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한의사가 그것도 몰라? 척 보면 알아야지."
저와 처음 만난 할머니는 이 말과 함께 손목을 척 내밉니다.
"할머니, 맥만 짚어서는 환자의 어디가 아픈지, 그리고 왜 아픈지 알지 못해요. '척 봐서 다 아는 사람'을 원하시면 무당을 찾아가셔야죠."
간혹 이런 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저의 실력을 시험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맞춰봐라'는 태도로 상담 받는 분이 있지요. 소문이나 드라마, 혹은 책에서 습득한 단편적인 지식으로 한의학을 오해하거나, 그간 치료를 받아오면서 의사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 실력 있는 의사를 선별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환자를 보고 아주 짧은 순간에 병을 알아내고 치료하는 의사도 있을 것입니다. 특정 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증상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지요. 오랜 경험으로 특정 병증의 패턴을 짧은 시간에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진단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적 진단에는 '망문문절(望聞問切)'이라는 네 가지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보고, 듣고, 묻고, 만져본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방식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감각 기관과 의학적 지식을 동원한 문답으로 환자의 병증을 밝혀가는 작업입니다. 요즘 한의학계와 의학계가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의료 기기 문제도 환자들 들여다보는 수단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간단하죠. 여하튼, 진맥은 이 네 가지 중 손의 촉감을 이용한 절진의 한 가지에 속하는데, 이 부분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한의사의 진단이라 하면 맥을 짚는 게 다인 것처럼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맥진만으로 환자의 병을 파악하기란 어렵습니다. 진단은 병을 가진 사람과 증상을 시공간적으로 파악하여 환자와 병의 입체적인 지도를 그리는 작업인데, 늘 변화하는 맥만으로 병세를 판단한다면 오류 확률이 큽니다. 따라서 지금 드러난 병을 알고, 왜 발병했는지를 밝히고, 병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일정한 원리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한의학적 원리로 병에 관한 정보를 해석하는 작업이 바로 한의학적 진단인 셈이지요.
그러면 왜 '척 보면', 혹은 '맥을 딱 짚어보면 안다'는 오해가 생긴 것일까요? 한의학을 다룬 매체의 영향도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메디컬 드라마가 수술실과 응급실 장면이 없으면 김이 빠지는 것처럼, 한의사가 나오는 드라마가 맥을 짚어 병을 아는 장면이 빠지면 재미가 덜하지요.
드라마는 진맥의 배경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드라마의 묘사가 완전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의원의 의사가 왕실 일가를 진단한다고 했을 때, 그는 환자가 태어나면서 겪은 모든 기록과 가족력, 그리고 환자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대소변을 봤는지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자의 건강 상태에 관한 정보가 매일 업데이트 되고 축적된 상태지요. 이 상황에서 어떤 증상이 두드러졌을 때는 맥진에서 얻은 정보가 유의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나 가족의 상태를 주치의가 오랫동안 봐 왔고 알고 있다면, 맥진의 유의성이 좀 더 커지지요.
저에게 "척 보면 알아야지"라고 하신 환자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뭔가 불편한 얼굴이더니, 그 날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저의 설명이 그 분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부족했겠지요. 하지만 '척 보면 아는' 식의 진단이 한의학을 합리적 의학이 아닌 신기한 무엇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의사가 자신의 병증을 한 번에 보고 알아주길 바란다면, 평소 그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게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의사도 환자를 잘 알 수 있고 겉으로 드러난 병에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료는 스무고개 게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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