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꼭 이런 질문을 한다. "전쟁 나면 어떻게 해?" 그러면 나는 어떨 때는 웃어넘기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농담으로 답을 할 때도 있다. 사실 질문을 하는 사람도 나도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파주라면 너희 집 옥상에서 북한 땅 보이겠네?'와 같은 의미의 질문인 셈이다. 그렇지만 저 질문 속에 숨어 있는 무의식, 바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웃음이나 농담으로 넘기기 어렵다. 내게는 저 질문이 마치 우리의 일상과 무의식 속에 전쟁에 대한 체감이 얼마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한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쟁과 안보는 우리의 일상과 무의식 깊숙하게 박혀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철에는 안보나 국방 관련 정책을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안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의 정책도 지역 개발 공약에 밀려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면 반박하기 어렵다. 실제로 당과 후보를 가리지 않고 다들 자기가 당선되어야만 지역이 발전할 것처럼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니 말이다. 그런데, 안보나 국방 관련 이슈 자체가 선거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관련 정책이 실종되었을 뿐, 국방과 관련한 이슈는 다른 모습으로 선거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전에는 주로 북한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왜곡 과장하는 방식으로 안보 관련 이슈가 선거에 활용되었다. 북풍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주로 집권 여당의 정치인들이 안보 불안을 들쑤시면 유권자들이 불안해서 여당을 찍어줄 거라는, 그야말로 안보와는 아무 상관 없는 표몰이 수단으로 안보 이슈를 활용했다. 북풍은 요즘 들어서는 힘이 많이 약해졌지만 색깔론처럼 조금 모습을 바꾼 형태로 살아남아 여전히 선거 국면이 되면 전가의 보도처럼 이를 휘두르려는 정치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북풍과 더불어 선거판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후보자나 후보자 직계 가족의 병역 문제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세를 굳혔다고 평가받은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에게 진 까닭은 물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이인제 후보의 출마 같은 여권의 분열 등 여러 이유가 중첩되었기 때문이지만, 그 가운데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도 이회창 후보의 낙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후로 선거 때마다 병역 문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후보의 당락에 영향을 끼치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물론 후보자와 후보자의 직계 가족이 부당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면 유권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 권리가 있고, 권력을 남용해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선출직으로 뽑히지 않아야 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것에 대해, 특히 권력 남용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 무척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그 민감함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도 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악용하거나 비리를 저질러 군대를 빠진 사람이 아닌, 군대 가지 않은 사람들 일반에 대한 혐오 같은 것들 말이다. 군대 안 간 사람에 대한 혐오는 매우 일상적이고,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치인의 자격 문제로 불거진다.
대표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라 군대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여러 조롱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안보 정책에 대해서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책인지, 평화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안보를 미끼로 해서 다른 이득을 취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비판하는 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군대에 안 갔기 때문에 군대를 잘 모르고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은 적절하지도 않을뿐더러 정당하지도 않다. 일반 정치인들보다 군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국방부 장관만 보더라도 이미 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 특히 여성이 국방부 장관을 하는 나라들이 많다. 미국의 경우는 군 출신이 국방부 장관을 하려면 군대를 그만두고 7년이 지나야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제를 한다. 국방 정책을 추진해가는 데 군 출신만의 전문성보다 군대에 대한 민간의 민주적 통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국방부 장관도 아니고 일반 정치인들의 자격을 판단할 때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것이 결격 사유가 될 수 없다. 군대를 빠지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은 권력 남용과 비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 그것을 군대 안 간 사람 일반에 대한 혐오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안보에 대한 고민이 바탕이 된 정책은 사라진 채, 안보를 팔아 어떻게든 표를 많이 얻으려는 안보 장사꾼만 득세하는 이유가 뭘까? 1등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다 사표가 되는 선거의 속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안보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이 안보를 대하는 태도와 평화를 바라보는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국가 안보는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 억지력을 키우는 것만 생각했다. 새누리당이 정권을 잡을 때도 그랬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강한 군사력이 과연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 해마다 각국의 국방비를 분석하고 비교해 발표하는 스톡홀롬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10번째로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다. 이는 우리 군대가 주적으로 삼고 있는 북한의 수십 배에 달한다. 북한에 대한 전쟁 억지를 위해서 과연 수십 배의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방위 산업을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치면 연관 검색어로 방산비리가 가장 먼저 뜨는 현실에서 과연 저 정도의 국방비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규모일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과연 강한 군대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드를 배치한다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다. 오히려 최첨단 무기를 사는 돈으로 복지 분야에 쓰는 등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거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여러 사고들,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들 이런 것들,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들. 이런 것들이 안보의 내용이어야 한다. 군사 중심의 안보에서 비군사적인 영역으로 안보의 개념이 확장되어야 하고, 안보의 주체 또한 군대나 국가보다는 더 작은 지역 사회로 옮겨가야 한다.
온통 지역 개발 공약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안보에 대한 정책은 실종되는 총선에서는 어떤 정치 세력이 가짜 안보를 팔아서 표 장사를 하는 세력이고, 어떤 정치 세력이 더디고 힘들지라도 진짜 안보를 위해 애쓰는 세력인지 알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평소 말과 행동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누가 대량 살상 무기들에 큰돈을 쓰는 것을 지지해온 정치인인지, 어느 정당이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데 반대하거나 미온적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사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선거가 끝난 뒤다. 선거가 끝난다고 정치가 끝나는 건 아니다. 정치도 안보도 몇 년마다 돌아오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꾸준한 우리 삶 속에 있어야 한다. 미래는 바뀔 수 있다.
4.13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는
1부 그들이 말하지 않는 투표 이야기
1. 참정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청소년
2. 투표하러 가려면 수많은 방해를 넘어가야 하는 사람들, 장애인
3. 투표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 비정규·임시직·아르바이트 노동자
4. 우리나라, 민주주의 국가 맞나요?
5. '표의 주인'을 넘어 '정치의 주인'으로
2부. 차별 내리고 인권 올리고
1. 혐오 내리고 평등 올리고
2. 지역개발 내리고 어울림의 공간 올리고
3. 재벌의 권력 내리고 일하는 사람의 권리 올리고
4. 부양 의무제 내리고 국가 책임 복지 올리고
5. 싸워 이기려는 가짜 안보 내리고 안전하게 살 권리 진짜 안보 올리고
로 구성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4.13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바로 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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