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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재벌에 '무장해제'한 MB, 이제와 '뿔'난들…

투자-일자리 '묵묵부답'에 발만 동동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립현충원 외에 공식적으로 처음 방문한 곳이 전국경제인연합회였다는 건 이 정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부 출범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라는 말이 모토처럼 자리잡았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에도 재계 총수들과 접촉하는 등 대기업에 우호적인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인수위 시절부터 적극적인 '친기업' 정책의 예고편을 쏟아냈고, 8.15 광복절을 맞아 재벌 총수들에 대한 사면까지 단행했다.
  
  이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노골적인 'MB 감싸기' 발언이 시시때때로 나오는 등 재계 쪽의 '립 서비스'도 고무적이었다.
  
  재계의 숙원이던 '규제 완화'가 이뤄지면 이명박 정부의 최대 목적인 '투자활성화-일자리 창출'에 재계가 화답하는, '빅 딜'이 완성된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논리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이명박 정부는 재계의 요구를 몽땅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재계를 쳐다봤는데, 기업들은 먼 산만 쳐다보는 형국. '경제살리기'가 최대의 과제인이명박 정부로선 이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
  
  MB도 뿔났다?
  
▲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지난 해 12월28일 전경련 회관에서 기업 총수들을 만나 "나는 분명 친기업적"이라면서 '비즈니스 프랜들리' 원칙을 천명했다. ⓒ국회사진기자단

  기업들은 투자와 채용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대기업들이 전년보다 평균 15% 가량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1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국민소득 통계'에 의하면 올 상반기 건설, 설비, 무형 고정투자를 포함한 총 고정자본의 전년 동기대비 실질 증가율은 0.5%로, 작년 상반기 6.2%에 비해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투자 증가율이 '제로'에 머문 셈이다.
  
  일자리 문제도 신통치 않다. 전경련이 7월 초에 발표한 30대 그룹 10% 추가고용 계획에 상당수 그룹들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기업들이 정권 초기에 대규모 투자와 채용계획을 밝혔다가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붙이며 슬그머니 백지화시킨 반복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정몽구 회장이 사면된 직후 현대기아차가 11조 투자, 4500명 채용이라는 계획을 내놓은 게 그나마 눈에띄는 '답례'이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이것도 지켜 볼 일이다.
  
  재계는 오히려 9월 초로 예정됐던 이명박 대통령과의 '민관합동회의'에서 상속세 인하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으로 알려지는 등 '제 밥그릇 찾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다. 이는 반기업정서 해소, 기업규제 완화 등과 함께 재계의 '단골' 건의사항이었다.
  
  재계가 규제완화와 사면 등 정부로부터 선물만 잔뜩 챙기고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는 '먹튀' 행각을 보일 조짐이 일자 여권에서 이례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박희태 대표는 21일 한나라포럼 초청 강연에서 "지금 기업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건이 안돼 투자를 않고 있다고 하는데 재벌들은 몇 십조원 씩 쌓아 놓고도 투자를 안 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8·15 사면에서 경제인이 많이 사면된 것은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경제살리기를 위해 적극 투자해달라는 뜻이 아니냐"며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전날에는 차명진 대변인이 "기업투자가 제로 수준이고 민간소비도 말랐고, 정부지출도 말랐는데 기업은 돈이 넘쳐난다"면서 "그런데도 투자를 안 한다"고 대기업들을 향해 포문을 연 바 있다. 그는 "이번에 경제를 살리라는 이유로 욕을 들어가면서 특별사면도 해 줬는데 투자는 뒷전이고 다른 기업 먹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기에만 급급한 기업인들이 꽤 있다"면서 "기업도 이제 환경 탓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재계에 대한 경고성 신호가 나오기도 한다. 당정은 당초 올해 사업소득분부터 적용할 예정이었던 법인세율 인하시기를 1년 늦춰 2009년부터 적용키로 했다.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지금은 고통 분담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며 "법인세 인하를 2009년부터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에도 이상기류가 흐른다. 청와대 측은 내달 초로 예정돼 있던 이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회동을 연기했다. 잠정적으로는 다음 달 18일께 열릴 가능성이 높은 상태라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재계에 대해 어떤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연기된 것일 뿐"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추석(9월13일~15일) 전에 재계로부터 투자와 채용계획을 얻어 내 차례상에 올려놓으려던 회심의 민심잡기 카드는 차질을 빚은 셈이다.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며 재벌들을 바라보는 청와대 내부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무장해제' 뒤의 뾰족수는 뭔가?
  
  정치권 일각에선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이같은 조치를 재계에 대한 '경고장'으로 해석한다. 그 누구보다 재계의 생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CEO' 출신 이명박 대통령마저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한계에 봉착한 인내심 뒤에 빼 낼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서 답이 막힌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지주회사 규제완화 등 재벌 규제 철폐 정책은 이미 레일을 탔다. 청와대가 이를 39건의 '개원국회 정부 중점추진 법안 리스트'로 공식화 했고, 재계를 나무라던 박희태 대표가 "앞으로 한나라당은 각종 규제를 개혁할 것"이라고 뒷받침을 약속한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만나 '박통 시절'처럼 윽박을 지르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때 "시중에서 흔히 애기하는 것처럼 대통령이 재벌 총수를 만나 투자를 독려하는 만남은 필요치 않다. 정부가 규제나 권력으로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 '총수 독대 기피증'을 과도한 자신감으로 뒤바꿔 표현해 욕을 먹은 발언이기는 하지만, 훗날 노 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한 '백기항복' 선언과 내용에선 수미상관한다. 재계가 대통령 앞에서 벌벌 떨던 시대는 지났다는 걸 입증한 전임 통치자의 전철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경제 슬로건이었고, 보수 진영이 공격한 것처럼 '좌파'이거나 반(反)시장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만큼 재벌개혁 의지를 일찌감치 꺾은 정부였다. 그때도 재벌의 금고에는 현금이 쌓여있었고, 아예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실행에 옮긴 이명박 정부에서도 수조원씩 쌓아둔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그대로다.
  
  '재계의 생리'를 잘 안다는 이 대통령이 어떤 뾰족수를 찾아내 이를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돌려 낼지 지켜볼 일이지만,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정권의 문패에 감사해 서민경제에 사명감을 가지고 이바지할 만큼 '착한 자본'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은 낭만적이라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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