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라는 정치 용어가 보수 정치인 유승민 의원의 브랜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최근 유 의원은 대중 강연 등을 통해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보수 혁명'이라는 정치적 어젠다를 제시하면서 그 밑바탕을 이루는 정치철학을 공화주의로 내세웠다. 그는 공화주의를 "공공선을 담보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시민적 덕성을 실천하는 정치 질서"라고 정의했다.
공화주의라는 용어만으로는 그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하는 각론을 들으면 그의 주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은 당연히 쿠데타이고, 그가 만든 민주공화당이 오히려 공화라는 참뜻을 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사회 전체가 재벌의 인질이 된 듯이 재벌이 살아야 한국 경제가 산다는 말은 잘못됐다. (…) 민주주의가 금권 정치가 되면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실상 시민권을 잃는 것과 같다. 이대로 가면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인다. (…) 계층·신분은 상속돼 세습 자본주의가 되고 한 사회가 건강하게 가기 위해 중요한 능력·실력에 따른 능력주의가 파괴되고,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부패와 불공정이 만연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 중 공화국이 아니라고 본다."
언뜻 보아 야권의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이 한 말이라고 착각할 만하다. 2대에 걸쳐 군사 독재 정권을 모태로 삼고 있는 새누리당에서 성장해 온 보수 본류 정치인의 발언이라 하기에는 귀를 의심할 정도다.
유승민 의원이 주장하는 공화주의의 근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헌법 1조의 헌법 정신이다. 우리가 유 의원의 주장에 접하면서 좀 어색한 이유는 그가 몸담아온 새누리당이 우리의 헌법 정신을 수호하는 정당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나타난 종북몰이, 국가정보원 등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 그리고 재벌과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해온 그간의 정치 행위 등이 유 의원이 내건 공화주의 정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 의원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 발전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냉전 시대와 친재벌 경제 구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수구 세력에서 건강한 보수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징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승민 의원이 언급하지 않은 역사적 진실이 있다. 그가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헌법1조에 담긴 헌법 정신이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수천 년 동안 동양적 전제 군주제 문화가 골수에 스며든 우리나라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정신이 어떻게 세워졌을까?
우리나라의 전제 군주제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강한지 역대 모든 대통령은 '나라님'으로 불려왔다. 심지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원리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조차 국호가 무색하게 가장 동양적 군주제인 수령 왕조로 바뀐 곳이 바로 한반도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을 깨뜨리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공화정은 오로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민중이 쟁취한 결과물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래 민주공화국이라는 문구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정신이 된 것은 6월 항쟁의 승리를 통해서였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내용적으로는 왕정에 가까운 군주제였다. 그렇지만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으로 불붙은 민중의 열기가 1987년에 이르러 독재 타도를 내세운 6.10 민주 항쟁으로 거대하게 타올라 마침내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 민주공화국이라는 소중한 헌법 정신을 살려내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점차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군주제에 대비하여 시민의 참여와 덕목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는 상호 수렴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유 의원의 이러한 보수 혁명 주창이 민주주의의 본류라고 자처하는 야권에게는 참신한 자극제가 되고 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정신이야 말로 현 야권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본다면 야권은 더욱 분발해야 마땅할 것이다.
야권은 6월 항쟁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젊은이들이 드디어 지도자로 부상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인영 의원, 우상호 원내대표, 문재인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의원, 김영춘 의원 등 6월 항쟁을 선두에서 이끈 투사들이 어느덧 대통령 후보와 당 지도부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들 모두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과제의 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필자는 특히 이들 중에서 '더 좋은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자신의 정치 주제로 삼아온 안희정 지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유승민이 공화주의에 천착하고 있는 반면 안희정은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평생에 붙들고 살아왔다.
전대협의 대부라고도 불렸던 안희정은 6월 항쟁 세대가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의 충격으로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그리고 이후 민주화 운동권이 총체적으로 방황할 때도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붙들고 정치권에서 끈질기게 승부를 벌였고, 마침내 노무현 정부의 탄생이라는 신화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였다.
노무현 정부 말기 민주 세력이 치명적인 내분에 휩싸이면서 친노가 '폐족'으로 전락하는 어려운 시기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역사의 정통성을 견지하고 가치를 심화시키겠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더 좋은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꿈을 설계해 왔다.
유승민이 지식을 통해 공화주의를 설파한다면 안희정은 인생 전체의 역정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증거하고 있다. 2007년 펴낸 <담금질 : 안희정의 새로운 시작>에서 그는 "민주주의는 인류사가 도달한 가장 좋은, 가장 효율적이며, 가장 생산적인 사회운영 원리입니다. (…)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일이 386 세대라 불리는 '고교 평준화 세대, 보릿고개 후손 세대'의 의무이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6월 항쟁 29주년을 맞이한 지금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민주공화국의 본질적 가치를 파고드는 정치인이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캐치프레이즈와 정치 공학이 난무하겠지만, 정치 지도자라면 한반도를 둘러싼 판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
내년(2017년) 대선은 6월 항쟁 30주년에 치러진다. 현대사를 양분해온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다시 역사적 승부를 벌이는 30년만의 대회전이 될 수밖에 없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세력은 남한에서 지배적 패권 세력으로 성장·군림해왔다. 박정희가 키운 세력은 하나회라는 영남 군벌, 재벌, 관료 제도라는 3개의 축이 중심인데,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벌 출신, 이명박은 재벌 출신, 그리고 박근혜 현 대통령은 그의 직계 혈족이었다. 이제 박근혜 세력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차기 대선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반기문이야말로 관료 제도에서 성장한 최고의 총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대선이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출발점이 되려면 여권과 야권 공히 박정희 시스템을 극복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반기문이 여권 후보가 된다면 이는 또 다시 박정희 시스템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고, 유승민이 여권 후보가 된다면 박정희 세력이 새로운 시대로 진화하겠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세력을 정치 철학적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유승민의 보수 혁명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유승민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박정희 세력은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한편, 민주 진영 역시 박정희 시스템을 대체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야권의 상태는 지금 좋지 않다. 그동안 민주 진영의 두 축인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세력이 전면적으로 갈등하고 분열한 끝에 마침내 분당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어부지리를 얻은 안철수 세력이 박정희 세력과 민주 세력 사이의 틈새에서 새로운 정치 공간을 창출하려 한다.
한 마디로 더불어민주당이 민주 진영의 본산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 세력은 박정희 세력의 패권적 지배를 끝내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실현을 통해 한반도에 번영과 평화적 통일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민주 세력이 다시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6월 항쟁과 그 세대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다. 6월 항쟁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성공한 민주 혁명이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6월 항쟁의 에너지가 우리 민주주의를 전진시켜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민주 진영은 10년 집권 후 끝이 보이지 않는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이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내년 대선에서 6월 항쟁 세대의 에너지와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관건이다. 야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를 엄혹하게 심판한 이번 4.13 총선은 20~30대 청년 세대의 분노 투표가 제일 원인이었다고 한다. 내년에 박정희 세력을 계승해온 보수 정권 10년을 심판하기 위해 6월 항쟁 세대가 그들의 자식 세대인 청년들과 함께 손잡고 민주공화국의 완성에 나선다면 대선 승리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공화주의를 부르짖는 유승민과 더 좋은 민주주의를 내거는 안희정. 그들이 내년 대선을 보다 본질적인 논쟁과 경쟁의 무대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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