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영화 <부산행>의 결말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행>은 시쳇말로 '역대급'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이기에 이미 많은 비평이 제출되었는데, 상업 영화로서는 거의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꽤 낯선 장르인 좀비물의 토착화 시도를 높이 사면서도 영화적 만듦새나 독창성 면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좀비 장르의 팬들이 볼 때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감염자'들의 형상이나 생리, 그리고 그와 연동된 액션 신의 설계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워 Z>(2013년)의 인용에 가깝다.
감정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면 여지없이 늘어지는 편집 등의 상투적인 장면 연출도 어떤 관객들에게는 꽤나 촌스럽게 느껴질 공산이 크다. 그래서 영화 곳곳에 배치된 국가에 대한 자못 예리한 비판이 신파적인 정서에 묻히고 만다는 평가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반면에 높은 스크린 점유율이 단적으로 말해주는바 애초에 여름방학 특수를 겨냥해 블록버스터로 기획된 영화에 너무 높은 기준을 들이대는 게 아니냐는 심드렁한 반응도 자주 눈에 띈다.
한국 남성 자아에 대한 통렬한 진단
그러나 연상호 감독의 존재는 <부산행>에서 괜찮은 오락 영화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끔 만든다. 그의 전작인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년)과 <사이비>(2013년)는 이제는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 걸쳐 희귀해진 리얼리즘의 수작이다. 사회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인간군상을 소재로 택하되 취재에 바탕을 둔 듯한 풍부한 세목을 활용하여 한국 사회, 특히 한국 남성들의 심성 구조 일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강렬한 드라마를 직조한 것이다.
분명 <부산행>은 그런 창작 경향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락 영화의 외양 아래 한국 사회와 한국 남성 자아에 대한 예의 통렬한 진단들이 자리 잡고 있고, 이 영화의 이른바 신파 플롯 역시 전작들과는 상당히 변형되어 거의 역전된 형태로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진단을 극화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보는데) 만약 바로 그런 요소 때문에 무의식적 차원에서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측면이 이 영화에 있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국가에 대한 정당하지만 다소 상투적인 비판보다는 신파가 설계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상상하는 재난에 좀비가 동원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좀비는 주로 액션의 계기로 활용되고 있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삶의 조건을 뼈아프게 환기시키는 상징으로 화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온라인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지만 실제 극장에서는 대다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 영화의 절정부에서, 공유가 연기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이제 곧 좀비로 전락할 처지이지만 딸의 출산 때를 회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좀비로 변해가는 아빠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는 딸의 절절한 사랑 고백을 마침내, 아마도 최초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가 딸을 희망의 장소인 부산으로 데려갈 기관차에 가둬둔 채 열차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이 장면의 감상성은 극대화된다. 감정의 과잉을 자극하는 회상 장면의 삽입을 조롱하는 의견을 온라인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실상 이 영화 전체가 바로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
대중문화에서 재난은 흔히 상상의 거래가 벌어지는 장이다. 대개 그 거래는 남성 자아에게 썩 유리한 장사이기에 판타지로 기능한다. 재난이 야기하는 생존 투쟁에서 억압된 공격성의 표출은 미덕이 되고, 가족주의의 이름으로 가부장의 권위가 회복되기에 불안한 남성 자아는 가끔씩은 즐겁게 문명의 몰락을 상상하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그리는 거래는 영 손익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제의 회복은 고사하고 그저 딸의 인정을 위해서 아버지는 좀비까지 되어야 하는데, 세계의 종말 상황과 맞바꾼 판타지의 최대치가 이 정도이다.
판타지의 신빙성은 무제한적이지 않고, 엎어치기 전 원래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으로 냉정한 평가에 의해 제어된다고 할 때 어쩌면 <부산행>의 판타지(?)는 감독이 전작들에서 냉철하게 해부해놓은 한국 남성들의 생태의 음화(陰畫)일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나름의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간략히라도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영화들에서 남성 인물들의 문제적 측면이 다소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제시된 면이 있긴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폭력성이 전염되는 남성 문화의 구조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예리하다는 것과 그래서 남녀 관계 또한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진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밝혀둔다.
영화 속 '좀비 되기'의 함의
물론 상업 영화의 미덕을 갖추고자 애쓴 <부산행>은, 일말의 위안도 허락하지 않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감독의 세계 인식을 누그러뜨리는 극적 요소들을 구비하고 있다. 사실 영화 초반부의 주인공 형상화는 그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얼마나 부적격인지를 시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곧 그 결정적인 희생 장면을 준비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교육의 모델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그야말로 판타지적이다.
마동석이 연기하는 초-남성 캐릭터는 자발적으로 여성의 통제에 따라서 타인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우월한 신체적 능력을 사용한다. 이 인물을 구성하는 자질 조합의 비현실성은 그가 구사하는 전형적인 마초 농담 때문에 살짝 가려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인물의 신빙성이 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의 변화 또한 우리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지,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은 아니리라.
이 영화에서 가장 생생하게 구현된 인물은 단연코 김의성이 연기하는 사악하리만큼 이기적인 중년 남성이다. 그는 좀비 떼에게 주변의 승객들을 미끼로 던져가며 생존을 도모하는 악당이다. 그러나 이 인물이 좀비 떼를 통과해온 주인공 일행의 감염 여부를 의심하며 그들을 객실에서 몰아내자고 다른 승객들을 설득할 때, 그는 그 주장에 찬동하는 평범한 승객들, 곧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그는 가장 강렬한 생존 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바로 그런 속성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키로 작용하기에 말의 본디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protagonist)은 어쩌면 그일 수도 있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판타지를 걷어내면 감독의 전작들과 공명하는 메시지가 추출된다.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졌는데, 우리가 딱히 악해서가 아니라 살려다보니 남과 나를 함께 망가뜨리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에는 좀비 장르 전체를 통틀어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낮>(1985년)에서처럼 스스로 좀비에게 물리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 나오는 것이다. <시체들의 낮>의 한 인물은 좀비보다도 못한 인간들을 싹 제거하는 '좀비 혁명'을 꿈꾸며 스스로 좀비를 유인하는 미끼가 된다.
<부산행>에서 비슷한 결정을 내리는 것의 의미는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직전에 언급한 장면에서 중년 남성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좀비가 되어버린 단짝 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노년의 여성 인물은 '평생 착하게 산 보람이 기껏 이거냐'라는 내용의 혼잣말을 한 후에 좀비 떼에게 문을 열어준다.
중년 남성과 좀비들을 교차로 보여주는 편집은 그 행동을 복수로 규정하고 있지만, 영화의 전체 내용을 생각할 때 의미를 그렇게 축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의 의로운 인물들도 좀비들과 싸우다 지치면 팔뚝을 내어주고서 시간을 벌려 한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판타지 플롯과 길항하는 이런 미묘한 대목들은 마치 좀비 되기를 권하는 듯하다.
이미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좀비와 같기에.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이미 망한 세상에 제대로 된 종말을 선사하는 길이기에. 좀비의 기원을 다룬다는 프리퀄 <서울역>을 봐야겠다.
(이 글은 <창비 주간 논평> 8월 3일자에 실렸습니다. <프레시안>은 <창비 주간 논평>의 글의 일부를 공동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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