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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가 연세대 동문? 그 기막힌 사연은…

[프레시안 books]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개인적인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모교에 대한 애틋함이 그다지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동문회나 동창회 언저리에도 가본 적이 없는 데다, 모교 출신의 언론인 모임에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 사내에도 모교 출신이 몇몇 있긴 하지만, 다른 학교 출신에 비해서 딱히 친분이 깊다고 할 수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몇하곤 사이가 더 안 좋(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밖에서 본 모교의 모습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학벌'을 재생산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기득권에 상응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이는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학교가 내세울 만한 거라면 이명박 같은 대통령을 배출하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닐까?

그런 내가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박형우 지음, 공존 펴냄)를 펼쳐든 것은 한 가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일 때문에 한국 근대 의학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연세대학교를 놓고서 커다란 오해 혹은 신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언더우드 신화'다.

언더우드 고아원이 연세대학교 효시라고?

▲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박형우 지음, 공존 펴냄). ⓒ공존
굳이 연세대학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도 이 학교의 창립자를 구한말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년)로 알고 있다. 이 학교 한 가운데 서 있는 두 손을 벌린 언더우드의 동상까지 염두에 두면 이런 상식은 기정사실이 된다. 하지만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는 이 언더우드 신화를 사료에 근거해 철저히 해체한다.

책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살펴보자. 1885년 4월 5일 인천으로 들어온 언더우드는 조선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선교 활동을 대놓고 하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서 몇 명의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11일 고아원을 개원한다.

최근 연세대학교는 한 연구자의 주장을 따라서 이 언더우드의 고아원을 연세대학교의 효시로 자리매김했다. 이 고아원을 계승했다는 '구세학당'을 다닌 도산 안창호에게 2013년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초등 교육을 담당했던 고아원을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교의 효시로 보는 것인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짐작컨대, 연세대학교는 1885년 4월 10일 조선 정부가 부동산(하드웨어)을 제공하고, 알렌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가 운영(소프트웨어)을 맡았던 제중원뿐만 아니라, 같은 해 몇 명의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다 이듬해 공식 개원한 언더우드의 고아원도 연세대학교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상징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도산 안창호는 영문도 모른 채 연세대학교 동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역사 만들기는 과연 사실 관계에 부합하는가? 진실은 이렇다.

도산 안창호가 연세대학교 동문이라고? 거짓말!

우선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이 고아원 운영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는 1889년 10월부터 1890년 5월까지는 일본, 1891년 4월부터 1893년 5월까지는 미국에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 고아원은 남학교로 전환되었고, 1893년부터 또 다른 선교사 프레드릭 밀러(1866~1937년)가 책임을 맡게 된다.

심지어 이 학교는 아예 밀러의 한국 이름 '민노아'의 이름을 따 '민노아학당'으로 불렸다. 바로 이 학교가 도산 안창호가 다녔다는 구세학당이다. 연세대학교는 이 학당이 중등 교육 과정을 담당했던 경신학교(경신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고등 교육 기관 연희전문학교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언더우드가 개원만 해놓고 제대로 돌보지 못한 고아원은 사실상 폐지되었고, 새롭게 설립된 남학교(민노아학당)는 언더우드와 상관없는 학교였다. 더구나 이 학교조차도 몇 년 못가 폐교되어 (경신학교가 아니라) 영신학교에 통합되었다(1897년). 즉, 연세대학교는 자기 학교 역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도산 안창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1901년 10~11월 개교한 경신학교는 언더우드와 관련이 있는가? 남학교가 서울에서 없어지고 나서 새롭게 준비된 교육 기관이 바로 중등 교육 기관 경신학교다. 하지만 1901년 경신학교 개교는 제임스 게일(1863~1937년)이 주도했고, 1903년부터는 다시 밀러가 책임을 맡았다. (언더우드는 1901년 5월부터 1902년 12월까지 한국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경신학교는 이전에 존재했던 초등 교육 기관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가 이 학교의 개교에 관여했다는 기존의 주장도 군색하기 짝이 없다. 개교 전후는 물론이고 개교하고 나서 거의 1년 가까이 한국에 없었던 언더우드가 이 학교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난센스다.

