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40년 정치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일본은 피해자일 뿐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공부하기 바란다. 특히 한국과 중국에 대한 외교를 진지하게 생각해 바른 자세로 임해주면 좋겠다"고 일갈했다.
1990년대 초중반 길지 않았던 '동북아 데탕트'의 신호탄이었던 이른바 '고노 담화'의 주인공의 이같은 발언은 극우적 성향이 강한 아소 다로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일본 뿐 아니라 때 아닌 '역사 재평가' 우풍(右風)이 불어 닥친 한국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야자와와 고노가 뿌린 씨앗
지난 1993년 8월 당시 미야자와 정부의 관방장관이었던 고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군의 직·간접적 관여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으로, 한·중·일은 물론 국제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남겼다.
물론 이는 고노의 '고독한 결단'은 아니었다. 1991년 11월 집권한 미야자와 당시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 사죄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1992년 1월 한국을 방문해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진상 조사를 약속한 것이 바로 고노 담화로 이어졌다.
미야자와 총리와 고노 관방장관의 행보에 대해 자민당 강경파는 물론이고 일본 보수진영의 질타가 이어졌음은 당연지사. 결국 미야자와는 1993년 8월 비자민당 연정인 호소카와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면서 자민당 38년 연속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소신 행보는 오히려 자민당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호소카와와 하타라는 괴걸들에게 10개월 간 정권을 내줬지만, 자민당은 1994년 사회당과 연정이라는 상상밖의 결단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사회당의 우경화와 더불어 미야자와 내각이 보여준 자민당의 진보화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희대의 대연정은 성사가 될 수 있었다. 사회당-자민당 연정의 무라야마 총리는 1995년 담화에서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현하며 아시아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일본 총리의 이같은 사과는 그로부터 2년 전 고노 담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셈이다.
'고노 효과'
물론 이같은 동북아 데탕트는 불과 3년 여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어설프게 최초 집권에 성공한 사회당은 자민당에 휘둘려 제 색깔을 잃어버리고 아예 당 간판을 내려 사민당이라는 이름으로 맹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당의 파트너이자 우경화에 대한 방파제였던 총평(일본 노동조합총평의회)이 고임금과 노동안정성을 어느 정도 획득하자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이유와 마찬가지다.
40년 동안의 정적이었던 사회당과 한국의 민주노총 격이었던 총평을 연정과 경제발전이라는 개미지옥에서 녹여버린 자민당은 다시 제 색깔을 드러냈다.
이후 자민당 계파 정치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미야자와와 고노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됐고 21세기 이후 일본은 급격한 우경화 행보를 걸었다. 한국 만큼이나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에도 일본 노동계의 조직적 반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후의 맥락은 이정도로 각설하자. 다만 자민당이 부활에 성공한 밑바탕과 그 후 유감없이 보수본색을 드러낼 수 있었던 데는 당 내 진보파인 미야자와와 고노의 공이 지대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이런 까닭에 정계를 떠나는 고노의 마음은 편해보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강제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지난 해 아베 당시 총리의 발언 이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1993년 담화에 대해 고노는 "매우 중요한 담화였다"고 재확인했다.
또한 "담화를 부정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문제가 일어나고 아시아와 네덜란드 등에서도 (일본 규탄 결의문이) 채택됐다. 그때 일본 정치는 무엇이었느냐라는 말을 듣는 게 매우 아쉬웠다"고 토로했다.
자민당 주요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소식이 줄을 잇는 올해 8월15일에도 그는 "(일본군의) 비인도적 행위로 인권을 침해당하고 심신에 깊은 상처를 입고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는 분들에게 다시금 마음으로부터 위로를 드린다"고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질타했다.
<산케이신문> 같은 경우에는 "안이한 정치적 타협과 무엇이 강제의 주체인지 모호한 문장으로 일본의 명예를 상처 입힌 고노는 은퇴하기 전에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했어야 했다"고 떠나는 고노를 질타했지만, 고노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일본 국민들이 자민당 장기 집권을 용인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일본의 야당과 민중 진영 입장에서는 나카소네 같은 일본군 출신 강경보수파보다 고노나 미야자와 같은 인물이 더 큰 걸림돌이었으리라.
한국 보수에는 '고노'가 있나?
그렇다면 2008년 한국, 보수와 한나라당에 고노라고 부를 만할 인물을 누가 있을까? '전교조 없는 나라에 살고 싶어요', '4.3 사건은 좌익 반란', '전두환 정부는 친북좌파에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국 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등 한국판 '새역모'의 주장이 횡행하는 한나라당에서 고노의 절반이라도 따라가는 식견을 갖추고 숨통을 틔우는 인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체제와 제도의 급변을 꺼리는 것이 보수의 생래적 본능이라지만, 유독 로베스피에르식 공포정치를 통한 '뒤집기'를 더 선호하는 한국 보수진영 전반의 문제일까? 아니면 자민당 따라가기도 벅차 보이는 한나라당의 문제일까?
그게 무엇이건, '고노 효과'가 일본에서 입증된 것이라면 한국에서는 '퇴행적 효과'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권력의 균형추 역할을 할만한 양심세력이 없는 보수진영이기에, 지리멸렬로 따지면 1, 2등을 다투는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그나마 희망을 걸고 있으니 말이다. 서로 간에 '무서운 적'이 없는 한국의 정치지형에 고노와 미야자와가 던진 메시지는 그래서 가벼이 넘어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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