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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하마드 알리는 끊임없이 입을 놀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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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하마드 알리는 끊임없이 입을 놀렸을까?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다 ②] 가장 위대한 자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스포츠 철학을 공부하는 정계화 씨가 2016년 6월 3일 세상을 뜬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짧은 연재를 시작합니다. 알리를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다시 한 번 그를 떠나보내는 기회를, 알리를 미처 알지 못한 독자에게는 스포츠를 넘어서 뜨겁게 살았던 한 아름다운 인간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가 위대하다는 것을 알기 훨씬 전부터 나는 그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위대하다(the Greatest)"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남들이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인정하기 한참 전부터, 심지어 챔피언이 되기 한참 전부터 그는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사내가 등장하기 전에 또 그 사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스포츠 세계에서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 경우는 없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리라.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가 어떤 꼴을 보게 되는지는 최근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Floyd Mayweather jr.)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 바가 있다.

메이웨더가 자신이야말로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을 때, 그에게 돌아간 것은 싸늘한 시선과 실소 그리고 조롱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솔직히 좀 과한 농담을 했으려니 한다. 특정 종목을 막론하고 마이클 조던이 그렇게 말했다면 내 고개가 끄덕여졌을 테지만, 그조차도 스스로를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러주었을지언정.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다

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

그 사내가 나타나기 전에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스포츠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가 사회적으로 분명히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만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챔피언들은 하나같이 과묵했다.

기실 자신이 무어라고 말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는가? 스포츠 선수에게는-구기 종목처럼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또는 복싱처럼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든-"상대를 때려눕히는" 능력이 스스로 무어라고 칭하는 능력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라면 말이다. 그들에게 과묵은 미덕이었고, 말은 곧 공포심의 방증일 뿐이었다.

그 사내 이후에도 운동선수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은 작금의 슈퍼스타들이 진짜로 겸손한 인사들이기-"호날두"와 "겸손"? 딱 봐도 영 그림이 아니다-때문이 아니라, 이미 체계화될 대로 체계화되어버린 현대 스포츠의 이미지 관리 전략에서 나온 행위 코드라는 의심 먼저 들게 한다.

요즘처럼 PR과 프레젠테이션이 중요한 세상에 그들이 그 사내처럼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행위 코드에 충실한 것뿐이지, 진짜 겸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대중들은 악당보다는 "뻔뻔한" 인간을 더 싫어하고, 현대 스포츠는 바로 그런 대중의 지속적 관심을 먹고사니까.

그런데 그 사내만큼은 모든 게 달랐다. 로마에서 금메달을 따고 프로로 전향한 후 그가 "뻔뻔하게"도 "내가 제일 위대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왠지 극에 달한 오만과 독선이 아니라,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끼와 자신감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그가 세 번째로 챔피언에 등극하고 링에서 "내가 여전히 가장 위대해"라고 말했을 때, 심지어 그를 증오해왔던 사람들조차도 그가 밟아왔던 삶의 궤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수 없었다.

그랬다. 스스로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는 레녹스 루이스가 제대로 짚고 있는 것처럼 "재능"과 "용기" 그리고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내였다. 그의 재능은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만 했으며, 그 무엇도 심지어 국가 권력도 그의 용기를 꺾을 수 없었다. 또 숭고한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쇠쟁기를 끈다던 파리처럼 모든 사람들이 열세를 점치고 있을 때마다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어 냈다.

그렇다.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가장 칭송되고(Muhammad) 가장 숭고한(Ali) 자"였다. 이름대로라면 "가장 위대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이상할 판이다. 적어도 슈퍼맨과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그는 DC Comic에서 출간된 영웅 시리즈에 실재 이름을 가지고 나온 유일한 생존 인물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에게 무엇보다 통쾌한 것은 시간을 되돌려 생각하면 그의 "위대함"이란 게 결국 한 무명 복서의 자기 주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가장 위대하다"라는 자기 주장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굴하지 않는 용기와 만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뒷받침 되면서 그를 말해주는 객관적인 수식어가 되어 갔고, 그를 증오하든 사랑하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하나의 사실처럼 자리 잡아갔다.

주장을 현실로 바꾸는 자. 그건 바로 니체가 말한 "강한 자"의 본질적 내용 규정 아니던가? 이제 알리가 죽은 날 레녹스 루이스가-확실히 링 위에서 함께 보낸 3분은 사무실에서 보낸 3년보다 서로를 잘 알게 하는가 보다-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겨놓은 세 가지 화두(재능/용기/신념)를 따라 어떻게 한 애송이 복서의 자기 주장이 점차 사회적 현실이 되어갔는가를 추적해 볼 시간이다.

