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가명, 26) 씨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하고 돌아간 집에는 정체불명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목이 긴, 페인트가 잔뜩 묻은 거무칙칙한 갈색 신발이었다. 그리고 그 신발 옆에는 엄마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신발이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작업할 때 신는 작업화였다는 것을.
"엄마, 나 왔어."
일부러 소리를 내고 방문을 여니 처음 보는 남자가 황급히 일어났다. 엄마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둘은 밥상을 차리고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행색이 영 아니었다. 먼저와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거지를 데려온 줄 알았단다. 이 역시도 나중에 알았다. 그때 그 남자가 입고 있었던 옷은 노동자들이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이었다.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남자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자 엄마가 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아까 본 사람 어떠니? 정식으로 인사도 못 시키고 이렇게 보게 됐네...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보자."
아버지와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일종의 '헌팅'이었다. 수줍어하는 엄마에게 초등학교 5학년 딸은 '괜찮은 사람 같다'고 말했다. 아빠를 가지고 싶기보다는 엄마에게 남편이 있었으면 했다. 자신에게 둘의 관계를 들키고 난 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좋은 분 같았다.
딸의 친아빠는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암이었다. 오랫동안 엄마가 아빠의 병시중을 들었다. 그런 엄마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게 어린 나이에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살았으면 싶었다.
늘 자상했던 아버지
그렇게 아버지와는 함께 살게 됐다. 결혼식도 치르지 않았다. 혼인신고만 했다. 아버지는 과거 친구와 사업을 하기도 했다. 망해서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기도 했단다. 그 뒤로는 여기저기 중공업을 돌아다니며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했다. 딸을 만날 때도 그즈음이었다.
집은 부산이었지만 아버지는 늘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몇 달도 좋고 며칠도 좋았다.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하나뿐인 딸과 부인을 먹여 살리려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딸에게 끔찍했다. 생일 때는 늘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어디서 일하든 구애받지 않았다. 그날은 아버지가 딸의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줬다. 깜짝 파티도 열어주고, 아프면 엄마도 제치고 병간호를 해줬다. 부부 사이도 좋았다. 딸이 없으면 신혼부부처럼 지냈다. 살면서 큰 다툼을 본 적이 없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고 했던가. 2011년에는 일하다 철구조물에 발등이 찍히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발등이 으깨졌다. 1년 동안 쉬어야 했다. 다행히 산업재해는 인정받았다. 하지만 완치된 이후에도 중공업의 하청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딸은 큰 사고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걱정됐다. 사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던 딸이었다.
"안전띠 같은 것도 잘 매고 일하니깐 문제될 거 없어. 일도 편해.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
딸의 걱정에도 늘 안전하다며 되레 딸더러 조심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였다. 그랬던 아버지가 변했다. 정확히는 2015년 12월부터였다. 그새 딸은 서울의 중소기업에 인턴으로 취업을 했는데, 어느날 저녁,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전화를 했다.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랐어.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나와야 할 거 같아. 그런데 아빠가 어디 갈 곳 없겠어? 다른 데 오라는 곳 많으니 걱정 하지마."
아버지가 다니던 중공업에 정리해고 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믿지 말아야 할 거짓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변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욕 한 번 한 적 없는 아버지, 그러나...
구조조정 대상자로 올랐으나 아버지는 계속 그곳에서 일을 했다. 일감이 아직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신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잠을 통 자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만난 딸은 어느 때와 비슷하게 영화도 보고 밥을 먹으며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전 같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슬며시 아버지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버지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더 악화됐다. 아버지 직장 동료들에게 전화가 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두 차례나 자살시도를 했다고 했다. 술도 자주 마신다고 덧붙였다. 딸은 깜짝 놀랐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결국, 아버지를 부산집으로 모셨다.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우울증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20~30번씩 딸에게 전화를 했다. 듣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회사 사무실에도 전화를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자신에게 욕을 한 적 없는 아버지였다. 애써 이해하려 했다. 직장을 잃고 난 뒤, 아버지 인생에 남은 게 딸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버지 전화에 딸은 불안증세를 겪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려도 불안했다.
'혹시 아버지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아닐까.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어쩌지?'
사람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 사단이 났다. 아버지 생일인 5월 1일이었다. 딸은 아버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딸이 내일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분위기는 험악하게 됐다. 아버지는 서울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라며 딸을 다그쳤고, 급기야는 폭력까지 행사했다. 딸을 밀쳐서 넘어뜨리고는 발길질을 했다.
"애 좀 보내줘요. 애를 왜 이렇게 괴롭혀요."
엄마가 아버지를 말리자 엄마 목을 조르기도 했다. 폭력의 공포에다가 이전까지 알던 아버지가 맞나 하는 혼란까지 겹쳤다. 하지만 몇 번 눈을 씻고 보아도 자신의 생일날 학교 앞으로 마중 나오던 아버지가 분명했다. 다만, 그때는 꽃을 들던 손이 지금은 엄마의 목을 조르고 있을 뿐이었다.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해고
"000씨죠? 아버지가 살인미수로 붙잡혀서 경찰서에 와 있어요. 여기로 오셔야 할 거 같은데요."
딸이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 동안, 분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엄마에게 분풀이를 했다. 전깃줄로 엄마 목을 조르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엄마의 입 안이 다 터졌다. 뒤늦게 집에 가보니 엄마가 흘린 피가 곳곳에 흥건했다. 자신은 물론 엄마에게 폭력적인 행동도 한 적 없던 아버지였다.
더는 아버지에게 엄마를 맡겨놓을 수 없었다. 폭력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엄마를 이모집에 보냈다. 경찰에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접근금지 임시조치를 요청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아버지와 이혼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살다가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거 같았다.
해고가 단란했던 한 가정을 파괴한 셈이었다. 딸 이정연 씨는 아버지가 이렇게 된 이유가 해고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회사를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세상을 원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은 딸의 한숨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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