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 20대 국회가 시작된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결과는, 의회 권력이 2008년 총선 이후 전면적으로 재편됐다는 점이다. 사실상 의회 권력의 기능이 마비됐던 2006년 지방선거 이후로 치면 약 10년 만에 의회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총선에서 압승했던 열린우리당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야당(한나라당)에, 그리고 행정부(이명박 정부)에 내줘야 했다.
이명박 정부를 계승한 박근혜 정부는 201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의 정국 운영은 2008년부터 따지면 8년 가까이 진행돼 왔다. 의회는 사실상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더불어민주당(123석), 국민의당(38석), 정의당(6석) 의석수는 167석에 달한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122석으로 내려 앉았다. 야당이 정국을 주도할 기회가 생겼다. 보수 정당의 집권 기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부자 감세, 테러방지법 등, 숱한 논란 속에 '보수 혁명'이 일어났다. 이제 균형을 맞춰야 할 시점이다. 20대 국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레시안>은 전문가 등과 함께 20대 국회에서 꼭 추진돼야 할 입법 과제를 짚어 본다.
이번 20대 총선 의석 분포는 민의를 제대로 반영했는가? 그렇지 않다. 20대 총선 뿐 아니라 19대, 18대, 17대, 아니 그 이전의 모든 총선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왔다. 왜 그럴까? 선거 룰이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틀린 운동장에서 럭비 공을 차는 셈이다.
19대 국회는 선거 제도 개혁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2015년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획기적인 안을 제시했다. 선거제도 '게리맨더링'(특정 정당,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선거구를 정하는 일에서 유래한 말로, 확대 해석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 제도만 주장하는 것을 의미)이 판치던 정치권의 지리멸렬한 행태에 작은 충격을 가한 것이다. 당시 선관위는 '지역주의 완화와 유권자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는 선거제도 개선, 정당정치 활성화' 방안을 담은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확정해 국회에 전달했다.
취지는 명쾌하다.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1개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1인을 선출)가 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제정당 공히 인정하는 문제 의식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주도해 이 논의를 뒤틀었다. "우리 당에 불리하다"는 이유 하나였다. 선거제도 게리맨더링이고, 치졸한 모습이었다.
선거제도 개편안은 이미 많이 나와 있으며, 정리도 잘 돼 있다. 때문에 선거제도 개편의 당위성만큼 중요한 것이 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즉, 지금의 정치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논의가 좌지우지된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주로 룰을 직접 다루는 실무자인 국회의원들이 가진 심리적 요인에 따른 문제다. 유권자 전체를 위한다는 선거제도 개혁의 명분과 당위성은, 내 자리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실무자(국회의원)의 심리적 불안감에 짓눌려 왔다. 조직론 차원에서 보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메스를 들이대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20대 국회는 19대 국회가 왜 선거제도 개편에 실패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실패 이유는 간단하다.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과반을 차지할 것으로 섣불리 예상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해소됐다. 관련해 세 가지 의미 있는 현상이 있다. 첫째,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이 없다. 둘째, 제 3당이 선거구제 개편에 의욕을 가지고 있다. 셋째, 19대 국회 거대 여당이던 새누리당이 소선거구제의 피해자가 됐다.
선관위 안대로 하면 '새누리 120, 더민주 132, 국민의당 95, 정의당 22'
먼저 현행 선거구제가 왜 불합리한 지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 2015년 선관위의 안은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100석을 전제하고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지역구 후보자의 비례대표선거 동시 입후보(석패율제) △정당 후보자추천의 민주성 강화를 위한 '전국동시 국민경선제' 실시 방안 마련 등을 제안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의 맹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주도의 여야 협상 결과, 지역구 253석에, 비례대표 47석의 '반동적'인 안이 도출됐다. 비례대표 의석은 줄었고, 지역구 의석은 늘었다. 이 과정에서 야당인 더민주와 국민의당도 자칫 '생명줄'이 위태해질 수 있다는 일부 지역구 의원들의 '떼법' 공세에 눌려 제대로 된 논의를 촉발시키지 못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국회 맏형인 새누리당의 몽니였다. 야권 분열 상황에서 또 다시 과반 의석의 꿈에 부풀어 있던 새누리당은 "우리에게 불리한 제도를 왜 도입하느냐"고 노골적인 욕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조성복 독일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36%의 정당 지지를 받았지만 의석수는 이보다 많은 42%를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정당 지지율은 27%였지만, 의석수는 43%를 차지했다. 반면 국민의당은 29%의 정당 지지울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는 13%를 차지했고, 정의당은 8% 지지를 받았는데 의석수는 2%만 차지했다. (☞관련기사 : 4.13 총선, 새누리당도 수도권에선 피해자)
19대 총선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은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득표율은 지역구 43.3%(127석), 비례대표 42.8%(25석)으로 과반에 미치지 못했는데, 의석 수는 152석으로 과반을 넘겼다. 이상한 상황이지만 이상하다는 말을 못했다.
물론 소선거구제 하에서 정당 투표는 유권자의 전략적 투표이기 때문에 단순 분석은 사실 의미가 없다. 소선거구제의 특성까지 감안한 유권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있다. 소선거구제에서 2위 이하 득표자를 선택한 표는 모조리 죽었고(사표) 의미 없는 표가 됐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B후보에게 표를 줬는데 A 후보가 졌다면, 그 표는 의미 없는 표가 된다.