천부적인 재능 : 몸놀림만큼이나 눈부셨던 입놀림

재능은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세상에 널리 알린다. 이는 무하마드 알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능은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았고, 끼는 차고 넘쳤다. 그의 재능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가 가졌던 재능은 무엇인가? 운동선수로서의 탁월한 능력?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는 한 스포츠 영웅이 되지는 못한다. 스포츠라는 은하에 그저 그렇게 또 수없이 명멸해간 스포츠 스타가 될지는 몰라도. 우리를 매료시켰던 그 재능의 저변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는 링 위에서 가장 움직임이 많았던 복서이다. 이제껏 그보다 링에서 많이 움직이고 또 뛰어다닌 선수는 없었다. 권투 역사상 가장 날랬다던 슈거레이 레너드도 효과적으로 움직였을 뿐, 그만큼 화려한 움직임으로 권투 경기를 수놓지는 않았다.

모든 권투 선수들은 링에서 밟는 스텝을 그저 풋 워크(Foot Work)라고 이해하고 또 그렇게 부른다. 워크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노동 세계의 고단함을 전달한다. 그건 말하자면 싫지만 해야 하는 일, 사정만 된다면 기꺼이 하지 않을 일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움직임과 스텝을 단 한 번도 풋 워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것을 "춤추기(Dancing)"라고 불렀다. 그것은 예술 세계의 즐거움과 유희를 연상시킨다.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똑같은 발놀림은 그 표현에 따라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온다. 내일 시합을 앞두고 어떤 전략으로 임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현실적인 질문에 그는 으레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전 그와 함께 춤을 출거에요. 밤새도록."

"댄싱"이라는 말은 내게 무하마드 알리가 발휘하는 재능과 그로부터 발휘되는 그 묘한 마력을 매우 응축적으로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그가 지녔던 재능은 다분히 이중적이고 또 역설적이다. 마치 댄싱이라는 말이 곧 "행위"이면서 동시에 "표현"이라는 근원적인 이중성과 역설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행위와 말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서로 배리 관계에 놓여 있는 매우 이질적인 두 요소이다. 내가 하는 행위는 온전히 말이 되지 못하고, 내가 하는 말이 온전히 행위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 역설적이고 배리적인 관계를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동선수에게 말은 원론적으로 불필요합니다. 반대로 학자에게 행위 자체는 그 어떤 원론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래서 둘이 만나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지요. 그리고 그건 스포츠 인문학이 처하게 되는 어떤 근원적인 난제를 시사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리에 견줄 만한 신체 사용 능력을-물론 엄청나게 드문 케이스기는 하겠지만-지닌 선수들은 그것을 "댄싱"이라는 하나의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것을 댄싱으로 개념화시킬 수 있는 학자들에게는 물론 그것을 체현할 신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옳다면, 즉 말과 행위 사이에 근원적으로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그야말로 서로 배리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이질적인 요소의 역설적이고 이상적인 결합체였다. 그랬다. 그는 가히 춤추기에 가까운 신체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런 신체적인 능력에 "댄싱"이란 표현을 부여해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을 동시에 지녔던 거의 유일한 스포츠맨이었다.

서로 맞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가 역설적으로 결합되면 정말 올가미와도 같은 마력을 발산하는데, 무하마드 알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1975년 알리에게 도전한 바 있는 론 라일 역시 이런 마력에 푹 빠져든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알리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그가 하는 행위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이지요."

두말 할 나위 없이 무하마드 알리는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젊은 시절 그가 치렀던 몇몇 시합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고, 그저 눈부실 정도로 빛이 난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링 위에서 그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민첩함과 기민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손은 정말 빨랐고, 빠른 만큼 째는 듯이 매서웠다. 흐르는 듯한 중심 이동과 고개의 움직임과 연동된 허리놀림에 상대의 펀치는 거의 대부분 허공을 가르기만 한다.

"저는 링에 오르기 전과 링에서 내려온 모습이 똑같은 유일한 복서 입니다. 허긴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손이 어떻게 때리겠어요?"

