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22일 고개를 숙였다.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하기 직전에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한 번, 담화문 낭독을 마친 뒤 또 한 번, 이렇게 모두 세 번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의 표정은 싸늘하게 경직돼 있었다. 지난 2월 25일 공식 취임한 지 채 석 달도 안 돼 일어난 일이다.
정말 사과하고 싶었다면
허니문을 구가하고 있을 시기에 대통령의 사과를 접하는 건 국민들에게도 곤욕이다. 하지만 진정성이 담긴 대통령의 낮은 자세였다면, 남은 4년 9개월의 성공을 위해 지난 석 달 간 묻은 때는 흔쾌히 툭툭 털어 줄 생각이 우리 국민들에게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담화문 발표 직전, 사전 배포된 원고를 받아 든 순간 기자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담화문의 구구절절은 '사장님 훈시'라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소통 부족'을 절감한다면서도 담화문이 전달하는 소통은 일방향이었다.
담화문에는 "축산농가 지원대책 마련에 열중하던 정부로서는 소위 '광우병 괴담'이 확산되는 데 대해 솔직히 당혹스러웠다"는 대목이 있다. 이 대통령이 '괴담'이란 말로 흉물스럽게 일그러뜨렸지만 사실 국민들의 논리는 명징하고 단순하다. '식탁안전'이 위협받게 됐으니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 대통령의 사과는 '소통부족'이 아니라 '졸속협상'에 대한 사과여야 했고, 재협상 의지를 드러내야만 비로소 '소통'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담화문을 낭독하기 전, 최종본이 아니라는 말이 나왔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최종본에도 '괴담'이라는 표현은 끝내 삭제되지 않았다.
담화문 발표 이전과 이후 대통령의 인식수준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단순히 '표현'을 갖고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이 국제기준과 부합하다"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며칠 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총대를 메고 발표한 '추가 합의'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양국이 교환했다는 '레터' 어디에도 '수입 중단'이라는 말은 없다. "국민건강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은 확고하다"는 이 대통령의 수사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담화문 대부분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비준을 압박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점도 담화의 성격을 의미한다.
이 대통령의 "지금 시점에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쇠고기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 한미 FTA도 없고, 경제발전도 없고, 선진국도 없다'는 일종의 '협박'인 셈이다. 뒤집어 보면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협상과 한미 FTA를 밀접하게 연계해 진행해 왔음을 인정한 것이고, 무엇을 위해 쇠고기 협상을 서둘렀는지를 감지하게끔 하는 말이다.
'국정쇄신'이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은 점도 의미심장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 이날 담화를 통해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쇄신의 필요성을 언급할 것이라는 게 청와대 측의 전언이었고, 이쯤 됐으면 가시적인 조치가 나올 것으로 보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이 대통령은 '쇄신'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은 제 탓"이라는 말로 우리 측 교섭 책임자와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담화문 발표 직후 이 대통령의 '내 탓이오'를 "인적쇄신은 없다"는 뜻으로 친절하게 해석까지 해주었으니 더 이상의 부연은 불필요할 듯 싶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권위와 품격, 진솔함을 담았어야 할 '담화'라는 형식을 '훈시'와 '최후통첩'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국민들 앞에서 '돌격 앞으로'를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정부는 다음 주 초 장관 고시를 강행할 방침이다. 그리고 며칠 뒤면 우리의 식탁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올라 온다. 국민건강의 운명을 되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옮겨놓고도 그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얼마나,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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