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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이 시대 가장 눈물겨운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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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이 시대 가장 눈물겨운 문학

[민들레] 서른의 문턱, 다시 백수가 되다

이 시대 가장 눈물겨운 문학

취업을 앞두고 자기소개서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안다.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그 순간을. 이력을 써넣고 나를 소개하기에 앞서 살아온 날들을 곱씹는다. 짧게는 20여 년, 길게는 30여 년을 대체 뭘 하며 살아왔기에 이렇게 쓸 말이 없을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자기소개서(자소서) 쓰기는 시작된다. 샅샅이 기억을 뒤져 자격증, 어학 성적, 수상 내역, 인턴 경력, 해외연수 같은 리스트를 읊어본다.

내세울 만한 '스펙'이 없다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부랴부랴 토익 학원에 등록하거나 취업 관련 사이트를 뒤져 그럴싸한 대외활동 목록을 살펴본다. '스펙(Specification)'은 원래 제품의 '사양'을 지칭하는 단어지만 구직자들의 학력과 학점, 영어점수 등을 싸잡아 이르는 뜻으로 쓰인 지 오래다.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은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대학을 졸업할 즈음의 대다수 취업준비생들은 서로 엇비슷한 사양을 지닌 채 사회에 나가게 된다.

정규교육을 마치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이 사회 청년들이 쌓을 수 있는 이력은 지극히 무난하고 평범할 수밖에 없다. 슬픈 현실은, 이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은 천편일률적인 스펙을 가진 그저 그런 신입사원을 뽑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스펙을 커버할 수 있는 자소서가 입사시험 준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청년들은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기발하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열정이 넘치는 지원자로 꾸며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자소서는 어느덧 '자소설'이 된다. 이 시대 가장 눈물겨운 문학은 이렇게 탄생한다.

한 매장에서 화장품을 구입하니, 영수증과 함께 계열사의 영화 할인쿠폰을 준다. 영화를 보러 갔더니, 또 계열사의 레스토랑 1인 무료쿠폰을 손에 쥐어준다. 이런 상술로 소비자를 유혹해 지갑을 열게 만드는 모 기업은 평소 내게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취준생 신분이 된 나는 어느새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 기업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실업자가 될 판인데 내 가치관과 양심을 지키는 건 사치였다. 어릴 때부터 당신들의 회사 제품만을 사용해왔다는 아주 일차원적인 발상을 끌어다 적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턴기자로 일할 때 옆 건물에 불이 나서 잠시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던 경험은 미국 소방관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화재가 난 건물로 용감하게 뛰어든 열정적인 스토리로 각색되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자소서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두 해에 걸쳐 여러 대기업 서류 전형에서 모두 탈락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소서는커녕 학력과 학점, 혹은 전공, 토익 점수가 적힌 이력서, 어쩌면 반명함 사진에서부터 벌써 내 지원서는 휴지통 속에 처박혔을 수도 있다. 이제나저제나 서류전형 발표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제한된 기회로 인해 귀하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선발할 수 없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로 시작하는 탈락 문자를 받는 것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제 나는 지원자가 아니라 다시 잠재적 소비자가 되었으므로, 기업은 끝까지 나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잊지 않는다.

▲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2013)는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할 생각 없이 빈둥대는 여주인공 다마코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닦달로 구직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TV 뉴스를 보며 "일본은 글렀어!"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처럼 경제 불황(moratorium)에 빠진 나라(또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개인(또는 청춘)을 다룬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자기' 없는 자기소개서

