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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아가씨>와 나쁜 영화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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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아가씨>와 나쁜 영화 <곡성>"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영화 비평 칼럼입니다.)


I. 영화의 구성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가장 훌륭한 비평적 글쓰기란 "그 무엇을 위하여 쓰거나 그 누구에게 동의하는 글쓰기"라고 정의한다. 그 무엇을 비난하거나 그 누구를 폄하하기 위한 글쓰기는 나쁜 글쓰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 <아가씨>와 나쁜 영화 <곡성>'이라는 제목으로 박찬욱 감독과 나홍진 감독의 영화 구성에 대하여 찬양과 질타의 글을 쓰는 것은 그 무엇을 비난하거나 그 누구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화 예술의 미래를 위한 간절한 미음으로 글을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처럼, 혹은 미술과 음악처럼 영화는 근원적으로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이름 그자체로 시나 소설, 혹은 미술과 음악 그리고 영화가 무조건 훌륭한 것은 아니다. 다른 여타의 예술 텍스트들처럼 영화에는 좋은 영화가 있고, 또는 나쁜 영화가 있다. 다른 여타의 좋은 예술처럼 좋은 영화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통하여 제공된 그 어떤 느낌과 감각을 생산적이거나 생성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드는 영화이다. 나쁜 영화는 그 반대이다. 영화가 제공한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인 느낌과 감각을 생산적으로 사유할 수 없거나 심지어 사유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영화는 나쁜 영화이다.

영화는 또한 다른 여타의 예술 텍스트들보다 더 강압적으로 관객들의 느낌과 감각을 구성한다. 폐쇄적인 영화관이라는 닫힌 공간 덕분이기도 하지만, 시와 소설, 미술, 음악, 건축 등등의 모든 예술 텍스트들을 총망라한 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만들어지는 강렬한 느낌과 감각은 영화관 바깥의 현실적 이미지들에 대한 느낌과 감각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포르노 영화가 포르노 사회를 만들고, 마국 헐리웃 영화가 "미국의 편은 선이고 미국의 반대편은 악"이라는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감독은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화가나 작곡가처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자이자 신이다. 영화감독이 창조자이자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는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언어나 색깔 그리고 선율로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 다른 여타의 예술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절정기였던 1930년대의 영국식과 일본식 건축이 결합된 백작의 저택이라는 공간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고,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근대적인 도시의 공간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곡성"이라는 농촌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한다.

▲ 영화 <아가씨> 포스터.

II. 창조(생성)적 영화와 파괴(폭력)적 영화

그러나 우리는 원초적 이미지의 형상을 사유할 수 없다. 이미지의 형상은 느낌과 감각만을 제공한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의 형상들 속에서 뛰어노는 언어적 개념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등장하는 영국식과 일본식 건축이 결합된 백작의 저택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이미지의 형상들은 아름답다거나 사치스럽다거나, 혹은 제국주의적이거나 귀족적이라는 느낌과 감각을 전달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도 마찬가지이다. <곡성>에 등장하는 "곡성 마을"의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마을들은 아름답다거나 적막하다거나, 혹은 고요하다는 느낌과 감각을 전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가씨>에 등장하는 백작의 저택 속에서 영화의 관객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근대적으로 훈련된 귀족 아가씨 히데꼬(김민희 분)와 하녀 숙희(김태리 분), 그리고 사기꾼 백작(하정우 분)과 후견인 이모부(조진웅 분) 등등의 인물적 형상의 개념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 성, 남성, 여성, 돈(자본), 귀족, 평민, 계급, 민족, 식민지 조선, 제국주의 일본 등등의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데 반하여 <곡성>의 마을들에서 살아가는 경찰관 종구(곽도원 분), 무당 일광(황정민 분), 외지인 일본인(쿠니무라 준 분), 무명(천우희 분) 그리고 소녀 효진(김환희 분) 등등의 인물적 형상의 개념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과 공포, 가족 등등의 개념들은 사유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곡성>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의 형상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생명과 자연의 개념들에 대한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영화의 외부, 즉 영화감독이 만든 수많은 이미지들의 형상이 단지 <곡성>만이 제공하는 영화 이미지의 패러다임 속에서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분법의 상징과 은유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곡성>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형상들은 절대적 악의 상징(외지인 일본인)과 절대적 선을 대표하는 잠정적 가능성의 상징(무명), 그리고 절대적 악에 패배한 상대적 선을 대표하는 근대화된 전통적 전근대의 상징(무당 일광)과 서구적 근대의 종교적 상징(기독교 사제)의 싸움일 뿐이고, 종구와 그의 딸 효진을 포함한 수많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발견되는 마을 사람들이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단지 희생물이거나 악의 영령이나 선의 영령에게 제사를 드리는 번제물일 따름이다. 그리고 선을 대표하는 무당 일광과 기독교 사제의 패배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제 식민지 36년을 살았던 한반도 민중의 아픔과 공포에 대한 역사적 은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제 식민지 36년의 역사적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가 악이지 무차별적인 외지인 일본인 개개인이 악이 아니며, 무당 일광이나 기독교 사제 또한 선의 상징이거나 악의 상징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미국 헐리웃 영화나 반공영화처럼 단지 이데올로기의 주입일 뿐이다.