이런 사표 심리는 오랜 기간 투표율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A후보의 경쟁력이 강해 모두가 '70%를 득표해 당선될 것'이라고 선거 전부터 입을 모으면, B 후보 지지자는 투표장에 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A후보가 51%로 당선되고 B후보가 49%로 낙선했다면 49%를 찍은 유권자는 전부 허공에 '페이퍼 스톤(투표지)'을 던진 셈이 된다.
소선거구제는 이처럼 민의를 왜곡하는데, 이에 대한 지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은 누군가 이겼고, 승자는 언제나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이 흥미로운 시뮬레이션을 발표했다. 2015년 중앙선관위의 선거구제 개편 방안(권역별 비례대표제)을 20대 총선에 대입한 것이다. 지역구 200명·비례대표 100명 조정안을 현 제도에 대입하면 지역구 253명, 비례대표 127명 등 의원정수는 38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현행 지역구를 그대로 두고 지역구 2, 비례대표 1의 비율을 맞춘 것이다. 이 상황에서 20대 총선의 득표율 등을 적용하면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 120석, 더불어민주당 132석, 국민의당 95석, 정의당 22석, 무소속 11석이 된다. 놀라운 결과다.
앞서 언급한 20대 총선의 정당 득표율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적용해 보자. 새누리당은 96석, 더민주는 81석, 국민의당은 87석, 정의당은 24석 이상 씩을 얻게 된다. 국민의당이 제 2당이 되고, 정의당은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야 3당은 무려 192석을 얻어 개헌선에 근접하게 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든, 이번 총선의 정당 투표는 교차투표 등 소선거구제를 상수로 둔 상황에서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이 녹아 있기 때문에, 이같은 의석 분포가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장담할 수는 없다.)
유성엽 의원은 "유권자의 의사가 비교적 잘 반영되는 선거제도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라며 "국민의 많은 지지를 받는 정당이 국회에 다수 참여해 민의를 대변하는 선거제도가 가장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유 의원은 이어 "20대 국회가 개원하게 되면 산적한 민생문제 해결과 동시에 이를 우선적인 정치개혁 과제로 다뤄야 한다"고 했다.
그릇이 민심을 못 담는다면 그릇을 고쳐야…20대 국회가 최적기
권역별비례대표제는 그간 많은 논의가 진행됐지만, 현실적으로 소선거구제에 길들여진 국회의원들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선관위의 제안과 이 제도의 설명에 관한 것은 이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관련기사 : 선관위 '권역별 비례' 제안…선거제도 개혁 바람 부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주목받는 제도는 중.대선거구제다. 이 외에 정당명부비례대표제도 거론이 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의원을 선출하는 제도다. 선거구당 2명만 선출하면 거대 정당이 독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 선거구당 3~4석을 선출하는 것이 우리 정치 현실에 맞다는 주장이 있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정하는 제도로, 의원 정수의 변동을 일정 부분 감안하는 제도다.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이 정해지니, 민의 왜곡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중.대선거구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야 거물급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도입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제안한 적이 있고, 보수 성향의 합리적 인사인 정의화 국회의장,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등도 중.대선거구제를 바람직한 방안으로 꼽았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는 데 있어서 중.대선거구제보다 낫다는 평을 받는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주장해왔지만, 더민주가 중.대선거구제 논의에도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대선거구제이든, 권역별비례대표제든, 정당명부비례대표제든, 현행 소선거구제는 균열이 필요하다.
다만 어떤 제도를 택하든, 특정 정당이 지역주의 등에 기대 악용할 수 없도록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지구당 부활 등 과거 오세훈법에 의해 묶였던 정치 제도 역시 손을 봐야 한다. 이 법안은 오히려 정치 신인들에게 족쇄로 작용했고, 기득권층의 힘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수 정당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시킨 법이기도 하다. 일반 유권자의 정당 참여가 제약되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등, 정치권이 허약 체질이 된 일등 공신이었다. (☞관련기사 : 한국 정치, '오세훈의 저주'가 문제다!)
결선투표제도 중요하다. 대선 때마다 반복되는 '야권 후보 단일화' 논란은 그 자체로 유권자들에게 스트레스다. 결선투표가 있다면 소수 정당의 주자들도 마음 편하게 대권에 도전할 수 있으며, 그만큼 우리 정치의 스펙트럼은 넓어질 것이다. 또한 과반 표를 얻지 못한 대통령이 탄생하면 이른바 '선거 불복'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국정 운영은 그만큼 힘을 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민의의 왜곡이다. 새누리당에도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정권'이 탄생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눈 앞의 정치 상황만 보고 섣불리 반대할 일이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선거제도와 정치제도 개혁은 3개 정당이 교섭단체를 꾸리고, 어느 한 정당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20대 국회가 적기다. 일단 정치개혁특별위위원회를 최우선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거듭 강조하지만, 게리맨더링이 횡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반 의석을 가진 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룰을 바꿀 열쇠를 쥐고 있는 자가 불합리한 룰의 최대 수혜자라면 선택은 분명하다. 귀족 출신인 프랑스 대문호 발자크의 위대한 점으로 엥겔스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필연적 몰락을 인식하고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됨을 알면서도 시민 권력의 탄생을 지지했다.
그때처럼, 지금 세상은 변하고 있다. 기득권에 함몰되선 안된다. 선거제도가 민심을 담아내는 그릇이 못 된다면 그 그릇을 고쳐 써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지역구 의원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당신들을 해할 사람은 없다. 유권자는 이미 알고 있고, 소심한 당신들에게 선거제도 개혁의 길을 터 줬다. 만약 20대 국회가 선거제도 개혁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21대 국회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호조건에서도 못 한다면? 다음 총선에서 당신들이 가장 먼저 심판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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