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강. 노마드 몸 철학의 생태학적 세계
1. 노마드적 삶의 구성
장기나 체스의 말들처럼 외부에 의하여 부여된 내재적 성질이라는 가족적이거나 사회적, 혹은 국가적 지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몸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노마드적 존재의 삶의 방식은 자체의 몸이 지니고 있는 생성적 욕망, 잠정적인 무리들의 관계로 형성되는 사회적 욕망, 그리고 생성적인 잠재성과 잠정적인 현실성이 상호 순환하는 자연적 욕망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 혹은 지구나 우주를 구성하는 노마드들의 서로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과정처럼 바둑을 구성하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놓여지는 과정은 사회적이거나 국가적인 논리체계가 아니라 노마드들의 몸이 느낌과 감각으로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다. 바둑판과 바둑돌 그리고 검은 돌과 하얀 돌을 쥐고 있는 두 명의 바둑기사들이 하나의 바둑을 구성하는 것처럼 자연이라는 대지 위에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노마드들과 더불어 너와 나는 생성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자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바둑판은 자연세계이고, 하얀 돌과 검은 돌로 이루어진 바둑돌들은 수많은 노마드들이며, 두 명의 바둑기사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이다. 우리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경기와 구리와 이세돌의 10번기를 보았던 것처럼 하얀 돌과 검은 돌로 구성된 노마드의 바둑알들이 바둑판이라는 세계에 놓여지는 과정, 즉 알파고와 이세돌이 한 판의 바둑을 두는 과정은 당신과 내가 이 글을 읽고 쓰는 것처럼 노마드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러한 노마드들의 삶의 과정, 즉 노마드적 “있음”과 정착민적 “존재함”이 상호 순환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은 앞글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크게 세 개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바둑판 위에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을 놓아가는 이세돌의 입장에서,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돌이나 하얀 돌을 상대보다 먼저(혹은 나중에) 바둑판 위에 배치해나가는 이세돌이라는 노마드적 개체의 생성적 욕망의 몸을 사유하는 이세돌이라는 개인을 구성하는 정신적(혹은 마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세돌과 마주하고 있는 알파고(혹은 구리)와의 일대 일 관계로 구성된 한 판의 바둑을 만들어가는 이세돌과 알파고가 상호 작동하는 둘(혹은 그 이상의 구성원들)이 구성하고 있는 노마드들의 사회적 욕망이 만드는 사회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세돌과 알파고가 만드는 하얀 돌과 검은 돌로 구성된 바둑판이라는 361 개(혹은 그 이상의 무한한)의 점들로 구성된 혼돈과 질서가 상호 작동하는 노마드의 자연적 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노마드란 고아이거나 알인 동시에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이 놓여지기 이전의 바둑판 위에 있는 수없이 많은 점들이다. 이 세 개의 세계가 바둑이라는 노마돌로지의 존재론적 세계를 구성한다.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바둑이라는 놀이의 존재론적 구성은 고아이거나 알이거나 점이라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을 지닌 노마드의 생명체가 하나의 개체적 세계를 구성하고, 각각의 개체적 세계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며, 사회적 세계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적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개체적 세계라는 부분들의 집합이 사회적 세계이고, 사회적 세계의 부분적 집합이 자연적 세계라는 총합이 아니다. 개체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그리고 자연적 세계의 관계는 상호 일대 일대 일(1:1:1)의 동등한 질량의 관계이다. 