영화 <곡성>의 더욱 더 큰 문제는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돌을 던지며 경찰이라는 지역 권력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종구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 무명이 영화의 말미에서 효진의 목숨을 빌미로 기독교적 상징으로 작동하는 닭의 세 번 울음소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믿어달라고 종구에게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적 선과 악의 무차별적인 폭력의 재생산을 의미할 뿐이다. 근대의 역사적 상상력을 통하여 <곡성>에 등장하는 무명이 일제 위안부 소녀의 상을 상징한다고 치더라도 영화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종구나 그의 딸 효진에게 무명은 외지인 일본인이나 무당 일광과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외부적 폭력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력은 영화 <곡성>에 등장하는 연약한 주민들 속에서 가장 연약한 어린 소녀인 동시에 생기발랄한 자연과 생명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효진에게 더더욱 무차별적이라는 측면에서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잔인함의 폭력이 어떤 영화적 이미지의 형상이 만드는 현실적이거나 역사적인 관계의 설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 <곡성>은 영화의 관객들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곡성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칸 영화제"에서 <곡성>을 보러왔던 상당히 많은 영화의 관객들이 영화가 상영되는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버렸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영화 <아가씨>에 등장하는 폭력의 강도는 영화 <곡성>보다도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가씨>에 등장하는 폭력의 이미지는 일본 근대 제국주의와 근대 식민지 조선,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적 후기 근대의 역사성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의 필연적 장치이다. 영화 속의 폭력과 사랑 그리고 섹슈얼리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공간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개개인들의 삶의 욕망과 무관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당시의 식민지 조선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식과 일본식 주택 구조가 결합된 백작의 저택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근대 영국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근대의 사회적 구조를 식민지 조선에 강제로 이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대부분의 일상적 소규모의 사회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백작의 저택에는 제국주의적 지배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인 백작의 후계자 히데꼬와 하녀 숙희 그리고 사기꾼 백작과 이모부의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어린이나 자연의 세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배자가 부재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는 일대 일의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고, 수많은 관계의 종합이 가족이고, 사회이며, 또한 국가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욕망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고, 어떤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에서 드러나는 욕망은 그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의 욕망이다.


욕망의 근원적 모델은 성적 욕망이다. 따라서 백작의 저택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상사들은 온갖 추잡한 사회적 섹슈얼리티가 난무한다. 이런 측면에서 백작의 저택에서 이미 구성된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의 사회적 욕망이 발현되기 이전의 가장 순수한 개체적 생명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히데꼬의 욕망이다. 히데꼬의 욕망에는 이미 구성된 가족주의도 없고 사회적 속성이나 국가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생명을 지속시키는 삶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근원적 힘을 통하여 소녀에서 여성으로 존재하고자 하고,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서 드러난 숙희의 욕망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돈에 대한 욕망이고, 사기꾼 백작의 욕망 또한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는 하층민 남성의 자본과 권위에 대한 욕망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식민지 귀족 중년 이모부의 욕망은 식민지 국적을 넘어서기 위한 제국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 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거나 하나의 여성이 되고자 하는 성적 욕망이 국가주의적 권력이나 사회적 자본이나 개인적 권위에 대한 부수적 욕망이 되었을 때, 개체적 생명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으로 작동될 수밖에 없다.