고만고만한 이력으로 더 이상 정보를 걸러내기 어려워진 기업들은 최근 입사 전형에서 '탈(脫)스펙'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곳은 어학 점수나 자격증, 수상 및 인턴 경력 등을 적는 항목을 없애고 지원자의 사진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펙으로 신입사원을 뽑지 않겠다는 기업들의 선언은 일면 취준생들의 시름을 덜어준 모양새지만, 사실은 스펙을 따지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자소서가 당락에 미치는 비중이 더 커졌다. 이제는 쌓아온 스펙을 어떻게 더욱 매력적으로 작문해야 하는지 고심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한 셈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문항에 1000자, 많게는 2000자까지 에세이를 요구한다. 살아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 성공과 실패 사례, (당연히 극복했으리란 전제를 둔) 실패를 극복한 방안, (없을 수도 있는데 없다고 적을 수 없는)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을 적으라는 문항들은 이제 익숙하다. 학창 시절 내내 튀지 말고 조용히 앉아 공부만 하라던 어른들이 갑자기 단출하기 짝이 없는 인생사에서 잊을 수 없는 대단한 사건과 깨달음을 요구하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당사가 현재 처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라'거나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얻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라'고도 한다. 사회 초년생을 뽑는 건지, 대리나 차장급 경력직을 뽑는 건지 헷갈리는 문항이다.

중·고등학교에선 5지선다형 시험 방식에 길들었고, 대학에서는 학점 관리가 필수라 시험 준비가 비교적 수월한 대형 강의를 선호하던 청춘들에겐 긴 문장으로 자소서 쓰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책 읽을 시간에 공부하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살았고 토론식 수업이나 체험활동은 일 년에 한두 번 했을까 말까인데, 경험과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자기 주관을 펼쳐야 하는 글쓰기가 가능할 리 만무하다.

이쯤 되자 자연히 자소서도 사교육의 범주에 포섭됐다. 대형서점에 가면 자소서 쓰는 방법을 일러주는 책들이 대거 진열되어 있다. 고만고만한 이력을 어떻게든 돋보이게 하려고 이런 책을 사들이지만, 문제는 취준생들이 다 같이 이 책을 참고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가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학원을 찾는 취준생도 많다. 이 학원에서는 이력서와 자소서, 면접 등 취업 준비 전체를 아우르는 패키지를 선보인다. 학원에 고용된 컨설턴트들은 자소서를 직접 첨삭해주고 해당 기업을 위한 맞춤 합격 전략을 제시한다.

이도 자신이 없다면, 대행업체 작가에게 대필을 맡길 수도 있다. 한 편당 5~10만 원을 입금하면 본인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려한 문장의 자소서가 탄생한다. 남이 써준 자기소개서는 결국 평생 해당 기업을 위해 이 한 몸바쳐 일할 것이라고, 당사의 이윤 창출 극대화와 고객 만족을 위해 애쓰겠다는 굳은 다짐과 결의로 도배된다. 간절히 입사를 바라는 취준생 처지에 구조조정이나 해고, 권고사직, 퇴사를 먼저 떠올리는 이는 없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는 기업의 자소서 항목은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이 질문을 통해 10년 후에도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이 일으킨 사회적 논란이나 기업의 도덕적 결함, 불공정 행위, 더 나아가 갑의 횡포와 온갖 불법에는 두 눈을 감는 게 최선이라는 걸 입사도 하기 전에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남이 쓴 자기소개서는 결국 '뜨거운 열정을 지닌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신뢰 있는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진취적인 도전가' 등의 낯부끄러운 표현들과 모호한 문장의 연속이다. 자소서만 보자면, 대한민국은 피겨 불모지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김연아 선수나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m) 16좌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과 같은 인간으로 가득 찬 것만 같다. 자기소개서에 자기가 없고, 소설처럼 허구와 가상의 이미지만이 빼곡하다. 그러나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하루 빨리 '출근'이란 걸 해 보고 싶은 청춘들의 간절함을 위선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0점짜리 진실, 100점짜리 진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최고 대입 에세이'를 선정해 기사화했다. 대입을 앞둔 미국 고등학생들의 자소서 가운데, 훌륭한 몇 편을 골라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선정된 에세이는 대한민국 취준생들의 자소서와는 사뭇 다른 것이 눈에 띈다. 담백하고 평범한, 자신의 가치관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이 미국 대학 입학사정관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다. 조셉 리지오라는 학생은 식구들 중 처음으로 대학 문을 두드리게 됐다며,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부모와 조부모의 기대를 받게 된 것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여전히 두렵지만 자부심도 크다고 덧붙였다.

그의 자소서에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대입 에세이에 있을 법한 경시대회 참가 혹은 해외여행 경험과 같은 폼 나고 화려한 내용이 없다. 자기가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그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갈 뿐이다.

