제주도 수학여행에 반별 올레길 걷기 코스를 넣었다. 선생님이 귀찮게 한다고 투덜대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올레길이 생소하던 시절, 두 학급씩 묶어 긴 시간 길을 걸어보는 것은 모두에게 모험이자 설렘이자 두려움이었다. 대형버스에 오르내리며 빤한 관광지를 우르르 찍고 다니는 여행만 했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아이들은 두 발로 걸어 제주를 만났다. 해안가 주상절리에 올라 사진도 찍고, 용천대를 가까이서 직접 보기도 하고, 웅장한 해안 절벽 아래를 걷고, 민가 돌담 사이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제주의 속살을 보았다. 무엇보다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면 되니까.

수학여행도 그렇지만, 수련회는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교들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이 뭘 하는지 기웃거리는 게 교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던 중 2013년 좋은 기회가 왔다. 2학년 서너 개 학급씩 따로 이동하는 농촌 체험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육청의 요구로 급작스레 단체 수련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이 수학여행 1회, 수련회 1회라며 단체 수련회로 가지 않으면 지원을 못 해주겠다고 했다). 부장 선생님께 계획 변경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더니 그럼, 독자적으로 진행할 학급은 해보라고 하셨다. 대신 담임이 모든 걸 책임지고 그에 따른 행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나 혼자 선택하고 혼자 책임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학급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 우리 반만 따로 가보지 않겠느냐고…. "망할 수도 있어. 잘 돼도 같이 잘 되는 거고, 망해도 같이 망하는 거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다른 반과 수련회를 같이 갔을 때와 우리 반만 따로 갔을 때의 장단점을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가능한 공정하게 설명했다.

"자, 어떡할래?"

아이들도 담임의 제안이 황당했을 거다. '우리 반만 따로?' 잠시 망설이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의견을 냈다.

"수련회는 가봐야 빤하잖아요, 우리끼리 한번 해봐요."
"좋아요. 따로 가요!"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담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녀석들이니 믿고 함께 가보자. 내 평생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다.

14개 학급 중 우리 반만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 미리 소문이 나서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 계획이 혹시나 좌초될까 싶어 아이들에게 입단속을 했다. 중간고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다른 반 친구들에게 일절 수련회 얘기는 하지 않기로. 이런 결정은 개방적인 학교 문화와 교사들 간의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부장 선생님께서 일차로 허락해주셨고,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도 흔쾌히 해보라 하셨다(사실 속으로는 흔쾌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무리수가 따르는 일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사실 인솔보다 동료 교사들이 마음 상할 일이 더 걱정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과 비교해가며 담임선생님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면 어쩌나.

하지만 늘 그렇듯이 뭔가 시도해보지 않으면 다음에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내게 더 큰 자신감이 있었다면 다른 반도 같이 가자고 했겠지만 처음 해보는 거라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책임질 수 있는 우리 반만 가기로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혼자서는 위험하다며 선생님 한 분과 같이 갈 수 있게 해주셨고, 마침 지리교과 교생 선생님까지 합류해서 든든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수련회 당일, 우리는 운동장에서 안 보이는 후문 쪽에 버스를 오게 해서 우리 반만 조용히 따로 출발했다.

아이들 서른여섯 명과 교사 셋. 단출하게 떠난 체험활동을 위해 아이들과 거의 한 달 동안 준비를 했다. 수소문 끝에 강원도 정선의 '개미들마을'로 숙소를 정하고, 다양한 체험활동과 답사 코스를 넣었다. 적은 인원이라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시도했다.