장기와 체스의 국가철학적 서열구조 속에서 구성된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 혹은 부분과 전체의 이분법을 지니는 구조주의적 세계관의 근대적 국가철학의 논리에서 개체와 사회와 자연이 지니는 상호 동등한 질량의 관계를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바둑을 구성하는 노마돌로지의 세계관에서 바둑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세계는 바둑기사라는 하나의 개체와 바둑을 두는 두 명의 바둑기사가 관계를 맺는 사회, 그리고 두 명의 바둑기사가 바둑판 위에 하얀 돌과 검을 돌을 올려놓으면서 만들어지는 바둑판이라는 자연의 세계가 상호 일대 일대 일의 동등한 질량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총합의 세계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알파고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바둑기사 이세돌은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수천 개의 기보를 토대로 데이터베이스라는 영토로 구성되어 있는 몸이고, 그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된 영토의 몸은 이미 알파고라는 또 다른 노마드의 데이터베이스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몸을 상대로 관계적으로 구성된 기보들이며, 그 기보들에는 이미 하얀 돌과 검은 돌이라는 수없이 다양한 노마드들의 몸들과 동시에 바둑판 위의 가로와 세로의 열아홉 줄들이 서로서로 만나는 361 개의 점들로 구성되어 있는 바둑판이라는 자연의 세계를 포용하고 있는 몸이다. 알파고와 마주 앉아 있지 않거나 바둑알과 바둑판을 포용하고 있지 않은 이세돌은 이미 바둑기사로 존재하는 이세돌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노마드로 “있음”이다. 이처럼 노마드의 개체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그리고 자연적 세계가 일대 일대 일의 상호 동등한 질량의 관계로 존재하는 것은 노마드의 개체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그리고 자연적 세계를 구성하는 몸이 근원적으로 생명이라는 생성의 힘을 지닌 대지인 동시에 대지의 몸 위에 데이터베이스라고 명명되는 수많은 경험들의 느낌과 감각이 축적되어 자그마한 영토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마드의 개체성을 구성하는 몸은 우리의 두뇌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세돌과 알파고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사회적 몸의 영토인 동시에 현재의 대국이라는 새로운 기보를 만드는 전혀 새로운 경험의 느낌과 감각으로 물리적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연적 몸의 대지이다.
2. 몸의 대지와 영토
바둑기사 이세돌이나 알파고와 같은 데이터베이스의 몸이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원초적 경험의 과정을 장회익 교수는 “대인(對人) 경험”과 “대물(對物) 경험” 그리고 “대생(對生) 경험”으로 구분한다(장회익 18-20). “대생 경험”이 노마드의 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라면, “대물 경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장기나 체스와 같은 잠정적인 정착민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고, “대인 경험”은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접점의 역할을 한다. 수천 개의 기보로 이루어진 알파고의 데이터베이스가 알파고의 바둑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듯이 대인 경험과 대물 경험 그리고 대생 경험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삶의 인문학적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 인문학은 신이나 왕의 국가철학적 지배를 국민국가의 국가철학적 지배로 전환시킨 서구적 근대화 과정에서 지리적 발견을 토대로 한 역사적 대인 경험의 총체로 서구적 근대의 인문과학을 구성하고, 과학적 발견을 토대로 한 역사적 대물 경험의 총체로 자연과학을 구성한다. 사회과학은 대인경험과 대물경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문제는 이세돌과 알파고처럼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성의 몸을 구성하는 대생 경험을 배제한 대인 경험과 대물 경험은 항상 현실을 지배하는 데이터베이스의 영토만을 인식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대생 경험을 토대로 한 새로운 또 다른 데이터베이스의 구성을 방해한다. 체스와 장기와는 달리 바둑을 두는 과정에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상호관계에서 나타나는 대인 경험의 총체와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놓여지는 대물 경험의 총체는 항상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느냐, 아니면 사느냐, 혹은 죽느냐의 근본적인 대생 경험의 총체와 연관되어 있다.