▲ 영화 <곡성> 포스터.
관계적 욕망의 결과물은 즐거움(혹은 쾌락)의 향유이다. 그러나 관계적 욕망을 구성하는 관계적 주체가 일대 일이 되지 않거나 주인과 노예, 혹은 지배나 피지배의 일방적 관계일 때, 관계적 욕망이 만드는 즐거움의 향유는 일방적인 즐거움의 향유이고, 또한 관계적 대상에 대한 폭력이며 관계적 대상의 생명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나 국가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사디스트적이거나 마조히스트적인 즐거움의 향유만을 생산한다. <아가씨>에서 제국주의 권력이나 자본, 혹은 남성적 권위의 사회적 욕망으로 인해 성적 관계의 근원적 욕망이 사회적 욕망으로 변질된 후견인 이모부나 사기꾼 백작은 필연적으로 사디스트적이거나 마조히스트적인 욕망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는 다르다. 애초부터 남성적 권위나 제국주의적 권력에 대한 욕망이 차단되어 있는 숙희는 돈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망보다 여성적 몸의 생성을 통한 생호생성적 관계의 즐거움에 대한 향유가 더욱 강렬하며, 관계적 대상인 히데꼬의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죽음의 고통을 경험한 이후 마침내 상호생성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일대 일 관계의 욕망이 발현된다. 따라서 히데꼬와 숙희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 생명의 욕망과 상호생성적 사랑이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간적 힘으로 발현된다.

III. 철학의 극장

질 들뢰즈는 오늘날의 영화를 새로운 "철학의 극장"이라고 명명한다. 들뢰즈의 이 말은 이태리의 네오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류 영화들은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과거의 근대적 철학의 상투적인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과 관계의 작동을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영화 <아가씨>는 일본식과 영국식이 결합된 일본제국주의 백작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영화적 사건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 36년의 역사를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식민지 착취론'의 이분법으로만 이해하려는 오늘날의 근대적인 보수/진보 (남성) 지식인들의 고루한 사유방식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시대와 오늘날의 역사를 다시 사유하라고 끊임없이 설득한다. 또한 식민지 역사나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유(철학)는 국가, 권력, 자본 등등의 근대적 세계관이 만든 개념들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삶을 유지하는 근원적 생명, 관계, 욕망 등등의 개념들을 토대로 사유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영화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로 다른 느낌과 감각들을 근대적 관습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명, 관계, 욕망 등등의 개념들로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좋은 영화이다.


이와는 달리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몸의 강렬한 느낌과 감각이 결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별적인 생명들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들이고, 아버지와 딸이나 부부, 혹은 친구의 관계들의 힘은 드러나지 않으며, 심지어 인간의 근원적 생명의 힘이라고 말하는 욕망은 포르노 영화처럼 쓸데없는 영화적 소비의 장치로만 제공된다. 따라서 <곡성>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전근대적인 시골 마을의 경치,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단지 초월적인 것/현실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가시적인 것 등등의 이분법을 통한 선/악의 이분법만을 재생산한다. 특히 "세월호 사건"이나 "옥시 사건"을 통하여 현실적 삶과 생명이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에 의하여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고 있는 근대적 현실 속에서 영화의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삶과 생명과 관계와 욕망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곡성>은 정말로 나쁜 영화이다. 심지어 <황해>와 같이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곡성>과 같은 퇴행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새로운 한류 영화의 관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곡성>의 관객이 500만을 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일제 식민지 시대나 1950년대나 60년대의 근대화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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