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 노동자들이 빨간 우산을 쓰고 행진했다. "내 삶과 가족을 지키는 최선의 선택, 노동조합"이라고 적힌 손팻말과 함께였다. 노동조합은 그들에게 우산이다.
'쉬운 해고' 폭우에서 삶을 지키는 우산, 노동조합
날씨는 화창하지만, 고용 전선에는 비가 내린다. 경제 위기 속에서, 여당과 야당이 한목소리로 구조 조정을 외친다. '쉬운 해고'라는 폭우로부터 몸을 지킬 우산이 절실하다.
126주년 노동절을 맞은 5월 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마련한 집회에 참가한 뒤 맨 앞에서 행진했던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수백 개의 우산을 쓴 노동자들이 이날 오후 '2016 세계노동절 대회'가 열린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서린동 청계천 모전교까지 행진했다.
이날 집회에는 2만여 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7000명)이 참가했다. 민주노총이 주최한 '2016 세계 노동절 대회'는 서울에서만 열린 게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민주노총은 전국 15개 지역에서 총 5만 명의 인원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경제 위기, 재벌이 책임져라"
그래도 되나. 이날 집회에서 자주 나온 구호는 "경제 위기 진짜 주범, 재벌이 책임져라"였다.
"열어라, 재벌 곳간! 국민부터 살려라"라는 구호도 자주 눈에 띄었다.
재벌 곳간에 돈이 얼마나 있기에? 지난해 말 기준, 10대 재벌(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포스코, GS, 한화, 현대중공업, 한진) 상장 계열사들의 사내유보금은 총 549조6000억 원이다. 비상장 계열사까지 포함하면 규모가 더 커진다.
이렇게 쌓여만 가는 현금을, 사회로 돌릴 방안을 찾자는 구호다.
"알바노조의 최저임금 1만 원 운동, 4년 만에 국민의 요구 됐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청년 실업 해결하자"라는 구호도 자주 나왔다. 실제로 이날 민주노총 집회에 앞서, 알바노조가 마련한 '알바데이'가 열렸다. 박종훈 알바노조 위원장은 "(알바노조가) 최저임금 1만 원 운동을 주장한 지 4년 만에 국민의 요구가 됐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총선에서 주요 정당들이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했었다.
알바노조는 CGV 명동점, 맥도널드 명동점 앞에서 각각 집회를 연 뒤, 민주노총 집회에 합류했다. CGV, 맥도널드 등은 아르바이트 직원에 대한 다양한 인권 침해로 도마 위에 올랐었다. 무리한 용모 및 복장 기준을 강요하거나(CGV), 유니폼 세탁 비용 등을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전가하는(맥도널드) 등이다.
알바노조, 청년유니온, 민달팽이유니온 등 청년단체 회원들은 이날 집회에서 여느 노동단체와 다른 발랄한 모습을 보여줬다. 민중가요가 아닌, 팝송에 맞춰 춤을 추며 '최저임금 캠페인'을 했다.
"구조 조정 칼춤 대신 일자리 나누기 필요하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대표하는 한상균 위원장은 이날 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말 민중총궐기 집회를 주도한 뒤 구속된 상태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이 대신 행사를 진행했다. 그는 이날 대회사에서 "경제 위기를 불러온 정부와 자본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열심히 일해 온 노동자가 그 책임을 모두 지라는 것"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구조 조정 칼춤이 아닌,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와 제조업강화특별법과 같은 적극적인 고용친화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민주노총은 △노동개악 폐기-노동부장관 퇴진 △경제위기 재벌책임 전면화 △최저임금 1만 원 쟁취 △주35시간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교사, 공무원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세월호 유가족, 병원에서 만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故 임세희 학생의 아버지인 임종호 씨도 이날 연단에 올랐다. 그는 "참사 이후 2년이 지나면서 유가족들이 병들어간다"고 말했다. "분향소가 아니라 병원에서 마주치는 유가족이 늘어난다"고도 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은, 경제 위기 국면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세월호에서 선장은 살아남았듯, 한국 경제가 침몰해도 재벌 총수는 안전하다.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라고만 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노총은 오는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에 총파업 투쟁을 선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4.13 총선, 오만과 독선의 길 고집한 정권에 대한 노동자의 심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도 이날 '2대 지침 철폐, 노동법 개악 저지, 임단투 승리를 위한 5.1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오후 1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5만여 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1만8000여 명)이 참석했다.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지난 4.13 총선 결과는 오만과 독선의 길을 고집한 현 정권과 집권 여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준엄한 심판이었다"며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반성과 쇄신은커녕 노동 개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노동법 개악을 시도하고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에 대한 불법적인 2대 지침을 노동 현장에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정인사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 등 이른바 2대 지침은, 쉬운 해고와 일방적인 임금 삭감 등을 낳으리라는 게 노동계의 판단이다.
이어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금융기관의 성과연봉제에 대해 "실적 쌓기 경쟁과 조직내부의 줄 세우기만을 가져와 공공부문의 존재목적인 공공성을 파괴하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악역향을 미칠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쉬운해고와 취업규칙불이익변경이 전 산업현장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공공 금융 노동자들의 성과연봉제 저지투쟁에 적극 함께 하자"라고 강조했다.
양대 노총 노동절 집회, 평화롭게 끝나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이날 대회를 마치고 서울시 중구 삼각동 청계천 한빛광장까지 행진했다.
경찰은 이날 서울광장 및 마로니에 공원 등 집회 장소 근처에 병력 1만여 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양대 노총의 집회는 평화롭게 끝났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