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 전날, 구의동 어느 교회 옥상. 공정감시단 활동을 위해 만난 대학생이었다. 어느 대학 총학생회에서 꽤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친구였다. 그런데도 두려워했다. 이 밤이 지나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게 뻔했다. 밤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질 게 뻔했지만 나는 이길 거라 말했다. 믿음이자 최면이었다. 질 거라고 말하면 그 밤을 견디기 힘들 테니. 차 소리는 무심했다. 둘은 담배를 피웠다. 답답했다. 절망했다. 졌다.
1992년 3당 합당의 여세를 몰아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이기게 되어 있었다. 강고한 기득권 세력에 더하여 영남이라는 지역의 동맹 앞에 소수 야권은 뾰족수 없이 졌다. 두 번의 민주정부를 뒤집고 들어선 보수당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악화시켰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더 어려워졌다. 우리는 다시 실패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무엇이 더 평등한가, 무엇이 더 정의로운가, 누가 더 절실한가를 따지는 시대는 갔다. 다수결! 우리는 다수결이라는 완고한 진리 앞에 굴복한 지 오래다. 억울한 사람이 있어도, 국가의 무능으로 생명을 잃어도,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해도, 팔뚝의 근육이 그대로인 채 일터에서 쫓겨나도, 신규 채용된 청년층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64%를 차지해도, 그래서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나아도, 역사는 친일논리를 옹호하고 개인은 무차별적으로 감시당해도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면 잊힌다. 현 정부의 독선은 다수결이라는 야수의 토사물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강력한 소수 야당'은 없다. 반대파는 더욱 무기력해질 것이다. 이른바 '합의'에 의한 의회정치는 점점 약화되어 왔다. 필리버스터는 시간 끌기 정도밖에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소수파의 테러방지법 폐지 요구는 발언 당사자들조차 '실현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였다. '어찌되었건 다수파의 법안은 통과될 수밖에 없다'거나 '통과되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 되었다. 다수파는 소수파와 대화하기보다는, 수적 우위에 따른 절차만 지키면 된다. 지금처럼 형식적, 절차적, 대의적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소수파는 별다른 힘을 쓸 수 없다. 법은 더욱 폭력적으로 바뀔 것이고, 평범한 시민들은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엘리트와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세분화된 각종 기관들의 정치권력은 확대될 것이다. 대통령은 권한을 더 강화할 것이다. 민중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영역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도 투표를?
정치인에게 선거가 무서운 건?
새롭지 않다. 정치인들은 매번 선거에 목을 매다가 당선되면 입을 씻는다. 그건 그들이 시민에게 주어진 투표권(정치의 몫)이라는 게 허울뿐인 '자유'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잠깐 줬다가 곧바로 회수할 권리다. 평소에 정치인들은 대의민주주의를 침해하지 말라는 논리로 시민을 배제했다. 자신들만의 질서 속에 시민이 기웃거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시민사회 영역이 정치권에 발언권을 잃은 것은 옛날 같은 지도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수에 의한 의회정치만이 유일한 민주주의라는 걸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시민은 단 하루만 유권자(有權者)다. 투표일에나 정치가 평등을 향해야 한다는 걸, 정치에 아무런 자격이 필요치 않다는 걸 확인한다. 민중과 다른 특권을 가진 정치인이 동등한 자격을 갖는 날이다(절대 우리가 우위에 서진 않는다). 유일하게 '하나'의 몫으로 동일하다. 가난한 자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 이 세계를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것인지를, 평등이 정치의 목표임을 확인하는 찰나. 4년에 꼴랑 하루, 오직 단 하루만 평등의 문이 열렸다가 이내 닫힌다. 그날밖에는 없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연극을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목소리는 지워지고 평등의 정치는 사라진다.
정치 주체가 되자마자 곧바로 대상이 되는 역설. 주인이 되자마자 노예가 되는 것을 승인하는 날. 역설밖에 남지 않은 공간에 놓이는 유일한 시간이 투표일이다.
투표는 과거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계산서를 들이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니 한번만 봐달라며 엎드린 사람들에게 주제 넘는 측은함을 갖는다. 그 속에 혹시 '진정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믿어버린다. 위선적 거짓이 있음을 알면서도 다시 뽑는다. 마케팅과 여론 조작에 능숙한 홍보전문가들이 던지는 천박한 문장과 이미지에 휘둘린다. 잘못했으니 그만 하겠다고 하지 않고, 잘못했으니 뽑아달라는 비논리는 정치라기보다는 깡패의 의리 같은 거다.
어느 지인이 '마이너스 투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투표하자는 거다. 투표 도장을 두 개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사람을 찍거나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을 찍자는 것이다. 이를 '마이너스 투표'라 해도 좋고 '삭감(감표) 투표'라 불러도 좋다. 싫어하는 사람을 찍은 표는 후보의 득표수에서 빼기를 해야 한다. 100표를 득표했더라도 마이너스 표를 20표 받았으면 80표로 정산한다. 어차피 1등만 뽑는 선거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를 뽑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마이너스 투표는 최악의 후보를 제거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런 만화 같은 제안은 투표의 본질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누구에서 표를 주거나 표를 깎으려는 이유는 동일하다. 투표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미래형이 아니다. 미래형은 '영원한' 사랑을 속삭일 때나 하는 가능하다. 선거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맡기는 자격을 심문하는 일이다. 입국 심사대다. 경계선을 넘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거는 과거형이다.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할지는 경계선 밖에 있을 때, 즉 과거의 행적으로 판단되는 거다.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다면 내가 찍으려는 사람이 우리를 대표해 왔는가를 기준으로 투표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한번' 봐주는 투표는 없다. 과거의 잘못을 거부하거나 승인하는 투표만 있다.
결국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그가 누구의 편을 들어왔는가이다. 이는 우리가 누구의 편을 들어왔는가와 같은 말이다. 삶과 노동이 총체적 위기에 빠진 시대에 살면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절망의 수신호를 보내는 거다. 좌절과 절망의 수신호는 이번에도 어딘가에 가 닿지 못할 것이다. 여당은 과반을 넘어 개헌을 꿈꾸고 분열된 야당은 패배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할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절망이 희망으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사실과 절망의 극복은 당사자들의 삶과 직접행동만으로 가능하다는 진실이 도리어 우리를 위로한다. 미래는 누구도 대행할 수 없다. 투표는 자율적 개인의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보완재일 뿐이다. 미래에 투표하지 말고 과거에 투표하자. 우리에게 누가 절망을 주었는지, 우리 사회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삶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찾아 돌아오지 않을 한 표를 투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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