하천가 소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진 입소식부터, 폐교 앞에서의 바비큐 파티, 숙소 앞에서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이어진 대화…. 한밤에 펼쳐진 장기자랑에서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주인공이 되어 참석했다. 청각장애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한 친구가 생전 처음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아이들이 두 손을 위로 올려 흔들어주며 호응해주었다. 각자의 방으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숙소 앞에 모여 앉아 밤늦도록 별빛 아래 대화를 나누었다. 불빛도 없고, 가게도 없고,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강원도 정선·사북·영월로 떠난 2박 3일의 특별한 여행은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매 순간 배움이었고, 감동이었다. 그 여행은 교사인 내게도 평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되었다. 출발 후 이 사실을 안 다른 반 아이들은 우리 반을 무척 부러워했다. 친구들끼리 문자로 여행 내용이 실시간 비교가 되고 있었다. 그러지 말자고 타이르기는 했지만 숙소, 음식, 체험 모든 면에서 한 반이 선택해 움직이는 여행과 열세 개 학급이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돌아오니, 자연스레 다음에는 전체가 다 같이 가는 수련 활동은 가급적 피하자는 평가가 이어졌다.

▲ 작은 단위로 움직이면 농촌마을에서 직접 채소를 따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윤신원

그러던 중 작년에 내가 고2 수련회를 총괄 진행하게 되었다. 2013년 강원도 여행에서 아이들이 내게 주었던 믿음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2학년 담임선생님들께 열세 개 학급이 함께 다른 여행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기존의 수학여행과 수련회에 계속 문제제기가 되던 시기였다.

한 학년이 여섯 개의 농촌체험마을로 흩어지자는 계획을 세우고 1월에 몇몇 선생님들과 강원도와 전라북도로 답사를 다녀왔다. 수차례에 걸친 담임 회의에서 마을별로 함께 갈 학급을 정하고, 일정을 짜고, 예산을 책정하고, 2차로 팀별 답사를 다녀왔다. 학생들은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일주일간 준비를 했다.

드디어 수련회를 떠나는 날, 두세 개 학급씩 묶어 강원도 횡성, 정선, 영월, 전라북도 완주, 무주의 시골마을로 각자 흩어졌다. 수학여행과 농촌 체험활동을 결합한 형태의 소규모 테마체험활동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공정 여행'을 경험해보게 했다. 방문지역의 자연환경과 역사, 경제, 문화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는 여행을 경험하고, 그 여행을 통해 맺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지속 가능한 여행을 지향했다. 숙식은 농촌마을과 현지 식당을 이용해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고, 가능한 한 끼는 재래시장에서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게 했다. 역사 등 인문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동선을 함께 배치했다. 마을 분들이 애써주셔서 저렴한 경비로 풍성하고 행복한 여행이 꾸려졌다. 아이들에게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여행이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한 아이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우리가 이번에 떠난 여행은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도움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신 이장님부터 버스 기사 아저씨, 식당 아주머니와 식구들, 장터 어르신들과 레일바이크 안내원 형까지."

구석구석 발 디디며 꿈꾸는 여행

여행을 뜻하는 '트래블(travel)'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고통, 고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이란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종교 순례를 위해, 자신의 한계에 맞서기 위해 떠났다. 낯선 지역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생소한 경험을 통해 타인과 타문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기성찰을 하며 도전 정신을 기르는 과정이 여행이다. 제대로 된 여행은 관계를 형성하며 성숙한 자아를 만들고 배움을 통해 성장을 독려한다. 특히 어릴 때 경험한 여행은 자존감을 굳건하게 세우고 행복한 자아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여행'을 제대로 누려보는 경험을 주고 싶다. '아이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게 위험하지 않으냐'고, '사고가 나면 어쩔 것이며 그걸 누가 책임지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른들의 과보호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제대로 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우리에 가둬두고 기를 수 없다. 세상에 내보내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키면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갈 때마다 늘 시간을 할애해 각종 위험요소에 대해 교육한다.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사고가 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여행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천방지축 남학생들이지만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듣는다. 아이들은 이미 '함께하는 여행'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꿈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고, 더 넓은 세상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구석구석 발로 걸으며 재잘재잘 서로의 꿈을 확인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아이들과 여행을 하는 이유다. 이런 꿈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지리교사'인 것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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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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