완벽한 신체의 조율과 제어 능력은 그만의 독특한 아웃 복싱 스타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앤젤로 던디를(알리의 평생 트레이너였다)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모든 트레이너들이 절대 금기시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복싱 ABC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알리의 손은 안면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항상 허리춤에 머물러 있다. 얀 필립 렘츠마(Jan Phillip Reemtsma)에 따르면 복싱 교본에는 치명적인 허점으로 규정되는 그만의 아웃 복싱 스타일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체 제어, 조율 능력과 결합되면서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일단 상대에게 그의 스타일은 겉보기와는 달리 훨씬 큰 공포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펀치가 어디서 날아드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제나 허리춤에 머무르고 있는 그의 주먹은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다. 특히나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올라간 상대의 손은 스스로의 시야를 더욱 좁히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스타일은 상대에게 시야의 비대칭을 강제한다. 그의 주먹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고 상대의 주먹은 그의 시선 바로 앞에 놓이게 된다. 그는 상대의 예상되는 공격을 빤히 보고 있지만, 상대는 그의 주먹이 언제 어디에서 날아들게 될지 전혀 종잡을 수 없다. 얀렘츠마에 따르면 이런 비대칭성이야말로 알리가 링 위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절대적 지배력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 절대적 지배력은 일차적으로 상대 선수와 상관되는 일만은 아니다. 알리의 말처럼 권투가 "백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관중) 벌어지는 흑인 두 명(선수)의 주먹다짐(콘테스트)"이라면, 알리의 복싱 스타일은 당연히 관중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작용을 미친다.

로마민법에 따르면 "셋이 모여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손을 자유롭게 쓰면서 그의 움직임은 더욱 수려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이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두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팔을 마음껏 전후로 휘저으며 뛰고, 다른 한 사람은 양손을 턱에 댄 채 뛴다고 할 때 과연 누구의 움직임이 자유롭게 보일지를 생각해보라. 알리의 스타일은 직립을 통해 양손을 자유롭게 놀리게 되었을 때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당연히 이는 관중들에게는 엄청난 자신감의 발산으로 다가오고, 링 위에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놀라운 반사 신경,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 흐트러짐 없는 중심 이동, 자유롭게 노는 팔 동작은 미학의 고전적인 이상인 균형성과 우아함을 구현하고, 이런 자연스러운 움직임들에서 나오는 가속도는 펀치의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더해 간다. 말 그대로 "나비처럼 흘러서 벌처럼 쏘다!" 자체이다.

그리고 이 벌과 나비의 결합은 하나의 역설이다. 우아함은 파괴성을 배제하고 파괴력은 우아함을 거부하는 게 상례이지만 이 상례는 알리의 움직임에서 깨진다. 하늘거리는 나비의 펄럭거림에서 나오는 예리한 벌침. 마치 언어와 행위의 역설과 마찬가지로 "벌나비"는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 그의 경기에서 느꼈던 그 마력의 발전기였다. 그의 경기는 말 그대로 "백인들이 지켜보는 흑인들의 주먹다짐"이라기보다는 무슨 한 편의 시적 무대 연출 같은 미학적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전달력은 젊은 시절 무하마드의 경기를 가히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그것이 경기와 시합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건장한 사내들의 주먹질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주장하듯이 문명화 과정을 거친 현대의 문명인들에게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이다. 주먹다짐을 보고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은 문명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인간들의 반응 양식이다.

권투 경기는 분명 문명에 반하는 행위이며, 미국의 여성 수필가 조이스 캐롤 오아테스(J. C. Oates)에 따르면 인간에게 존재했던 그리고 우리 내부 어딘가에 잔존하는 원시적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권투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제의(Ritual)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제껏 대부분의 헤비급 챔피언들은 대부분 이런 원시적인 폭력성을 구현하는 타입이다. "찾아라, 부숴라 그리고 박살내라!" 잭 존슨, 소니 리스턴,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경향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 선수들의 무차별적인 주먹질은 문명화된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의 펀치를 맞는 상대 선수에 대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런 주먹을 맞는 상대 선수는…" 하며 몸서리를 치게 마련이다. 그것은 매질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정서와 감정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문명적인 반응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는 이런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과 몸속에 각인된 자연 발생적 수준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유일한 경기였다. 오히려 그의 경기는 가격의 미학을 구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피학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가학의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상대를 저렇게 때릴 수도 있는 거구나!"