장회익 교수가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 등등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대생 경험은 노마드 존재론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질적 “있음”이 생명의 “존재함”이 되는 관계적 존재론의 시간성에 대한 인식이다. “대생 경험”이라는 자연적 세계의 시간성은 “대인 경험”과 “대물 경험”, 즉 개체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몸이라는 생명의 근원적 내재성이다. 국가철학의 체스와 장기에서 신이나 왕 혹은 국가에 의하여 내재적 성질이 부여된 체스와 장기의 말들은 “있음”이 곧 “존재함”이지만, 그 자체의 관계에 의하여 내재적 성질을 창출하는 바둑의 하얀 돌과 검은 돌이라는 노마드들은 하나의 개체로 바둑판 위에 놓여지는 “있음”과 또 다른 바둑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대인 경험”과 “대물 경험”을 구성할 수 있는 두 개 이상의 집을 짓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세돌이나 알파고가 가지고 있는 바둑에 대한 경험의 데이터베이스는 이세돌이나 알파고가 바둑기사로 존재하기 위하여 그들의 몸이라는 대지 위에 새겨진 수많은 바둑의 기보들로 구성된 영토들이다. 그러나 바둑은 체스나 장기처럼 이미 구획된 영토 위에서 외부에 의하여 부여된 내재적 성질에 따라 정해진 삶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기보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세돌이나 알파고는 매 번의 대국에서 항상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함”의 이전, 즉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할 수 있는 노마드의 “있음”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만 한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또 다른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듯이 매 번의 대국에서 항상 과거의 “존재함” 이전의 영원한 현재의 “있음”으로 되돌아가는 영원회귀, 즉 “존재함”이라는 과거의 영토에서 “있음”의 현재를 구성하는 새로운 대지로 되돌아가는 탈영토화의 행위는 또 다른 “존재함”으로 다시 태어나는 미래의 재영토화를 구성하기 위함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다섯 번의 대국이나 바둑판 위에서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만나서 집을 짓거나 부수거나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지속적인 영원회귀의 존재론적 범칙을 들뢰즈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회익 교수와 마찬가지로 신영복 교수가 “역이불역 불역이대역(易而不易 不易而大易: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크게 보면 변화이다)”을 주제로 하는 “『주역』은 우리의 손때 묻은 친숙한 그릇이고 그 관계론은 탈근대의 사상적 보고”이며 “그런 점에서 『주역』은 과거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신영복 74-75)라고 판단하는 것도 바둑과 같은 노마돌로지의 지식체계가 장기와 체스의 국가철학에 의하여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근대나 탈근대의 인문학을 구성하는 토대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매일매일 잠을 자듯이, 혹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끊임없이 순환하듯이 “있음”에서 “존재함”으로 드러나는 몸이 다시 “존재함”에서 “있음”으로 되돌아가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은 개체적 몸과 사회적 몸 그리고 자연적 몸이 존재하는 근원적인 노마드의 존재 법칙이다.
3. 노마드 유물형이상학의 정신생태학
장기와 체스의 국가철학이 지니는 생명의 파괴성과 바둑의 노마돌로지가 지니는 생명의 생성성을 발견한 들뢰즈가 노마드의 존재론을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으로 요약하듯이 “역이불역 불역이대역”이라는 『주역』의 요체를 “탈근대의 사상적 보고”로 간주하고 있는 신영복 교수의 공부법, 즉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신영복 19-20)은 노마드 몸 철학이 지니는 개체적 정신생태학, 관계적 사회생태학 그리고 이 둘을 종합하는 자연생태학으로 구성된 생태학적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몸의 한 구성 요소인 머리(혹은 두뇌)는 알파고의 두뇌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 즉 노마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역사적 합리성의 터득처럼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방법을 터득한 과거의 데이터베이스가 가지고 있는 수천 개의 기보에서 만들어진 이성과 논리이다.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알파고의 두뇌가 만드는 이성과 논리는 바둑판 위에 놓여있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의 관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칙에 따라 해석하고 번역한다. 이런 측면에서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근대의 대학을 구성한 인문과학은 존 쿳시가 그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에서 파멸의 인문학이라고 말하는 텍스트 해석학이고, 텍스트 해석학의 근본에는 기독교 해석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나 유교적 국가철학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성서』나 『사서오경』을 원본으로 하는 기독교 해석학은 근대 인문학을 구성하는 문학과 역사학과 철학을 텍스트 해석학이라는 서구적 근대 국가철학의 시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이세돌과 알파고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이성과 논리를 구성하는 과거의 기보들이 아니라 현재의 대국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이성과 논리를 구성하는 과거의 기보들이나 서구적 근대 인문학의 텍스트 해석학이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칙을 따른다면, 현재의 대국은 항상 차이와 변화의 원칙을 따른다. 