대학 졸업 후 한 언론사의 인턴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쓰다가 가족관계 옆에 부모님의 최종학력과 직업과 직위 기입란까지 있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소유한 부동산을 적으라는 칸까지 있었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에나 있었던, 이름도 까마득한 '가정환경 조사'가 그 위에 겹쳐졌다. 부잣집 아이들에겐 대수롭지 않았겠지만, 집안 형편이 녹록하지 않은 아이라면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이 부끄러움과 난처함을 느껴야만 했던 그 조사가 불과 몇 년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고 있었다. 부모님의 최종학력 기입란을 바라보던 나는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부모님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솔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결국 엄마, 아빠에게 미안해졌을 뿐이었다.

얼마 전 로스쿨 입학 자소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직업을 기재한 학생들이 합격해 논란이 일었다. '아버지가 대법원장이다' '어느 지역 시장이다' '법무법인 대표다'와 같은 구체적 신상을 적어낸 것이 문제가 됐다. 논란이 일자 로스쿨 협의회는 앞으로 자소서에 부모나 친인척의 신상을 기재할 수 없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다시 궁금해진다. 로스쿨 지원자의 아버지가 대법원장인 걸 절대 알려서는 안 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취준생들은 누구도 배운 적 없고 아무도 알려준 적 없지만 직감으로 알고 있다. 반드시 자소서에 드러내야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얘기는 무엇인지. 인재를 선발하는 사람들은 진실에도 등급을 나눈다.

자소서를 쓰는 시간들

올해도 어김없이 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 공고가 나부낀다. 계속되는 서류 탈락에 한 톨의 자존감도 남아 있지 않았던 나는 자소서 속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진취적이며 열정적이어야 했으므로 괴로웠다. 극과 극에 놓여 자아분열의 시간을 지났다. 벼락치기로 따낸 자격증 몇 개, 어느 일요일 몸에 맞지 않는 중학교 책걸상에 끼어 앉아 얻은 토익 성적, 억지로 쌓은 자원봉사 시간. 고작 그런 것들에 의지한 채 내 미래를 어떻게든 구상해 보려고 애쓰던 그때. 열정페이라도 좋다, 무급이어도 취업에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던 3개월짜리 인턴직, 혹시 지원한 회사에서 연락이 올까 화장실을 갈 때도 휴대폰을 놓을 수가 없었던 희망고문의 나날들. 남들 하는 건 전부 했지만 여전히 무직 상태를 면할 수 없는 상황. 학생도 직장인도 사장님도 그 무엇도 아니어서 내 정체를 드러낼 어떤 단어도 없던 그때, 주변에서는 '남들 하는 만큼만 하니까 안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더 독특한 경험이 있어야, 얼마나 더 대단한 지인이 있어야, 얼마나 더 매력적인 육체를 지녀야, 얼마나 더 강한 멘탈(정신력)을 구축해야 내 몫의 일자리가 떨어지는 걸까. 진짜의 나를 쓰더라도, 가공의 나를 쓰더라도 자소서를 마주한 그 시간들은 내가 너무나 작아지는 혹독한 시간이었다.

수십 개의 '자소설'을 쓰던 일도 이젠 과거형이다. 지난해 1월 "이번 주부터 출근하세요"라는 전화를 받고 작은 온라인 매체에 입사해 '이 화장품만 쓰면 모든 피부 고민이 해결된다'는 맥락의 광고성 기사를 기계적으로 양산했다. 처음엔 괴로웠지만, 곧 아무렇지 않아졌다. 인천에서 강남까지 지하철로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이었다. 내 스물아홉은 그렇게 지하에서 흘러갔다. 회사 주변에 있는 코딱지만 한 단칸방을 얻으려면 월급의 절반 이상을 다달이 지출해야 했다.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도 일하고 싶어 했으면서 1년 몇 개월 후 결국 퇴사했다.

다시 백수가 된 나는 올여름, 1년 정도 중국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취준생' 이름표를 달고 새로운 자소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어떤 나를 소개하고 있을지, 또 얼마나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을지, 서른의 문턱에서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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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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