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편이지만 오지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대중과 언론의 쑥덕거림에서 자유로운 귀는 불가능하다. 최근 반복해서 나의 귀를 간지럽힌 대표적인 쑥덕거림은 홍상수와 김민희의 사건이다. 가르치는 학생의 글 소재 또한 이 사건이었고, 요즘 식사나 기타 잡담에 반드시 등장하여, 급기야 홍상수란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고 김민희란 배우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보도하는 원칙에 관한, 어찌 보면 하나마나 한 토론을 대학생들과 벌일 기회도 있었다. 일면식 없고 내 삶과 무관한 두 사람의 사건을 두고 굳이 나까지 호사가의 대열에 동참하여 입방아를 보태는 이유는 상식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먼저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남자보다는 여자가 '추문' 유발에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중과 언론의 태도를 지적할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 짙게 드리운 편견 또는 권력의 벗어나기 힘든 그늘 때문이겠지만, 적어도 그게 그늘이라는 인식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흔히들 성경에서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이 죄 많은 여인”의 간통 상대방이 성경에서 소거된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논란에서 분명 두 사람이 관여된 사건임에도 상대적으로 여성의 '죄'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제기한 몇몇 보도가 목격되는데, 사실 이러한 단죄의 성차별은 이번 사건에만 특별한 게 아니라 일관된 현상이다. 사적인 수다나, 사적인 수다나 다름없는 종편 등에서는 하는 수 없다 할지라도 나름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매체들에서 숙고 없는 관점이 채택되는 건 불편한 일이다. 프레시안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기사 제목 안에 "여배우 불륜 스캔들"이란 표현을 써서 아쉬움을 남겼다. 부득부득 시비를 걸자고 들면 그럼 "남감독의 불륜은 미담이냐"고 우길 수 있다.
이 사건은 사생활의 보도준칙 등 이밖에 다른 생각거리 또한 던져준다. 언론이 특정 개인(들)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대중의 알권리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알권리가 공익과 같은 방향으로 정렬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관음증적 알권리마저 보도준칙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체로 공익 관련성이 큰 공인의 사생활은 보도대상이 된다. '박근혜의 7시간'이 분초 남김없이 해명되어야 할 이유는 그가 '죄 많은 여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통령 같이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의 사생활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과거 왕이 자신의 잠자리마저 사실상 공개된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는 역사는 공인의 삶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공인이라 하더라도 공익 관련성이 없다면 사생활이 보호되어야 할 텐데, 공적인 직위가 높을수록 그 관련성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직위가 낮을수록 덜 엄격하게 해석하는 게 합리적 대안이지 싶다.
반면 사인의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다만 사인 간의 또는 사적인 분쟁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에서 공공연하게 억울함 등을 호소한다면 미약하게라도 공익과의 관련성을 전제하여 보도나 사회적 공론화가 가능할 수 있다. 이때에도 연애나 부부생활 등 명백하고 부인되기 힘든 사적 영역은 원칙적으로 공익과의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
이제 홍상수와 김민희가 공인인지 따져볼 시점이다. 가끔 연예인을 두고 혹은 스스로 공인이라고 규정하는데 어불성설이다. 홍상수와 김민희를 포함하여 연예인은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인기 있는 개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엄숙하게 공인의식을 갖지 않아도 된다. 공인을 자처하는 연예인을 보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새마을 완장 차고 이장노릇에 나선 조금 덜떨어진 인간 같다. 물론 대중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스스로 이른바 공인의식에 준하는 사회적 모범을 보인다면 칭찬받을 만하다. 인격자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듯 반듯한 연예인은 조금 더 크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공인이 아니라서 어떤 연예인은 섭섭해 할지 모르겠으나 이점이 있으니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연예인은 다른 사적인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생활을 온전하게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 같은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공인이 아니기에 사생활이 까발려질 어떠한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한 맥락에서 홍상수와 김민희의 사건이 공공연하게 언론에 보도되고 사회적 공론화의 도마 위에 올려 질 까닭이란 전혀 없다.
그러나 현실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사회가 또한 현대 사회가 음란과 관음을 하나의 공식적 산업으로 육성하여 여기서 막대한 돈이 돌고 상당한 인력이 밥벌이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신뢰할 만한 과정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신뢰할 출처를 인용하여 연예인의 신변잡기를 보도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고 막아지지도 않는다. 사생활 보호에 관한 원칙이나 윤리적 보도준칙 등을 떠나서 연예인이란 업종은 인기를 먹고 사는 만큼 그러한 반대급부라는 리스크를 태생적으로 안고 산다고 볼 수 있다. 공인이 아니고, 어떠한 공익 관련성이 없지만 시장논리에 의하여 그들의 사생활은 상업적 대상이 되어 일상적으로 노출될 위험에 처한다. 헌법이나 인권적 가치보다는 시장 가치에 훨씬 더 강력하게 지배받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연예인의 사생활은 비(非)시장 프레임으론 보호받을 수 있지만 시장 프레임으로는 보호받을 수가 없다. 시장화의 기제에선 인권이나 공익 같은 가치가 소멸하고 그저 사익추구만이 모든 행위의 유일한 동인이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현실론을 인정하더라도 원론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론이 사회적 행위를 해명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사회마저 우리는 사람 사는 사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사적인 수다가 아닌 공식적인 담론화의 소재로 활용하려면 최소한의 예의와 숙고가 필요하다. 두 개 프레임이 겹쳐지는 영역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김민희 홍상수 사건을 시장화 기제에 전적으로 맡겨놓는 것은 두 사람에게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 참담한 일이 될 터이다. 개인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부여되는데, 홍상수와 김민희 사건은 그 자체로 '개인의 개인적 책임'에 국한되지만 그들의 사건을 기사화하고 공론화하는 데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 뿐 아니라 언론인을 비롯한 사회 구성원의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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