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국가 중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동성 간 결합이 허용됐다.
이탈리아 하원은 11일(현지시간) 동성 커플에게 합법적 권한을 보장하는 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372표, 반대 51표, 기권 99표로 가결했다.
동성 간 결합은 배우자로서의 권리와 법적인 이익(상속, 입양, 양육 등)을 혼인 관계에 준해서 보장하는 제도다.
10년 가까이 가톨릭 등 종교계와 보수적인 정치권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입법이 좌절됐던 이 법안이 최종 통과됨으로써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 회원국 28개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동성 간 결합을 허용하는 국가에 합류했다.
이탈리아 하원은 이날 역사적 표결 직전에 동성 결합 법안에 대한 정부 신임 투표를 찬성 369표, 반대 193표, 기권 2표로 통과시킨 바 있다.
렌치 총리는 앞서 하원에서의 최종 입법 표결을 앞두고 동성 결합에 반대하는 야당이 이 법안에 수정안을 내놓는 것을 막기 위해 신임투표라는 전략적 승부수를 던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하원 토의 과정에서 수정 조항이 제출된 법안은 다시 상원으로 넘겨져 추가 승인을 거쳐야 한다.
렌치 총리는 동성 결합 허용 법안을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와 연계한 것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와 관련해)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이탈리아는 그동안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동성 결합을 법적으로 불허해 유럽연합(EU)으로부터 인권에 관한 EU협약에 위배된다는 지적과 함께 입법 압력을 받아왔다.
이날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을 경우 총리에서 물러날 뻔한 렌치 총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축하할만한 날"이라며 "우리는 이탈리아 역사의 또 다른 중요한 페이지를 썼다. 수 년 간 무위에 그친 노력 끝에 얻은 이 법이 더 이상 늦춰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법안을 신임 투표와 연계한 렌치 정부의 전략은 야당과 종교계의 반발을 샀다. 논란이 큰 법안에 대해 추가 토의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미켈레 펜니시 시칠리아 주교는 일간 라 레푸블리카와의 회견에서 "그들은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이 법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걸 고려하지 않았다"며 "이런 방식은 일종의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
동성애 인권 단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법안 통과 직후 "기념비적인 민권 성취"라고 환영하면서도 다른 서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에서 당연시되는 동성 커플의 입양권이 최종 법안에서 빠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동성애 단체 아르치게이의 가브리엘레 피아초니 사무총장은 "잔이 절반만 찼다"며 동성 커플 입양권이 허용되지 않은 이번 법안은 "달면서도 쓴" 절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동성 커플들이 혼인한 커플과 마찬가지로 유산 상속, 연금, 양육 등에서 법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 이 법안의 원안에는 동성 커플의 입양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들어있었으나 가톨릭 단체 등의 반대에 가로막혀 상원 입법 과정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한편,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동성 결합 허용을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동안 가톨릭 단체와 보수적인 가족 가치를 중시하는 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막혀 입법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로마노 프로디 총리가 이끌던 중도 좌파 정부의 경우 2007년 이번 법안의 보장 내용보다 훨씬 약한 수위의 동성 결합 허용 법안을 처리하려 했으나 대규모 저항에 부딪혀 법안 통과에 실패했고, 이는 결국 이듬해 프로디 정부가 실각하는 빌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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