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은 메모와 폴라로이드 카메라,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내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새로운 소재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었다.
'괴담' 운운하다 두 번 고개숙인 李대통령, 이번엔 '전염병'?
이명박 대통령의 11일 국회 개원연설을 지켜보면서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대통령 역시 아무래도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우병 파동'이 확대돼 가던 지난 5월22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민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광우병에 대한 우려를 한갖 '괴담'으로 치부했다가 더욱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끝없는 논란 속에 이명박 대통령은 6월19일 또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번에는 한껏 몸을 낮춘 채였다. "본질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는 비판 속에서도 서서히 촛불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머물고 있는 지지율 정체현상은 여전했지만 "조금 더 지켜봐 주자"는 여론도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취임 후 처음으로 이날 국회를 방문해 개원연설에 나선 이 대통령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 대통령은 "부정확한 정보를 확산시켜 사회불안을 부추기는 '정보전염병(infodemics)'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인터넷의 발달로 대의정치가 도전을 받고 있다"면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여론이 주로 '인터넷 공간'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촛불국면은 이제 끝났다'는 식의 성급한 자신감이 읽혔다.
대통령은 '괴담'을 운운했던 자신의 오만이 두 차례의 사과를 불렀던 사실을 벌써 잊은 듯 했다. "국민의 목소리에 더 세심하게 귀 기울이겠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과 함께 하겠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국민건강'에 대한 여전한 우려를 '전염병' 정도로 취급하는 식의 인식은 지난 5월 대국민담화에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잊어버리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이 대통령이 이날 개원연설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여 당부했던 대목이 있다. 바로 '신뢰'다. 이 대통령은 "우리 사회는 무형의 사회적 자본인 신뢰의 축적이 크게 부족하다"며 "법과 질서를 바로서지 않으면 신뢰의 싹은 자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무례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사회는 결코 선진사회가 될 수 없다"며 이 같이 말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보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신뢰'를 과연 국민들이 인정할 수 있느냐는 부분이다.
이미 정치권과 시장,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한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에 대한 '나홀로 신뢰'를 선언한 이 대통령이다. 숱한 경질 요구에도 불구하고 어청수 경찰청장,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자리는 굳건하다.
게다가 이번 '광우병 파동'을 통해 드러난 독선적인 정책추진, 국민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언사는 이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려 버린 주범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전에 '촛불'로 대표되는 자신에 대한 비판여론을 무작정 '전염병', '무법', '무질서'라고 매도하는 이 대통령 자신이 가장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대통령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답답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답답함을 언제쯤 떨칠 수 있을까.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잊어버리는 법'이라도 연마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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