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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옷핀으로 아무도 모르게 콕,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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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옷핀으로 아무도 모르게 콕, 콕"

[작은책] '피해자'와 '저항의 주체' 사이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SNS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고백이 이어졌다. 여성이 아니라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독거노인이든 비정규직이든, 심지어 그냥 여행을 가려는 평범한 시민이었더라도 이 사회에 안전한 곳은 없어 보인다. '여성 혐오'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언론은 여성혐오를 장애혐오로, 지역혐오로 돌려막기 하느라 바빠 보인다.

이 와중에 '여성으로 살아가기'라. 원고지 1600매로 쓰라고 해도 다 못 쓸 판인데, 원고지 16매 이내로 써야 한다니…. 모니터만 바라보면 머리가 하얘졌다. 차분하게 글쓰기는 고사하고, 이미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아무리 눌러도 가슴 저 밑바닥부터 꾸역꾸역 올라오는 통에 요즘 늘 신경은 날카롭고 일상이 평온치 못하다. 유년기부터 40대 후반인 지금까지 겪은 헤아릴 수 없는 차별과 폭력의 기억들은 여전히 선명한 통각으로 떠오른다. 눌러 봐야 소용없는 기억들을 그냥 흐르게 내버려 두자, 하다가 마주친 기억.

ⓒAP=연합뉴스

중학교 때 도덕 시간마다 허리춤에 옷핀이 꽂혀 있는지를 검사받고, 옷핀이 없으면 손바닥을 맞았다. 억울한 심정으로 손바닥을 맞던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우리 손바닥을 때릴 때마다 "니들 몸은 니들이 지켜야지, 누가 대신 지켜 준다는 사람 있어?"라고 하던 도덕 선생님의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옷핀은 호신용이었다. 혼잡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성추행 피해를 경험하는 건, 안 당해 본 여성이 없을 정도로 여성에겐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럴 때 소리를 질러 봐야 그놈이 모르쇠 하면서 적반하장일 테니, 당한 사람만 창피해지지? 자리를 피해 봐야 따라오면 또 당할 거고, 피해 간 자리에 그런 놈이 없으리라는 보장 있어? 그러니 조용히 옷핀을 꺼내서 아무도 모르게 콕, 콕 찌르란 말야."

그런 식으로 혼잡한 곳에서의 성추행 퇴치법을 일러 주는 도덕 선생님은 살아온 세월만큼 학생들보다 피해 경험이 훨씬 더 많았을 게 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일을 자주 겪으면서도 그 옷핀을 사용하는 게 늘 겁이 났다. '정말 아무도 모를까? 그 사람이 결국 나한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빽빽할 정도로 사람 많은 버스에서 내 엉덩이에 성기를 밀착시켜 비벼 대는 남자가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승객들의 자리가 바뀌어도 이내 내 뒤로 들러붙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그 남자는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잘생겨 보였을 멀쩡한 얼굴에 감색 싱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동안 허리춤의 옷핀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나는 드디어 옷핀을 꺼냈다. 그리고 시선은 창밖에 두고 조용히 옷핀으로 그 남자를 콕콕 찔러 댔다. 버스 차창에 비친 그 남자의 찡그린 얼굴엔 뜻밖에 당혹감이 서렸다. 내가 시치미를 떼고 옷핀으로 찌르기를 계속하자 그 남자는 내게서 떨어졌고, 외려 슬금슬금 나를 피해 나에게서 먼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내릴 때가 되어서 내렸는지 부러 내렸는지는 몰라도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이 일화를 쓰는 건, 옷핀이 최선의 호신 수단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나는 다만, 남성의 성기가 내 몸에 닿는 끔찍한 이물감과 수치심, 그리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로 버스가 목적지에 닿기만을 기다리며 견디던 내가 처음으로 냈던 '용기'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 나는 지금, 학생들의 손바닥을 때리는 교사의 행위가 인권침해일지언정, 그때 우리에게 '도망치라'고가 아니라 '저항하라'고 가르쳐 준 도덕 선생님에게 참 고맙다.

크고 작은 폭력에의 피해는 물론 나의 생존을 우연에 맡겨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피해자로 살아남을 것인가, 저항의 주체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매 순간 결단해야 하는 일이다. '피해자'와 '저항의 주체' 사이는 한 끗 차이이기도 하고, 그 사이엔 엄청나게 험하고 고통스런 심연이 놓여 있기도 하다. 나는 늘 그 사이에서 질퍽거리기도 하지만, 나는 시시때때로 선언한다.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나는 더 이상 잠재적 피해자로 나를 규정하는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나는 이 사회가 내 몸에 새긴 수많은 상흔이 지긋지긋한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구조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여성!'이라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저항의 주체로 살아남았다'고.

그러나 나에게 행해지던 성폭력에 처음으로 용기를 냈던 날의 기억에 또 다른 기억들이 포개진다. 내가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차별과 폭력을 당하며 사는 동안 "왜 이 여학생에게 자지를 문질러 대는 거야? 그건 폭력이잖아"라고 말하는 남성을 나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 어쩌면 남성이라도 성추행범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남성들 중에 도덕 선생님이 호신용 옷핀을 고안해 낸 것처럼 나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 끔찍한 여성 혐오 사회에 저항하는 방식을 찾아야겠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회의 여성들은 '잠재적 피해자'가 아니라 '저항의 주체'가 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금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며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남성들은 무엇을 걸고 있을까? 나는 남성들에게서 이런 선언이 터져 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라는 선언.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 역시 이 사회 구조의 피해자였고 그러므로 나는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운다'라는 선언. 나는 나를 약자로서 배려하고 보호해 줄 남성들이 아니라 이 체제에 맞서 함께 싸울 동지들을 기다린다.

남성들의 이러한 정치적 각성은 여성들이 '피해자'와 '저항의 주체' 사이에서 겪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갈등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남성 중심주의 사회 구조에 맞서 '저항의 주체'로 선다는 것은, 여성들이 보호의 대상이기를 거부하듯 남성들이 기득권의 수혜자이기를 포기하고, 고통과 수치심과 억울함과 무력감을 대면하며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용기를 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남도에서 일어났던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와 그 남자친구처럼, 끔찍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침착하게 먼저 용기를 낸 사람들의 연대가 아직 고통의 심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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