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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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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다 ①] 매력 덩어리 알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스포츠 철학을 공부하는 정계화 씨가 2016년 6월 3일 세상을 뜬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짧은 연재를 시작합니다. 알리를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다시 한 번 그를 떠나보내는 기회를, 알리를 미처 알지 못한 독자에게는 스포츠를 넘어서 뜨겁게 살았던 한 아름다운 인간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74년 10월 하순으로 기억한다(1974년 10월 30일).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날의 분위기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버지와 삼촌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분위기는 들떠 있었고 술렁대었다. 초조하게 무엇을 기다리는 눈빛들. 바로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있었던 날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증인 신문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경기이다. "김일성이 알리 응원했다고 내가 알리 응원하면 나도 국가보안법?"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닐 암스트롱이 달에 인류의 발자국을 박아 넣은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첫 위성 생중계가 아니었나 싶다. 1년에 딱 이틀만 쉬시던(설날과 추석날) 아버지마저 가게 문을 잠시 닫으시고 중계를 보려고 집으로 오셨으니 그날의 관심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만큼이나.

주변의 몇몇 이웃도 우리 집에 찾아와 경기를 기다리던 모습은 왠지 어린 가슴에 못돼 먹은 교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집에 TV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야.'

경기가 있기 전 대부분 어른의 예상은 이랬다. 포먼 1라운드, 포먼 3라운드, 포먼 4라운드, 포먼 2라운드…. 포먼의 경기를 어린 눈으로나마 몇 차례 녹화 중계로 본 나도 수많은 어른들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조지 포먼! 그는 정말 권투의 히어로였다. 그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When we were the kings) 자신을 알아볼 시간을 상대에게 주지 않고 바로 바닥에 눕혀 버렸으니까. 무참하게 처참하게.

탐색전 그런 것은 포먼에게 없었다. 발견해서 파괴하라. 어린 눈에 권투 경기는 그래야 했다. 아무튼, 대다수 어른들의 평가는 길게 가야 5라운드라는 것이었고 어린 나에게 5라운드는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만은 좀 더 신중한 예상을 하셨는데 경기가 달리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신께서는 어떤 기회로든 젊은 날의 알리, 즉 타이틀을 억울하게 박탈당하기 전의 캐시어스 클레이의 경기를 보신 게 틀림없다.)

그랬다. 경기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곧 나가떨어질 것이라던 알리는 좀처럼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로프에 몸을 기댄 채 잔뜩 웅크리고 날아오는 펀치를 맞으며 라운드를 보냈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알리는 "뻔뻔하게도" 나의 복싱 영웅 포먼의 안면에 유효타를 꽂아 넣었다.

라운드가 지나갈 때마다 포먼은 어린 눈에 보기에도 힘이 빠진 것으로 보였고 급기야 8라운드에 알리의 오른손 크로스가 날아들었을 때, 나의 복싱 영웅은 그만 링에 쓰러지고 말았다.

무하마드 알리. 어린아이에게 그는 어떤 의미였는가?

"저열한 놈, 치사한 놈, 정정당당하게 상대와 맞붙지 않고 힘을 빠뜨린 후에 마치 뒤통수를 후려 갈기듯 상대를 속여먹는 치졸한 놈."

'로프 어 도프'(rope a dope, 말 그대로 옮기면 '멍청이를 로프로 묶다' 정도가 되겠는데, 알리는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에서 그날 자신의 전술을 이렇게 칭했다. 참고로 말하면 링을 등지게 되고 구석으로 몰리게 되는 것은 모든 복싱 선수에게 거의 무의식적 차원의 금기 사항이다)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흘러야 했다.

내가 본 알리의 두 번째 경기는 1977년 9월의 화창한 날이었다. 그간 2년의 세월이 흘렀고, 아마도 흐른 시간만큼이나 머리에 피도 조금은 더 말랐을 것이다.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마침 KBS는 어니 세이버스를 상대로 한 무하마드 알리의 타이틀 방어전을 녹화 중계하고 있었다.

여전히 알리는 변함이 없었다. 링 구석에 웅크리고 상대의 펀치를 맞아가며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늙고 추하며, 무엇보다 저열한 복싱 선수였다. 2라운드와 7라운드 그리고 14라운드에 세이버스는 몇 대의 적중 타를 알리 안면에 날렸고, 그를 비틀거리게 하였다. 드디어 저 늙고 치졸한 복서를 골로 보내버릴 선수가 나오는 듯싶었다.

