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이 8일 생전 퇴위 의향을 밝혔다. 일왕의 생전 퇴위는 에도 시대 후반기인 1817년 고가쿠 일왕 이후 약 200년 만의 일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개헌 움직임과 맞물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일왕의 거처인 도쿄 '황거'에서 사전에 녹화해 이날 오후 3시에 발표된 대국민 메시지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차츰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생전 퇴위 의향을 우회적으로 표명했다.
일왕은 이날 메시지에서 '퇴위'라는 직접적 표현은 쓰지 않았다. 현행 일본 헌법이 일왕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며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있어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를 발표하면 정치 행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족의 신분이나 왕위 계승을 규정한 법률인 '황실전범'에도 생전 양위를 규정한 절차가 없다. 양위를 위해서는 전범 개정이 필수적이지만, 전문가 자문을 거쳐 개정안을 마련하기까지는 1~2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에 따라 일본 언론은 이날 일왕의 메시지를 사실상 조기 퇴위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황실전범 개정보다 아키히토 일왕에게만 적용되는 특례법을 제정해 생전 퇴위를 가능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 양위가 이뤄질 경우 장남으로 왕위 계승 1순위인 나루히토(德仁. 56세) 왕세자가 새 일왕에 즉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왕 생전 퇴위, 진짜 이유는?
아키히토 일왕은 스트레스성 위염과 십이지장염에 이어 2003년 전립선암 수술, 2012년 2월 협심증 증세에 따른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일왕이 대국민 메시지에서 건강상의 이유를 언급했으나 업무 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어서 이는 표면적인 이유라는 풀이다.
일본 언론들은 일왕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퇴위를 결심한 이유로 일본 헌법에 명시된 '일본국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에 결함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1946년에 제정된 현행 헌법은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반한다"고 명시해 일왕의 지위를 '상징적 존재'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와 자민당이 지난 2012년 내놓은 개헌안 초안에 따르면 일왕의 지위는 '일본국의 상징'에서 '원수'로 바꾸는 등 실질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베 내각은 일왕을 신격화해 국가 총동원 체제를 구축했던 1889년의 '일본제국 헌법'으로 회귀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또 아베 내각의 개헌안은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설정해 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한 현행 헌법 9조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일본 언론들은 아키히토 일왕이 아베 내각이 추진하는 개헌에 불안을 느껴 생전 퇴위 입장을 표명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 의사 표명 소식이 처음 알려졌던 지난달 14일 일본 인터넷 매체 <빅글로브>는 "국왕의 생전 퇴위 의지 표명은 아베 정권의 개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일왕은 지난달 13일 우경화 행보를 보여온 아베 총리와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석수를 확보한 직후 생전 퇴위 의사를 처음으로 내비쳤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의 일왕이던 히로히토의 장남인 아키히토 일왕은 11세에 일본 패전을 지켜봤으며, 이후 사이판 한국인 전몰자 기념비에 참배하고 태평양 전쟁에 대한 반성을 직접 언급하는 등 평화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
나루히토 왕세자도 지난해 2월 "앞선 전쟁으로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고통과 큰 슬픔을 겪은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라며 "전쟁의 참혹함을 두 번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과거의 역사를 깊이 인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왕세자는 지난 2014년 "지금의 일본은 전후 일본 헌법을 기초로 쌓아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라며 "앞으로도 헌법을 지키는 입장에서 필요한 조언을 얻으면서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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