임시 교장 하다 죽어버린 언더우드, 진짜 창립자는?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사이에서 고등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언더우드가 소속되어 있던 미국 북장로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 교파는 '연합'을 통해서 서울에 고등 교육 기관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1915년 4월 12일 한국기독교대학을 개교한다. 이 대학이 바로 연세대학교로 이어지는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이다.

언더우드가 개교 직전에 한국기독교대학의 '임시' 교장으로 선임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이 개신교 연합 대학의 설립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개교 1년(!) 만인 3월 27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연합 대학을 함께 설립하고 부교장을 맡았던 올리버 에비슨(1860~1956년)에게 뒷일을 맡기고 미국으로 귀국한다.

그러고 나서 언더우드는 불과 몇 달 후인 1916년 10월 12일 세상을 뜬다. 그렇다면, 언더우드가 이렇게 가고 나서 개신교 연합 대학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사망 후에 이 학교는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확정짓고, 언더우드에 이어 제2대 임시 교장을 맡고 있던 에비슨을 만장일치로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고 정식 인가도 받는다.

자,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886년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시작해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는 이 대학이 최근 만든 공식 역사는 상당 부분 사실과 맞지 않는 '역사 만들기'의 산물이다. 둘째, 연세대학교 한 가운데 서 있는 언더우드 역시 이 학교의 역사 만들기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화'다.

왜 에비슨이 아니라 언더우드 동상인가?

그렇다면, 에비슨은 어떨까? 언더우드에 비해서 대중에게 생경한 에비슨은 조선 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운영을 넘겨받아(1894년 9월말)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의 초석을 닦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와 더불어 언더우드 사후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동시에 역임했다.

애초 한국에 파견된 각 교파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학교의 합동을 1913년 무렵부터 꿈꿨다. 하지만 양쪽의 교장을 에비슨이 동시에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동 과정은 지난했다. 일제 강점기와 제2차 세계 대전, 해방 전후의 혼란, 한국 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두 기관은 1957년 비로소 합동할 수 있었다.

연희의 '연'과 세브란스의 '세' 앞 자를 딴 연세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쯤 되면, 참으로 궁금하다. 지금 언더우드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마땅히 에비슨이 서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최소한 에비슨이 언더우드 옆자리에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어지는 전통을 연세대학교가 강조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연세대학교의 역사 만들기, 예수 얼굴에 침 뱉기?

처음부터 쓴 소리를 하고 시작했으니, 몇 마디를 덧붙이자. 현실에서 내세울 구석이 없는 집안일수록 족보 타령을 한다. 사실 관계가 지극히 빈약한 역사 만들기에 몰두하고, 그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역할을 과장해서 신화를 창조하는 연세대학교의 모습이야말로 딱 이런 모습이 아닌가?

앞에서 거칠게 살펴본 사정을 염두에 두면 연세대학교는 한국 개신교 선교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선교사와 초기 개신교 신자의 꿈이 집약된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 연세대학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혹시 예수 보기에 낯부끄러운 행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 박형우는 의과 대학 해부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부전공으로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한 근대 의학사를 연구해왔다. 몇 해 전부터 박형우가 미국, 캐나다 등지로 동분서주하면서 흩어져 있는 한국 기독교 초기 전파 과정의 1차 사료를 모으고 있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자료를 이용해 자기 학교의 만들어진 신화에 매스를 갖다 댈 줄은 몰랐다.

협동-연합-합동, 세 가지 열쇳말로 풀어낸 그의 주목할 만한 사료에 근거한 자기 성찰에 연세대학교의 구성원 또 한국 기독교 수용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계가 어떻게 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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