그리고 15라운드.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 라운드에서 비틀거렸던 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세이버스 안면에 믿기 어려운 연타를 적중시켰고, 급기야 라운드 후반에 세이버스를 비틀거리게 하였다. 만약 로프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세이버스는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뭐랄까 황혼에 접어든 사자의 마지막 포효라고 할까? 늙은 복서는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불사르고 있었다. 세이버스 안면에 꽂히는 연타들은 순간 내 머리에-내 아버지가 봤다던-"젊은 날의 그의 모습은 정말 어땠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다. 이 의문을 진지하게 따라가기까지 또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1995년 6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 중이었는데 TV에서 알리 관련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지켜보게 되었다. 알리의 독일 방문을 계기로 서부독일방송(WDR)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다큐멘터리에서 지미 엘리스와 그의 아내가 한 알리에 대한 회상 인터뷰였다.

참고로 말하면, 엘리스는 알리와 동향 친구이고,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였으며, 알리가 야인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 챔피언 선정 토너먼트에 우승해 잠시 세계 챔피언이었고, 예의 조 프레지어(알리의 라이벌)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복서이다.

그 인터뷰에 따르면 엘리스의 아내는 남편에게 알리와의 시합을-아마도 알리가 치렀던 경기 중 그 어떤 압박 없이 가장 즐겁게 또 가장 유희적으로 치렀던 경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꼽는 알리의 다섯 경기 중 하나이다-앞두고 이렇게 주문했다. (☞바로 보기 : 무하마드 알리 vs. 지미 엘리스)

"가서 알리를 이기고 와요. 하지만 절대로 그를 아프게는 하지 마세요. 털끝만큼이라도 그를 다치게 해서는 안 돼요!"

순간 나는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알리가 말한 대로 복싱 경기가 "수많은 백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지는 두 흑인의 싸움박질"이라면 어떻게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고 상대에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의 주문에 따르면 엘리스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알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바로 그녀가 자신의 남편에게 했던 바로 이 주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상대 선수의 아내에게 이런 보호 아닌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랬다. 그에 대한 관심은 한 "걸출한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한 "위대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생각에 복싱은 그에게 너무도 작은 세계였고, 상대적으로 그는 그저 한 사람의 복서이기에는 너무도 큰 인간 존재였다"라는 포먼의 평대로 결코 스포츠라는 세계로 가둬지지 않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 말이다.

2000년 밀레니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놀이에 환호하고 있을 때, 난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연작 다큐멘터리([The Greatest])로 그야말로 날 밤을 까고 있었고, 결국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미 엘리스의 아내 메리 엘리스와 똑같이.

그리고 2016년 6월 4일 나는 술과 함께 그를 떠나보냈다. 그의 나머지 삶을 지겹게 따라다녔던 파킨슨병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말이다.

"무하마드, 잘 가시게!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떨지 마시고. 부디 알라 앞에서 예의 발놀림과 입놀림도 함께 찾으시기를 (…) 내 가슴에 남아있는 'Forever Young'의 모습 그대로 (…) 그대 있음에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웠으니…."

"신의 발가락" 그리고 "민중의 챔피언"

그의 죽음을 두고 세계가 잠시 잠깐 시끄러웠다. 길든 짧든 수많은 추모의 술회들이 각종 매체를 타고 돌아다녔다.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 민권 운동가였던 운동선수, 복싱 역사상 길이 남을 위대한 챔피언, 반전주의자, 회교도, 외교가, 시인, 불멸의 스포츠 영웅….

그리고 대저 우리들의 경험이 그러하듯 또 세계는 다른 관심거리로 옮겨갔다. 이 모든 추모의 술회들을 종합하면 대충 알리는 자신의 타이틀을 희생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민권 운동을 주도한 불멸의 그리고 불세출의 스포츠 영웅이다. 다시는 또 나타나지 않을….

다 맞는 말이다. 여기에 내가 덧붙일 것은 없다. 그런데 진정 그를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질문은 남는다. 이런 객관적인 의미 말고 그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과연 한마디로 어떤 존재일까?

기실 수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결국 대답을 포기했다. 로버트 립사이트(알리가 활동했던 1960~70년대 <뉴욕타임스>의 스포츠 기자)는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바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얀 필립 렘츠마도 대답을 포기한 사람들 중 한 명인데, 그가 단 이유는 너무도 많은 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말솜씨는 그저 한 사람의 권투 선수이기는 너무도 재치가 있었고, 한 사람의 시인이기에 그의 주먹은 너무도 매서웠다. 그냥 단순한 광대이기에는 너무도 예리한 지성을 지녔고, 외교관이 되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너무도 몰랐다.

