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부탁받은 것은 '부탄' 여행의 길목인,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생태 언어와 생태적 삶'이란 주제로 특집을 준비하는데, '소멸 위기의 언어'인 제주어를 함께 다루고 싶다는 전화를 통해서다. 돌아오자마자 원고를 마감해야 할 처지여서 주저주저하다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부탄에서 '제주어의 환경과 미래를 되돌아보는 것도 뜻 있겠다' 싶어 승낙하고 말았다.
6월의 부탄은 찔레꽃 천지였다. 하얀 꽃을 피운 찔레꽃은 시골에서는 물론, 수도 팀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생태적 삶을 위해 파리 목숨 하나도 귀중하게 여기는 그 나라에서 제주어의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운명처럼 생각됐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함부로 하지 않는 생태 국가답게 부탄 사람들은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만난 부탄은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하게 보이지 않았다. 전통과 문화와 자연을 존중하는 나라답게 국민들 또한 자존감이 강해 보였고, 넉넉한 표정 속에서는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부탄은 왕정 국가다. 1986년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입헌군주국이 됐다. 개방화 물결로 1960년에 영어를 공식 교육에 포함시켰고, 1971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국어인 '종카어(Dzongkha)'와 영어를 반반 가르치다가 고학년으로 갈수록 영어 사용이 늘면서 자연히 종카어는 위기를 맞고 있다. 2010년 12월 28일 '부탄 국어발전위원회 국립국어원 방문 결과' 보고에 따르면, '현재 교육받은 사람들 가운데 1퍼센트 정도만 자기 이름을 종카어로 쓸 수 있고, 간판들은 대부분 영어와 종카어를 병기하는데, 간판에 쓰인 종카어 표기는 틀린 부분이 많다'고 한다. 이처럼 언어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따라 생사를 달리하는 것이다. 부탄은 현재 1986년에 구성된 '부탄 국어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종카어 보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제주어와 그 현실
제주어는 제주 사람들이 세대를 이어오며 써온 말이다. 제주어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응축되어 있는 결정체로, 제주 문화와 역사는 제주어로 전승되고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생활환경 변화로 제주어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필자는 2011년 9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제주도 도서 지역인 4개 지점에서 어촌생활과 관련한 어휘를 70대 이상과 30∼50대를 대상으로 인지도를 측정해 생태학적으로 고찰했다. 그 결과 70대 위 노년층에서는 생태 지수가 다른 세대보다 높게 나타난 반면, 30∼40대에서는 지수가 매우 낮았다. 106개 조사 어휘 가운데 70대 위 세대에서 100퍼센트 사용하는 어휘는 51개로 절반 가까이 됐지만, 50대에서는 22개 어휘, 30∼40대에서 8개 어휘로 생태지수가 눈에 띄게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위기는 제주대학교 국어문화원이 2010년에 제주도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주도민의 제주어 사용 실태조사'에서도 파악됐다. 120개 조사 어휘 가운데 제주도 중고등학생들이 90퍼센트 넘게 알고 있는 어휘는 친족 관련 어휘인 '아방'(아버지, 92.3퍼센트), '어멍'(어머니, 91.5퍼센트), '하르방'(할아버지, 90.5퍼센트), '할망'(할머니, 90.3퍼센트) 모두 4개에 불과했다. 80∼89퍼센트 아는 어휘는 3개, 70∼79퍼센트 아는 어휘는 4개였다. 반면에 10퍼센트 아래만 알고 있다고 응답한 어휘는 45개(37.5퍼센트)나 됐다. 이는 중고등학생들의 삶의 환경이 제주에서 이어온 전통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어 이들의 언어 환경이 바뀌고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다.
몇 년 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문자심포지아 2014'에서 '제주어의 생태지수'를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한 제자가 내 발표를 듣고 '각제기'가 제주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면서 '각제기'의 표준어는 뭐냐고 물어왔다. '전갱이'라는 대답을 들은 그 제자는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각제기'만을 들어온 그에게 '전갱이'는 낯선 언어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 또한 제주에서 '각제기'를 '전갱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배추나 무를 썰어 넣어 끓인 '각제기국'은 제주 전래 음식으로 향토음식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차림표다. '자리물회'의 '자리(자리돔)', '어렝이물회'의 '어렝이(어렝놀레기)', '멜국'의 '멜(멸치)'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제주어 이름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각제기'는 '각제기'여야 하고, '자리'는 '자리', '어렝이'는 '어렝이', '멜'은 '멜'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제주어의 생태문화적 가치와 의미
이처럼 제주에서 제주어는 삶의 언어다. 잠녀(潛女)들이 물질할 때 사용하는 도구인 '테왁'과 '망사리', '비창'과 같은 어휘가 좋은 예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테왁'은 '박의 씨 통을 파내고 구멍을 막아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다에 가지고 가서 타는 물건(제주)'이다. 또 사전에서는 '망사리'는 '제주도에서, 해녀가 채취한 해물 따위를 담아 두는, 그물로 된 그릇'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비창'은 '잠녀들이 전복을 딸 때 사용하는 쇠로 납작하게 만든 도구'이지만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의 올림말로 올라 있지 않다. '비창'은 제주에서 잠녀들이 물질할 때 반드시 들고 가는 도구다. 이 어휘는 '테왁'과 '망사리'처럼 바다를 품고 사는 제주 잠녀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귀중한 언어문화 유산이다.
지난해 제주시 구좌읍 지역에서 생활 도구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 '비창'을 응용하여 만든 '당근 파는 비창'과 '삼마 파는 비창'을 조사할 수 있었다. '전복 따는 비창'이 일자형으로 한쪽 끝에 고무줄 고리를 만들어 손목에 끼워 사용했다면, '당근 파는 비창'과 '삼마 파는 비창'은 영어 알파벳 티자 모양으로 손잡이를 만들어 쓰기에 편리하게 했다. 이처럼 환경에 맞게 도구 모양도 이름도 바뀌며 새로운 삶의 문화를 쓰고 있다.
옛사람들은 다양한 생물 종만큼이나 다양한 어휘를 만들어 썼다. 전복 이름을 예로 들면, 암수와 크기에 따라 '암첨복·암핏'(암전복), '수첨복·수핏'(수전복), '마드레'(시볼트전복), '빗제기·조겡이·설피역'(새끼전복) 같이 구분해 불렀다. 하지만 그 많은 전복 어휘들은 사용자가 줄면서 사람들 뇌리 속에서 점점 잊히고 있다.
제주어에는 현대국어에서 사라진 '아래아(·)'와 중세국어 같은 고형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어는 생활환경과 생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 유네스코도 2010년 12월 8일 제주어를 '사라지는 언어' 5단계 가운데,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하게 언어유산을 잃어버리거나 없어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말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 생각이 깃든 자연이 송두리째 사라진다. 언어는 생물 종이 생태계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나름대로 생활방식을 가진 공동체 일부분이다. 생태계 균형이 깨어지면 생물과 언어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많은 언어학자들이 언어를 생물 종처럼 생태학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 보전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임이 틀림없다. 제주어 보전은 곧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지켜내는 일이다. 제주어의 온전한 보전이야말로 제주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요, 제주 생태환경을 복원하는 일이다. 비름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쇠무릎'의 방언형 '작쿨'을 '말마작쿨', 모자반을 넣어서 끓인 '국'을 '맘국'으로 변질시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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