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총선 패배, 더불어민주당의 1당 등극, 국민의당의 약진, 정치 지형이 크게 변화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와 소통을 시도했다. 20대 국회를 앞두고 사실상 첫 영수회담에 준하는 대화의 장이 열린 셈이다. 격세지감이다.
화기애애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13일 청와대에서 88분 동안 (오후 2시 57분부터 4시 25분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결과물은 도출되지 않았다. 소통의 방식은 정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지 여부는 미지수인 상황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 어버이연합 문제, 세월호 특별법 문제 등 민감한 현안은 원론적 수준에서 입장 차만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해 일부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는 사안이나, 이른바 여.야.정 소통 관련 부분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시사할 만한 부분들이 눈에 띠었다.
청와대 김성우 홍보수석은 이날 회동 직후 브핑을 통해 "대체로 의견이 모아진 것을 말씀드리겠다"며 6가지 사안을 언급했다. 3당 대표 회동 정례화, 민생 관련 여.야.정 현안 점검 회의 개최, 안보 관련 사안, 가습기 살균제법 관련 사안,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 관련 사안, 정무장관직 신설 관련 사안 등이다.
일부 성과 부분은 '소통의 장 마련'…문제는 진정성 있는 대화
먼저 여.야.정 소통 및 협치와 관련된 사안은 총 세 가지로 압축된다. 여야 대표 회동, 경제부총리-정책위의장 협의체, 그리고 정무장관직 신설 부분이다.
김 수석은 "3당 대표 회동은 일분기에 한번씩 갖기로 정례화하기로 했다"고 했다. 1년에 총 네 차례 만나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8월에, 더불어민주당은 9월 초에 각각 대표를 선출하게 된다. 박 대통령이 밀고 있는 파견법, 구조조정,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경제 관련 사안과 관련해서는 "경제 부총리와 3당의 정책위의장이 민생경제 현안 점검 회의를 조속히 계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정무장관 신설 관련 부분이다. 박 대통령은 정진석, 박지원 원내대표의 정무장관 신설 건의와 관련해 "정부 조직법 개정 사안이므로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말하기보다는 검토하겠다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
대표, 정책위의장 투트랙으로 '협치' 의사를 보였다는 점에서는 평가할 부분이 있다. 박 대통령은 "필요하면 여야대표 회동을 더 자주 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여기에 정무장관 신설을 검토하겠다는 것은 국회의 소통 요구를 일단 수용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태도는 4.13 총선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 관건은 진정성 있는 실천 여부다. 소통의 장 위에서 서로 할 말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일부 성과?…박근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다
구체적인 의제에서 그나마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보훈처(박승춘 보훈처장) 관련 사안이다.
김성우 수석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 허용해 달라는 것을 두 야당에서 건의를 했고, 대통령께서는 국론 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아보라고 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5.18 기념 행사는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같은 발언은 박 대통령이 확답을 한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촉박한 시간 안에 기념곡 지정이 가능할 지 여부는 미지수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보훈처에 어느 정도 수준의 "지시"를 내릴 지 여부가 관건이다.
일각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부활시키는 수준에서 보훈처가 타협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역시 '반쪽 기념식'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다. 보훈처는 현재 기념곡 지정은커녕, 기념식 참석자 제창도 막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의미 있는 추정을 내 놓았다. 이 관계자는 사견을 전제로 "5.18기념행사 식순이 5월 16일 확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의 입장이 '전향적'이라고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대통령이 일단 보훈처에 지시했으니, 야당이 보훈처와 협의를 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정확한 의중은 알 수 없으나, 두 야당은 제창 허용을 넘어 기념곡 지정과 관련해 기대를 걸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 부분은 좀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며 "이 부분은 저와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의 거듭된 주문에 답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3차례 간곡히 설명드리고 대통령이 선물을 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며 "저희들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 요구는 사실상 거부
가습기 살균제 진상 규명 청문회 문제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김성우 수석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현재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려서 엄중 수사 중에 있고, 필요하다면 국회에서 여.야.정 협의체를 구성해서 철저히 따져주시기를 바란다는 대통령의 제안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정부와 기업에 대한 더민주의 청문회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날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은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가 김대중 정부에서 판매되기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현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기도 했다. 정부 여당은 이같은 입장에서 버티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과 회동 직후 국회에서 브리핑을 열고 "진실 규명을 하는데 여.야.정 협의체를 하는 것이 적절한가 의문이 있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우 원내대표는 "저희들은 지금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있어서 정부의 책임도 규명해야 하는데 (국정조사나 청문회 등을) 같이 꾸려서 공동으로 규명 가능한가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여.야.정 협의체 제안 수준에서 문제제기를 접을 수 없다는 입장인 셈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도 비슷한 주장을 내 놓았다. 박 원내대표는 "가습기 사건은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철저 수사와 별개로 정부 차원의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박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이 진상규명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브리핑을 통해 대통령의 원론적인 발언을 전하는 데 그쳤다.
청와대가 회동에 앞서 내놓은 의제는 총 4가지였다. 첫째 민생 경제, 둘째, 북핵 문제, 셋째, 협치 방안, 넷째, 여야 대표 회동 정례화였다. 청와대와 여야 3당 원내대표의 브리핑을 종합하면, 민생 경제 문제는 여야간 입장차가 컸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파견법 처리, 서비스산업 발전법 처리 등 대통령 관심 법안에 대한 처리 요구를 했고, 야당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공공기관의 강압적 성과 연봉제 등에 대한 야당의 건의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 박 대통령과 여야는 큰 입장차를 확인하는 데서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특별법 개정 문제와 관련해 정치력을 보이지 않고, 원론적인 입장에서 국회로 떠넘겼다. 청와대의 어버이연합 관제 데모 지시 의혹도 원론적인 수준에서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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