이러한 차이와 변화의 원칙을 신영복 교수는 바둑의 기보나 인문학의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당대의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脫文脈)의 창조적 실천”(신영복 19)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현재에 바둑을 두는 대국은 과거의 기보를 따르는 유사성과 동일성의 행위가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과거의 기보와 다른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신영복 교수는 새로운 탈근대 인문학의 고전 공부는 “고전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학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실천”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칙에 따른 해석학과 번역학은 사유가 아니라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신이라는 지배자와 독재자의 피조물이고, 왕이나 국가의 노예가 되는 지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둑에서 현재의 새로운 대국을 두는 것이나 우리가 현재의 삶을 새롭게 살기 위하여 바둑이나 삶을 사유하는 것은 과거의 기보들이나 텍스트들을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탈문맥”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머리(두뇌)에서 가슴(몸)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신영복 20), 즉 머리나 두뇌가 아닌 몸으로 몸을 사유하는 것이다. 알파고의 몸이 근원적으로 수 천, 혹은 수 만 개의 기보가 들어갈 수 있는 텅 비어 있는 몸이듯이 이세돌이나 우리의 몸도 근원적으로 텅 비어 있는 몸이고, 알파고의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된 몸이 과거의 기보들로 이루어진 몸이듯이 현재의 이세돌이나 우리의 몸을 인식하는 이세돌이나 우리의 두뇌는 단지 과거의 기보나 과거의 삶으로 구성되어 있는 몸이다. 그리고 현재의 알파고가 새로운 대국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알파고의 몸을 구성하듯이 이세돌과 우리는 두뇌가 인식하는 과거의 기보나 과거의 삶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대국과 새로운 삶을 통하여 새로운 몸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몸은 두뇌가 인식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느낌과 감각만을 지닌 대지의 몸, 즉 기관들 없는 몸이다. 기관들 없는 몸은 자연이며 대지이고, 두뇌가 인식하는 데이테베이스는 바둑이라는 과거의 인 동시에 과거를 지속시키기 위한 사회와 국가라는 영토이다.
대지의 몸이 영토화 되었을 때에 오염된 대지의 몸이 되어 썩어가듯이 기관들 없는 몸이 사회화되거나 국가화되어 기관들로 가득 찬 몸이 되었을 때에 생성의 몸은 파괴되어 죽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바둑을 두는 과정처럼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생성적 탈영토화를 “상대적 탈영토화”라고 명명하고, 오염되어 썩어가는 대지의 몸이나 파괴되어 죽어가는 노마드의 몸이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만들어지는 부적적인 파괴적 탈영토화를 “절대적 탈영토화”라고 명명한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곧 죽음이다. 이런 측면에서 알파고나 이세돌이 지속적으로 훌륭한 바둑기사로 생성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새로운 대국을 통하여 상대적 탈영토화를 이루어야 하듯이 사회와 국가에 의하여 정착민이 된 우리들은 지속적인 새로운 삶의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노마드가 되는 상대적 탈영토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신영복 교수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을 강조함과 동시에 새로운 탈근대의 인문학 공부법을 궁극적으로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 만드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만드는 재영토화가 없는 탈영토화로 끝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절대적 탈영토화이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계절변화가 자연이라는 대지의 몸이 지속적으로 “있음”이 “존재함”으로 생성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듯이 물과 바람과 돌, 그리고 식물과 동물과 어린이의 몸은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대지의 몸이나 기관들 없는 몸에 가장 유사한, 즉 국가철학에 물들지 않은 존재들이 여성이고, 이방인이며, 오랑캐이고, 소수자들이다. 따라서 바둑을 두는 초반과 중반과 종반을 사유하는 방식이나 몸을 생성시키는 정신적(혹은 마음의) 사유방식이라고 일컫는 유물형이상학, 그리고 개인과 사회와 자연을 지속가능한 생성의 체계로 사유하는 정신생태학은 곧 바둑의 존재론적 세계와 동일한 노마드의 존재론적 세계에 토대를 둔 삶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체와 사회와 자연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사유하는 것은 곧 몸으로 몸을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 되기이며, 어린이 되기이고, 여성 되기이며, 소수자 되기이다. 이세돌과 알파고가 만든 다섯 번의 대국은 노마드의 존재론적 세계에 토대를 둔 바둑의 인식론적 세계, 즉 노마드의 인식론적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노마드와 노마드의 관계, 혹은 하얀 돌과 검은 돌로 이루어진 “알끼리의 관계”가 여성 되기이거나 어린이 되기 혹은 소수자 되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둑과 노마드의 인식론적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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