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를 책임지라며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 등을 상대로 34억여원의 구상권을 청구해 제주사회가 들끓고 있다. 강정마을은 물론 시민사회, 각 정당, 4.13총선 당선자, 제주도의회까지 '뺨을 때려놓고 손바닥이 아프다며 맞은 상대방에게 손해를 물어주라는 격'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책사업에 따른 구상권 청구 자체가 전례를 찾기 힘들거니와, 이미 해군기지가 완공된 후여서 도민사회는 이 땅에 반대세력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제주의소리>는 구럼비 발파 못지않게 제주사회를 들쑤셔놓은 해군의 구상권 청구에 대한 강정 현지의 반응과 해법 등을 3차례에 걸쳐 다룬다.
지난 3월 29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하우스 감귤 농사를 짓는 40대 젊은 농부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유는 해군의 구상권 청구.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사실"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6년 만에 다시 거리로 나섰다.
물 좋고 사람 좋은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강정마을에서 줄곧 자랐고, 지금도 강정마을에 살고 있는 김규남(42)씨 얘기다. 그러나 그는 마을에서 야생마 같은 존재다. 조련되지 않는 야생마. 외부로부터의 속박을 거부하고, 순치되지 않는 야생마 기질을 타고 났다. 들판에 뛰어노는 매우 평화로운 야생마에게 억압과 구속이 덧 씌워지는 순간,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정부와 해군이 강정마을을 절차적 정당성 없이 입지로 결정, 일방적으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자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에 참여해 때로는 반대 투쟁의 '인간방패' 같은 역할을 자청한 것도 타고난 그의 기질 탓이다.
숱한 해군기지 반대집회 현장에서 군·경, 때로는 용역들과 온몸으로 맞서는데 몸을 아끼지 않아 상처투성이였던 일, 도청 앞 1인 반대시위 도중 극단적 해군기지 찬성론자의 차량 돌진으로 큰 사고를 겪을 뻔 했던 일, 마을공동체가 찬·반으로 두 동강이 나면서 참을 수 없는 그의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일 등은 '일방적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원인이 제공한 안쓰러운 결과들이다.
김씨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한 지난 3월29일. 그는 해군으로부터 "어제(3월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주민군복합항(제주해군기지) 구상권(손해배상청구) 행사 소장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벌인 강정주민과 5개 시민사회단체 등 116명을 상대로 '불법적인 공사방해 행위로 인해 국민세금의 손실을 가져온 원인 행위자에 대해 그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라며 약 34억5000만원의 구상권을 청구한 것.
김 씨도 구상권 청구 대상자 116명 중의 한 명이다.
강정마을에 청천벽력 같은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일방적 결정이 내려진 2007년 4월부터 2010년까지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적극 펼쳤으나, 그 4년간 그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청한 날이 없었다.
누대로 서로 "형님" "삼촌"하며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의좋던 마을주민들이 해군기지가 들어오면서 찬성과 반대파로 나뉘어 철천지원수가 돼버린 마을공동체 파괴와 갈등은 김 씨조차도 더 이상 해군기지 투쟁 현장에 서있기 힘들게 했다. 술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날도 늘었고, 몸과 마음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당시 힘겨운 30대 중반을 넘겨야 했던 그에게 고향마을 '강정'은 더 이상 과거 제주도 제일의 마을 '일강정'(一江汀)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진 구럼비 바위에 서서 방어와 농어를 낚던 평화로운 '강정마을'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차마 고향을 떠날 순 없고, 해군기지 반대투쟁이라도 접어야 자신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 반대투쟁에 나섰던 그가, 살기 위해 반대투쟁을 접기로 한 것이다. 수많은 강정마을 주민들이 겪는 역설이다.
"방어를 잡으려면 각재기(전갱이)를 먼저 잡아야 됩니다. 각재기를 미끼로 쓰면 방어를 잡을 수 있거든요. 어릴 때 방어 잡고 싶어서 각재기를 잡는데, 방어는 잡히지 않고, 각재기만 수십 마리 잡힌 겁니다. 어떡해요. 그냥 그 자리에서 각재기국을 끓였죠. 지나가는 마을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고, 맛보겠다고 다 구럼비로 몰려들었어요. 여기서 또 뭘 어째. 그냥 거기서 나눠 먹었어요. 구럼비는 우리에겐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구럼비'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해군기지 콘크리트에 묻혀 아픔과 상처투성이의 기억이 돼 버린 '사라진 구럼비'는 해군기지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모든 강정마을 사람들에겐 그런 곳이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낚시꾼들이 강정마을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진짜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해야 하나. 낚시가 너무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아! 멧부리 알죠? 멧부리가 참 신기하게 생겼단 말이에요. 거기서 뛰어 놀 때는 다 이렇게 생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이 먹고 보니까 멧부리 같은 곳이 또 없더라고…."