그의 경기는 묘하게도 관전자들에게 맞는 사람보다는 때리는 자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가 링 위에서 한 일이 본질적으로 주먹다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경기라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놀이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을 예술적인 경지로 고양시킬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권투 선수였다. 이 예술적인 경지에서 그가 치른 경기들은 관전자들에 의해 다양한 의미들로 해석되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의 경기는 흡사 자연적 움직임 대 기계적인 움직임(조 프레이지어)의 대결, 인간의 능력 대 자연의 무차별적 폭력(조지 포먼)의 대결, 문명적인 행위 대 야수적 행위(소니 리스턴) 간의 대결처럼 비쳐졌다. 그랬다, 권투라는 "주먹다짐"은 더 이상 야수적인 "주먹다짐"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어떤 아름다운 행위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말하기와 움직임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운동선수로서 그가 우리에게 선사했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노먼 메일러가 맞다. 만약 누군가 그의 경기를 애써 그냥 또 하나의 야만적인 주먹질이라고 폄훼한다면, 우리는 메일러에 따라 렘브란트의 <야경>도 그저 한 페인트 공의 의미 없는 "뺑끼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종이 위에 그적 댄 의미 없는 "낙서"에 불과하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 내 기억으로 그보다 말이 많았던 선수는 이제껏 없었다. 링 밖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살인적인 주먹이 오고 가는, 잠시 잠깐의 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링 위에서조차도 그는 상대에게 말을 걸고 관중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보통 권투 선수들은 말이 없다. 링 위에서는 물론이고 링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말(언어)과는 다른 능력들이 요구되고, 그 직업상의 요구가 링 밖에서 그들의 행동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과묵은 곧 권투 선수들의 지켜야할 덕목이자 아비투스이다. 링 위에서 그 어떤 식으로든 발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복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극단적인 예외이자 철저한 파격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무하마드 알리는 경기를 치르는 와중에도 상대 선수에게 말을 걸었던 유일한 복서이다. 경기 중 그는 상대를 언어적으로 조롱하고 우롱하고 희화화시켰다. 메일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럼블 인 더 정글"에서 살인적인 주먹을 휘두르는 챔피언 조지 포먼의 귀에다 끊임없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 조지, 정말 이게 다야? 정말 이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야? 이거 엄청 실망인걸, 어디 한 번 제대로 쳐보라고. 우리가 팝콘이나 튀기려고 링에 올라온 건 아니잖아?"

물론 그의 탁월한 운동 능력과 반사 신경이 없었다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언제든지 한 방에 상대를 보내버릴 수 있는 조지 포먼 앞에서 그런 행위를 실행한다는 것은 여간 상상이 가질 않는 일이다. 그의 이런 발화 행위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전략적인 효과를 발했다.

그것은 언제나 일차적으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의심에 빠뜨리며-실제로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소니 리스턴은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게 아니라, 어떤 미친놈과 싸우는 줄 알았다고 한다. 미친놈을 무슨 수로 이겨먹겠는가?-급기야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고 상대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경기를 보는 관전자들에게 그것은 왠지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제를 보란 듯이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링 위에서 말을 거는 알리의 발화 행위는 상대 선수를 직접적으로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간접적으로 오히려 관중들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관중들에게 어떤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행위이다. 그것은 링 위에서 철저한 지배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나아가 그는 실제로 경기 중에 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행위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경기 중간 중간 관중들의 연호를 유도하고, 자신을 응원하는 관중들을 향해 상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몸짓을 보냈으며, 그를 야유하는 관중들을 향해서는 상대와 함께 희롱하는 몸동작을 취하기 일쑤였다. 이를 실행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축구선수가 드리블을 치는 가운데 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특정 몸동작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렇게 그는 경기행위 중에도 관중들과의 언어적 비언어적 접촉을 시도한 유일한 복서이다.

혹자는 알리의 행위를 그저 흥행 몰이를 위한 액션이나 괴짜 복서의 쇼맨십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확실히 단견이다. 이런 치부는 그의 행위에 담겨 있는 훨씬 깊은 의미들의 층위들을 필연적으로 간과하게 만들고 "프로 스포츠"가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가로막는다.

알리가 시도하는 접촉은 관전자들을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끌어들인다. 관중들은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나 그저 수동적인 관전자가 아니라, 이런 사건들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알리의 취하는 액션에 증오의 시선을 보내거나 반대로 그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수동적인 관전자나 객관적인 관찰자로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

알리가 시도했던 그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시도에 접촉되는 순간 수동적인 관전자는 링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증언의 능력을 지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원래 시합(contest)이라는 게 "함께 모여(con) 증언하는(testi)" 일 아니었나? 가히 알리라는 현상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프로 스포츠 세계에 가져온 중요한 의미 변화이자 의미 회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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