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도심 속으로
다음 날 아침. 젤리겐슈타트 중앙 광장에서는 새벽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눈에 익은 사과, 수박, 딸기, 오렌지, 양배추, 상추가 보였다.
이곳 독일 사람들은 해바라기 꽃을 좋아하는지 서너 송이씩 사 들고 다녔다.
마늘도 보이고 치즈, 햄, 감자, 찐 옥수수, 그리고 갖가지 씨앗도 팔고 있었다. 한쪽에는 많은 이들이 아침부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해장술인가 보다.
오후 4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는 인구 70만 명으로 독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우린 자전거에서 내려 혼잡한 도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넓은 도로엔 인파들이 넘쳤고, 높은 빌딩들은 타워크레인과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지나는 이들과 연신 부딪히면서 버스, 택시, 자전거 길, 그리고 길게 달려오는 전차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달렸던 호젓한 농촌 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각국의 유명 브랜드가 들어서 있고, 다양한 민족들이 활보하는 국제도시였다.
정겹고 여유 있게 사는 모습을 보다가 상거래 현장에 들어서니 살벌함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삼성 모바일과 현대 자동차 광고가 눈에 띄어 자랑스러웠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라면과 김치, 고추장 등을 판매하는 한국 식품 전문점을 만났다. 우리는 식품점 한구석에서 비빔밥과 김치 한 접시를 주문했다.
3만 5백 원이었다. 콩나물과 시금치나물은 보일 듯 말 듯했지만 고추장과 김치 맛은 한국보다 몇 배 맛있었다.
숙소를 알아보려고 관광안내센터를 찾아 나섰다. “혹시 시내 가까운데 캠핑장이 어디 있나요?”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부부에게 물었다. “캠핑장은 시내엔 없고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혹시 유스호스텔이 있는데 원하면 알려드릴게요.”
그 부부는 서로 뭔가를 얘기하더니 유스호스텔을 권했다. “네에, OK! 좋아요.”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호텔을 얻으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겠지만, 유스호스텔을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 강 다리 건너 저기 빨간 건물이 유스호스텔이에요.” 우린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 남은 방이 딱 한 개가 있었다.
행운이었다. 조식 포함해서 1인당 하룻밤에 32유로다. 이틀 치 128유로를 카드로 결제했다.
이 유스호스텔은 마인 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좋았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이 공동 시설이었고, 한방에 1인용 침대가 따로 놓여 있어 추니와 난 졸지에 별거에 들어갔다.
8월 18일. 프랑크푸르트 이틀째. 스마트폰과 카메라에 쌓인 메모리를 좀 덜기 위해 유스호스텔 1층에 있는 인터넷 코너를 찾았으나 USB를 꽂을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호텔 인근 PC방을 찾아갔다. 잡화점 한구석에 컴퓨터 일곱 대를 벽 쪽으로 설치해 놓았는데 컴퓨터 자판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 혼자 진행하기가 곤란했다.
실수해 자료가 삭제되면 낭패다. 물어보느라 주인을 열 번도 더 불렀는데 얼굴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잽싸게 달려와 줬다. 자료 옮기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려 사용료 2유로와 팁 3유로를 줬다.
“어디 분위기 있는 집에서 술 한잔해야겠지?” 추니와 프랑크푸르트의 밤 문화를 즐기러 뒷골목으로 나왔다. “좋죠. 쓴 술 말고 좀 달콤한 걸로 해요.”
추니는 며칠 전 떫은 와인을 마셨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조명이 음침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떤 업소에서는 젊은이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긴 호스를 입에 문 채 물 담배를 빨고 있었고, 어떤 식당은 문을 한 뼘 살짝 열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들어갈 듯 말 듯 몇 군데를 거쳐 붉은 조명이 가득한 술집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서빙하는 여성이 우리를 보며 반가이 맞이했다.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몸매에 갑자기 초점을 잃었다.
가슴은 성형수술을 한 걸까? 진한 향수를 풍기며 그녀의 가슴이 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주문을 받겠어요.” “네에, 스위트 와인 한 병 주세요, 매운 안주 뭐 있나요?”
“치킨 …….” “치킨 OK.”
소스 얹은 닭다리를 손으로 직접 먹으라고 냅킨을 잔뜩 가져왔다. “여기요, 포크 좀 주시겠어요?”
냅킨이 고기에 달라붙어 미끈거렸다. 낮은 칸막이 옆자리엔 진한 포옹이 지속되고 있었다. 나는 서빙 여성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어 맞은편 추니한테 카메라를 건넸다.
여종업원은 나를 밀치며 의자 반을 차지하고 들어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추니는 얼떨결에 촬영 버튼을 눌렀다.
사진을 확인해 보니 당황했는지 초점이 많이 흔들려서 재차 찍었는데 이번엔 그런대로 괜찮았다.
추니는 와인 한 병을 채 마시지도 않았는데 나가자고 재촉했다. 술집 정문을 나오는 추니의 표정이 이내 일그러져 있었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도 혼자 잰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험악해졌다. 만회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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