또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그가 무엇보다 원했던 것이 아니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기에 너무도 돈과 여자를 좋아했고, 사업가이기에는 이재에 너무 어두웠으며, 교육자이기에 그의 학력은 너무도 짧았다(1960년대 거의 대부분의 흑인 복서가 그렇듯 그도 공부와는 아주 담을 쌓고 살았던 사람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면면을 지니고 있어서 그 무엇으로 하나로 그를 고정시키려고 하면 바로 다른 모습이 겹쳐져 상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다. 희랍의 모든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정말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게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냥 그 정의를 그 스스로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며, 자신이 내린 정의가 바로 나에게 그가 차지하는 의미일 것이다.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알라가 세상에 내어준 천사가 아닌가 싶다. 실제로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좀 엉뚱하게 "신의 발가락"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내린 정의의 이유였다.

말하자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은 일종의 천사와도 같은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는 마치 천사와도 같은 그런 인간 존재였다. 어찌 보면 또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전설과 모든 성담에서 그러하듯 천사가 매우 다양한 형상을 지니고 현현한다는 것은. 따라서 립사이트가 말한 천 개의 얼굴은 아마도 알리라는 "천사"가 띠었던 다양한 형상들의 면면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처럼 링 위에서 흑인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팼고–어떤 경기는 정말 경기라기보다는 학대와 고문에 가까웠다-, 때로는 저항자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으며, 때로는 지식인처럼 부정의 한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의 명문대에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가 믿는 신의 말씀에 따라 그는 언제나 약자들 편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했고, 그들과 함께 불의에 맞섰으며, 그런 불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마음껏 희롱했다.

그의 정의대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단순히 권투를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어두운 곳을 누벼야 하는 "신의 발가락"이라면, 그는 한 번도 세계 챔피언이 아닌 적이 없다. 심지어 그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라이선스를 잃어 야인의 시간을 보내던 때조차 그는 여전히 "신의 발가락"이었고, 그래서 그는-복싱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명문 대학을 돌아다니는 일련의 순회강연에서 그는 언제나 정충들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한다.

"Who is the real heavyweight champion of the world?"

그는 언제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에게 내세운 요구였던 "민중들의 챔피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와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하게 되었다. 만약 수많은 언론매체에서 회자되고 있듯이 그가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종류의 불세출의 챔피언이라면 그 이유는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도, 그가 세 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기 때문도 아니라, 점점 체계화되고 행정화하는 현대 스포츠 세계에서 그처럼 민중들의 삶에 파고든, 민중들과 함께 하는 천사 같은 챔피언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자신의 남편에게 내세운 메리 엘리스의 "부당한" 요구는 어찌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군들 이 독보적이고 각별한 "신의 발가락"이 조금이라도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이렇게 그는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때로는 매서운 주먹으로, 날랜 몸놀림으로 그게 아니면 때로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그게 아니라면 촌철살인의 입놀림으로, 기지와 유머 그리고 필요하다면 조롱과 희롱으로 팍팍하고 암울했던 1960~70년대를 살아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먹먹한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던 그런 인간 존재였다.

아마도 알리에 대한 포먼의 평가는 이런 각별한 인간 존재와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레리 홈즈의 말처럼 그는 링 위에서든 링 밖에서든 그를 체험한 "모든 사람의 기분을 왠지 좋게 만들었고", 그렇게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리네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를 바꾸지는 못했다. 천사는 어디까지나 신의 말을 전달하는 존재 아니던가? 스포츠를 통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스포츠 태동기 일부 얼빠진 엘리트 이론가들이 품었던 오래된 환상이다. 장폴 사르트르의 전언을 믿자면 문학과 예술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스포츠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다. 문학도 예술도 그렇듯이 스포츠도 우리네 삶을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풍부하게는 만들어 줄 수 있다. 돌이켜보면 1975년 10월 그 어느 날 어른들의 표정에서 읽혔던 이상야릇한 흥분 상태는 아마도 한 천사가 제공하는 한 판의 시합을 통해-마치 프란시스 고야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 밥 딜런과 비틀즈의 노랫말이 그런 것처럼-맛볼 수 있는 후련함과 따뜻함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나 싶다.

결론짓자면 알리는 입증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신을 등에 없고 세계의 어두운 곳곳을 누비며 기적을 행했던 천사였던 게 분명하다. 신을 등에 업지 않고서야 일자무식의 복싱 선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한 마리의 파리가 쇠쟁기를 끌 수 있다고 / 그대에게 말하는 나는 좋은 사람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 파리에게 쟁기를 매라."

이 시는 독일의 문필가 본더라첵의 전언에 따르면 소니 리스턴을 꺾고 처음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 전 날 모두들 그가 진다고 말했던 사람들 앞에서 스물두 살짜리가 되뇌었던 시란다.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재능이며, 미워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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