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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동주>를 보고서 부끄러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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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동주>를 보고서 부끄러웠나?

[황대권의 시선]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 : <동주>를 보고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

이제야 영화 <동주>를 보았다. 흑백의 음영이 주는 묘한 긴장 속에 동주의 가냘픈 감성과 몽규의 거침없는 열정이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마치 한편의 시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그 시는 너무도 아프고 쓸쓸해서 끝내는 눈물을 쏟게 만든다.

나는 동주와 몽규가 심문을 마치고 조서에 서명하는 장면에서 꺼이꺼이 울고야 말았다. 무자비하고 악착같은 일제의 만행이 미워서가 아니다. 그 순수한 영혼들이 비참하게 스러져가는 것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바로 나였고 그런 내가 여전히 일제 치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통 터져서이다.

나는 전두환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나왔다. 신문에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도되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해있었던 억압적인 사회 상황, 지식인으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의무감,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일본 유학을 결심하는 과정, 제국의 심장부에서 몰래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논의하는 모습, '치안유지법'에 의해 체포되어 취조 받는 그 모든 장면들이 어찌 이리 같은지!

동주는 취조관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마지막 신문 조서에 서명하는 장면에서는 몰래 숨어서 시를 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서명을 못하겠다며 버틴다. 한편 적극적으로 독립 투쟁에 나섰던 몽규는 자신에게 붙은 갖가지 치안유지법 위반 사실에 대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서명을 한다며 울부짖는다. 한 사람은 서명을 거부했고 다른 한 사람은 서명을 했지만 사실상 내용은 같다. 서명을 안 한 이유나 서명을 한 이유가 모두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는 출소 이후 지금까지 전라도 산속에 '숨어' 살고 있다. 자연 속에서 농사짓는 일이 무엇보다 즐겁고 지방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30년 전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 건물 지하실에서 저들이 조작하여 만든 신문 조서에 서명을 한 부끄러움과 그로부터 3년 뒤 대전교도소 독방에서 전향서에 서명을 한 부끄러움이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자연이 좋고 시골이 중요하다는 믿음보다 내 양심을 짓누르고 있는 이 부끄러움이 산속에 숨어사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때는 차라리 고문을 받다가 박종철처럼 죽어버렸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텐데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수백 쪽에 달하는 신문 조서의 겉표지에 "황대권 혁명 일지"라고 굵은 사인펜으로 써놓고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 수백 쪽의 조서에 적혀 있는 글자 하나하나는 60일에 걸친 갖은 고문과 협박으로 완성된 것이다. 전두환의 폭압 정치 아래에서 내가 '혁명'을 꿈꾸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혁명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출세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실은 혁명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체포될 때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어떻게 혁명을 할 것인지' 모색하고 공부한 것뿐이다. 그러나 안기부수사관들에게는 혁명을 꿈꾸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들은 수사 조서에 20대의 어설픈 혁명가를 체 게바라 수준의 혁명가로 포장하여 그려놓았다.

여기에 서명을 하면 내가 체 게바라가 되는 것인가?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서명을 하지 않으면 또 다시 끝없는 고문에 시달려야 한다.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다. 진실로 혁명가답게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형벌이라 생각했다. 3년 뒤의 전향서에 대한 서명도 같은 과정의 반복일 뿐이었다. 전향서라는 명칭 대신 반성문 비슷한 문서였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에게 전향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스스로 위로해 보아도 양심에 반하는 행위로 인한 부끄러움은 끈덕지게 나를 괴롭혔다.

동주와 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어언 70년이 흘렀다. 그 사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고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자유와 정의, 진정한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탄압을 받고 있다. 과연 동주와 몽규가 살던 시대와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가?

동주를 취조하던 특고는 옷을 갈아입고 대한민국 경찰이 되었고 침략 전쟁에 비행기 한 대라도 더 만들라고 돈을 대주던 지주들은 해방 후 일제가 남긴 재산을 물려받아 기업과 대학을 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건국자'이며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식민 통치를 했던 일제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의 주장은 100% 옳다. 벌써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배 체제에 변함이 없으니 나름 정통성이 생길 만도 하다. 그래서 이 기준에 맞게 교과서도 새로 쓰고 한일 협약도 현실에 맞게 고친다. 자연스레 독립 운동이건 민주화 운동이건 사회 운동하는(했던) 사람들은 모두 체제 전복을 노리는 '빨갱이' 또는 평화로운 사회 분위기를 해치는 '불순분자'가 된다.

40년이 넘게 요시찰 인사로 분류되어 감시 아래 살다보니 내가 과연 해방된 나라에 살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더 나아가 나에게 과연 조국이 있는 건지, 아니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조국이란 것이 필요한지 묻고 싶어졌다. 동주와 몽규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조국을 찾아 그토록 몸부림쳤건만 해방 뒤 국토가 두 동강이로 나뉘어져서는 남북 양쪽에 이전보다 더 강압적인 체제가 들어섰으니 그들이 살아 있다면 뭐라 말할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찾던 조국은 이게 아닌데…" 하며 쓸쓸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처럼 감옥을 들락거리며 살았거나(문익환 목사는 내가 장기수로 사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같은 교도소를 다녀가셨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동주의 '서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부끄럼이 넘쳐나다 못해 부끄럼을 아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부끄러웠다고 소감을 말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부끄럼과는 10만8000리 떨어진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부끄럼을 모르는 시대에 이나마 부끄럼을 알게 해 준 이준익 감독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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