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이 막을 내렸다.유권자가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는 큰 틀의 평가 이외에도, 거대 양당의 기득권 정치를 타파하라는 유권자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런 점에서 선거 이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국가 차원의 개혁 과제를 생각해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선거법이 있다. 유권자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예컨대 이번 20대 총선 결과,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정당 득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23석을 가져갔다. 전체 의석수의 41%에 해당되며 15.5%의 불로소득을 챙겼다.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33.5%의 정당 득표를 얻었으나 122석을 차지했다. 전체 의석수의 40.6%로 7.1%의 불로소득을 가져갔다.
이에 반해 국민의당은 상당히 손해를 봤다. 정당 득표는 26.7%였으나 38석을 가져가는데 그쳤다. 전체 의석수의 12.6%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선거 제도였다면 80석을 가져가야 정상이다. 나머지 42석을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에 뺏긴 꼴이다.
이렇듯 거대 양당이 받은 정당 득표와 당선자 수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정치 지망생들은 자신의 정치철학과는 무관하게 당선 가능성이 높은 거대 정당의 문을 두드리게 되고, 옥새 투쟁으로 대변되는 공천 파동과 같은 진부한 정치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다.
야권 연대도 마찬가지다. 가치 연대라기보다는 여당을 이기기 위한 자리 몰아주기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공정하고 후진적인 정치지형의 변화를 위해 대대적인 선거 제도 개혁이 불가피하다.
유권자의 표심과 의석수가 불일치한 문제뿐만 아니라, 고쳐야 할 선거법 독소 조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거 현장을 뛰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번 20대 총선에서 내가 속한 정당(녹색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돕기 위해 선거 사무원으로 등록하고 광주, 순천, 전주를 돌며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
선거 참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지역구 후보가 아닌 비례대표 후보를 도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2년 지방 선거부터 '1인 2표제'를 도입해서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각각 1표씩 행사하는 병립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300석 국회의원 가운데 47석이 비례대표다. 전체 의석의 15.6%에 불과해서인지, 비례대표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약간 비껴나 있었다. 유권자에게 비례대표는 조금 낯선 존재였다.
언론도 비례대표보다 지역구 후보를 집중 조명한다. 각 정당이 인재라고 내세우는 비례대표 후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대표가 비례2번을 받아야 하느냐 마느냐가 쟁점이 될 뿐, 그 외 비례대표 후보는 집으로 배달되는 공보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원내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가 관심 밖이라면 소수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는 말 할 것도 없다. 선거 운동을 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유권자들에게 비례대표 후보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투표용지는 2장이고, 1장은 정당에 투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나는 유권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어느 선거 때보다 유권자의 '교차 투표'가 발휘된 선거였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 뛰어본 결과는 투표용지가 2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유권자가 상당했다.
심지어 지역구 후보 투표용지의 기호와 비례대표 후보 투표용지 기호를 동일하게 찍어야 무효표가 안 되다고 인식하는 유권자도 있었다. 실제로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 관한 유권자 인식 조사를 발표한 중앙선관위의 자료를 보면 47%의 응답자가 '1인 2표제'를 모른다고 답했을 정도다. 절반 가까운 사람이 14년 동안 시행돼온 선거 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전략적 투표 행위라는 유권자의 고유한 선택권이 침해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도를 이해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교차 투표'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앰프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육성만으로 지나가는 유권자에게 비례대표제를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례대표 후보의 앰프 사용은 선거법 위반이다. 선거를 뛰면서 가장 답답했던 점이기도 하다. 혹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다란 개조 차량에 앰프를 싣고 유세하는 후보자도 있는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유세차를 사용할 수 있는 후보는 지역구 후보만 가능하다.
44명의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 34명의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18명의 국민의당 비례대표 후보 등 총 21개 정당이 내세운 비례대표 후보는 158명이다. 이들 비례대표 후보는 마이크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들이 후보로서 유권자와의 차이는 어깨띠를 두르고 명함을 나눠줄 수 있는 것 외에는 없다.
당연히 거리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비례대표 후보를 낯설어 했다. 47명밖에 안 되는 비례대표지만 이들은 각각이 국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엄연한 입법 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이들 후보들의 면면을 파악하기 힘들다. 심지어 각 정당에서 비례대표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는지도 모른다. 마이크를 사용하여 비례대표 후보를 알리고 싶어도 법이 막고 있다. 비례대표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기회가 철저히 봉쇄된 것이다. 심각한 유권자의 알권리 침해다.
비례대표 선거 운동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선거 사무원의 숫자다. 1명의 지역구 후보는 선거구 읍, 면, 동 수의 규모에 따라 선거 사무원을 둘 수 있는데, 많게는 50명 이상 둘 수 있다. 그러나 전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선거 운동을 해야 하는 비례대표는 후보자의 숫자와 무관하게 시, 도별 2명씩에 불과하다. 즉 34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는 비례대표 후보를 낸 모든 정당이 최대 34명의 선거 사무원으로 전국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도나 면적이 가장 넓은 경상북도 유권자를 대상으로 2명의 비례대표 선거 사무원이 제대로 선거 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선거 사무원은 명함을 돌릴 수도 없다. 정당명이 적혀 있는 피켓이나 점퍼를 입는 정도가 선거 사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 단순 다수 득표제 중심의 선거 제도가 가져온 불합리성의 단면이며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 하는 소수 정당의 비애다.
기호를 설명하는 일도 버거웠다. 유권자가 수 없이 물어보는 질문 중에 하나는 "몇 번이냐"였다. 원내 정당은 의석수에 따라 고유한 번호를 받을 수 있고, 예비 후보 때부터 기호를 부각시키며 선거 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외 정당은 가나다순이기 때문에 어떤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내고 등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본선거 직전인 후보자 등록이 마감되는 시점에 번호를 알 수 있다. 거대 정당이 기호를 포함한 모든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는 꼴이다.
선거를 직접 뛰면서 느낀 불합리한 선거 제도에 대해 몇 자 적었지만, 그 외에도 고액 기탁금이나 선거 비용 보전 제도, 배우자나 직계 존, 비속이 없는 후보자에 대한 차별 등 우리나라 선거법은 여러 독소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대대적으로 수술할 때가 됐다. 이번 20대 총선 결과가 말해준다. 일여야다의 구도를 유권자 개개인이 전략 투표를 통해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도출했다. 이미 유권자는 현재의 선거 제도를 뛰어넘는 투표 행위를 보여주었다.
물론 유권자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표를 없애기 위한 자기 방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거 제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었다면, 혹은 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된 선거 제도였다면 유권자는 자신의 선택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며 최선에 투표했을 것이다. 늦었지만 현행 선거 제도는 유권자 수준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20세기 유물로 묻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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