강정마을 명소 중 한 곳인 '멧부리 해안'도 지난 2012년 초, 제주해군기지 제2공구 공사과정에서 시멘트에 범벅이 되고 굴삭기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기억하는 '일강정' 강정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곳곳이 사라지고 깊은 상처만 남았다.
김 씨와의 대화는 다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유치결정이 내려진 2007년 4월 26일로 되돌아갔다. 당시 젊은 농부로서 마을에서 감귤 농사를 짓던 그다. 당시 마을회장과 어촌계 등 해군기지를 찬성한 일부 주민들이 마을향약 절차에 어긋난 임시총회를 열어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해버렸다.
마을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그것도 1조원이 투입된다는 국책사업을 1900여명이 살고 있던 강정마을 주민 중 단 87명만이 모여 '찬반토론'도 없이 마을회관 문을 꽁꽁 걸어 잠가 취재진 출입도 막은 채 박수로 통과시킨 바로 그날이다. 총회가 열리는 줄로 모르고 밭에서 일하고 있던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특히 해군기지 유치결정을 내린 당시 임시총회는 마을향약에 명시된 총회 공고일수도 채우지 못했고, 더욱이 마을에 공고했던 총회 안건에는 '해군기지 관련의 건'이라고 해놓고, 정작 임시총회 행사장에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유치의 건'이라는 총회안건을 부착하는 속임수를 부렸다.
이후 3개월여 뒤인 2007년 8월10일 주민들에 의해 다시 소집된 마을 임시총회. 주민 436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426표, 반대 15표, 무효 5표. 압도적인 표로 주민들은 윤태정 마을회장 해임을 결정했다. 꼼수를 부린 총회안건으로 단 87명만이 참석해 해군기지 유치결정을 내린 3개월 전의 총회는 '가짜 총회'였던 셈이다. 시골마을에 주민 436명이 참석하는 전무후무한 '진짜 총회'가 열려 주민 뜻에 반해 해군기지 유치결정을 내린 마을회장을 탄핵했다.
하지만, 공사는 강행됐다. 감귤 농사꾼은 어느새 '해군기지 결사반대'란 머리띠를 두르고 늘 현장에서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초창기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은 격렬한 날 보다 평화로웠던 날이 훨씬 많다. 경찰들의 안내에도 잘 따랐고, 거친 몸싸움도 없었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도민사회에 호소하는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생업 때문에 감귤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해군기지 걱정에 '몸 따로 마음 따로'인 날이 대부분이었다. 몸은 밭에서 일하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 있었다.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투표를 빼먹은 적 없다는 김씨는 정치권에 막연한 기대를 걸고, 해군기지 문제를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정당에 투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치권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가 해군기지 반대집회 현장에서 격해지게 된 건 주민 갈등이 심화되면서다. 도대체 해군기지가 뭐 길래…. 형제 같던 이웃 간에 고성을 지르고 멱살잡이를 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집회현장에서 때론 몸싸움이 빚어지기도 했고, 감정이 격해져선지 거친 몸싸움도 연출됐다.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도 지칠 대로 지쳤다. 절차적 정당성을 어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뜻을 접은 것은 아니되, 반대운동에 더 이상 직접 나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난 2010년의 일이다.
그러는 사이 해군기지 공사는 속도를 냈고 시간이 흘러 크루즈터미널 공사가 남았지만, 사실상 해군기지는 완공됐다. 이런저런 해군기지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김씨. 어느 날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군이 주민과 반대단체에 구상권을 청구했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해군기지가 마을에 들어서는 바람에 마을주민들이 갈등에 빠지고, 마을 공동체가 산산이 파괴됐노라, 그래서 해군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되레 해군이 강정마을에 구상권을 청구했다니….
동백꽃과 왕벚꽃이 지기 시작한 4월 중순 <제주의소리>가 만난 김씨는 해군의 구상권 청구를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그는 "솔직히 저요? 구상권요? 그거 돈 내면 끝이지요. 그런데 이게 국가가 국민에게, 한 마을에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요. 울화통이 터져 살 수가 없어요"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이 국가가, 이 나라가, 우리 같은 농사꾼들을 '얼마나 더 괴롭히고 싶어서 이렇게까지'란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정말 억울해서 다시 길거리로 나온겁니다"라며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
김 씨는 강정마을회가 해군의 구상권 청구에 반발해 해군기지 앞에 설치한 강정마을 임시회관천막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6년 만에 다시 해군기지 반대 투쟁의 거리에 나선 것이다. 기자와 마주한 이날도 그는 임시마을회관 천막에서 나무를 잘라 침대를 만들고 있었다.
김씨는 "해군의 구상권 청구로 잠시나마 조용히 지냈던 사람들이 다시 울분을 토하고 있습니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일 겁니다. 이번 구상권 청구가 해군에게는 분명히 자충수가 될겁니다"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구상권 청구가 주민들을 자극해 해군에 오히려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기자와 헤어질 때까지 김씨는 세월호 참사 피해 유가족들이 하던 말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진 않을 겁니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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